사랑의 절기

The Twenty Four Turns of Us

by 김태규

사랑의 절기

The Twenty Four Turns of Us


ㅡ 김태규


입춘(立春)

우리는 아직 부르지 않는다

이름이 오기 전

사이에는 향기만 있다


우수(雨水)

마른 하루에 금이 가고

웃음이 이유 없이 늘어난다

되돌아갈 길이 사라진 쪽으로

일상이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경칩(驚蟄)

시선이 자주 멈춘다

한 박자 건너

작은 반응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춘분(春分)

한쪽으로 치우치던 생각들이

같은 높이에 놓인다

너와 나 사이

낮과 밤이 번갈아 자리를 바꾼다


청명(淸明)

불필요한 것들이 씻겨 나가고

같은 풍경이

조금 더 또렷해진다


곡우(穀雨)

서로의 하루에

서서히 자리를 내준다

머무름이

관계를 만든다


입하(立夏)

계절보다 빠른 변화는 없다

다만

기다림이 불편하지 않게 바뀐다


소만(小滿)

작은 반복이 생긴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마무리


망종(芒種)

마음이 급해져

불필요한 말들이 튀어나오고

그래도 손을 놓지 않는 선택이

관계를 남긴다


하지(夏至)

가장 긴 하루

가장 많은 모습을 보아도

곁에 남는 사람이

늘 같은 쪽이다


소서(小暑)

지치는 날들

서로가 잠시 물러나

그늘이 되어 준다

사랑은 밝음보다

지속에 가깝다


대서(大暑)

서로의 하루를

뒤쪽으로 밀어두던 시간

이 계절을

지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긴다


입추(立秋)

기온이 낮아지고

표현이 줄어든다

줄어든 자리만큼

관계는 정돈된다


처서(處暑)

사소한 마찰이 지나가도

되돌아오는 방향은

늘 동일하다


백로(白露)

이별이 아닌 조정

흔들림이 아닌 재배치

사랑이 깊어진다는 건

서두르지 않는 태도


추분(秋分)

너와 나의 무게가 다시 맞춰진다

어느 한쪽도

더 많이 기울지 않는다


한로(寒露)

차가운 공기 속에서

손을 찾는 동작이

이제는 설명이 필요 없다


상강(霜降)

상처 위에 서리가 내려도

우리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입동(立冬)

함께 버틸 계절이 열린다

화려함 대신

같은 방향의 침착함


소설(小雪)

작은 다툼조차

이제는 지나간 장면이 된다

서로를 통과시키는 법을 익힌다


대설(大雪)

세상이 멈춘 듯한 날

둘이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녁은 완성된다


동지(冬至)

빛이 가장 짧아진 날

신뢰는 가장 길게 남는다

이 지점에서

다음 순환이 준비된다


소한(小寒)

말이 줄어도

관계는 헐거워지지 않는다

익숙함이

불안을 부르지 않는 단계


대한(大寒)

모든 절기를 지나

우리는 끝을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다시 입춘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경로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저는 절기를 계절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가 통과하는 태도의 변화로 적어 보았습니다.

사랑을 설명하지 않고

지나온 자리만 남겨

되풀이되는 구조를 조용히 배치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