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나왔더니, 내가 없었다.
1. 퇴직통보는 늘 갑자기 온다
오전 10시, 평소보다 조용했던 회의실.
본부장 자리 옆에는 인사팀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짧은 문장 하나.
"이번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되셨습니다."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숙였다.
계속 고개를 숙였다.
마치 그게 예의인 줄 알았으니까.
나는 늘 남들보다 더 오래 일할 줄 알았다.
경력도, 실적도 부족하지 않았고,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
그건 내가 만든 착각이었다.
회사는 사람을 남기지 않는다.
남은 건 사람의 감정뿐이다.
퇴직이라는 건,
어느 날 달력에 박힌 기념일처럼 오는 게 아니다.
그날은 갑자기 온다.
그리고 생각보다 조용히, 삶을 바꿔 놓는다.
2. 왜 나는 준비되지 않았을까
아내는 말했다.
"이제 좀 쉬어, 그동안 너무 달렸잖아."
하지만 그 말에 안도하기보단,
깊은 무력감이 찾아왔다.
"나는 이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내가 왜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걸까.
왜 이렇게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걸까.
이 나이가 되면,
자연스레 퇴직에 대비되어 있을 줄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정년이라는 단어는 남의 일이 됐고,
나는 계속 달리면 된다고만 믿었다.
하지만 아무도 은퇴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출은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알려주지만,
내가 누구로 살아가야 할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3. 인생 2막은 계획표가 없다
처음 3일은 좋았다.
늦잠도 자고,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그런데, 넷째 날부터는 커피도 이유가 없어졌다.
일정이 없는 하루는 편안한 듯 공허했다.
일을 하지 않는 내 모습이 낯설었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낯설었다.
직장이라는 큰 틀 안에서의 내 일상은,
생각보다 단단한 울타리였다.
'이제 뭘 하지?'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인생 2막이 막연히 열릴 줄 알았는데,
아무도 커튼을 열어주지 않았다.
난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4. '은퇴'라는 말이 질릴 때까지
은퇴라는 단어는 어쩌면 사람을 작게 만든다.
현역에서 물러난 사람, 한발 물러선 인생.
어떤 말이든 거기엔 '덜 중요해졌다'는 뉘앙스가 묻어난다.
그래서 나는 이 단어에 질렸다.
모음에서 내 소개를 할 때, 입을 다물게 되고
"요즘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웃음으로 넘기게 된다.
하지만 곱씹다 보니, 그 말이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은퇴자가 아니라, 그냥 나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그 사실이 때론 두렵지만, 동시에 자유롭기도 하다.
남들이 주는 역할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내가 직접 내 역할을 정해야 할 시간이다.
5. 돈이 아니라, '상실감'이 먼저였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 후 돈 걱정을 한다.
물론 그것도 크다. 퇴직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국민연금은 언제부터 나오는지.
나 역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하지만 정작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한 건,
은행 잔고보다 정체성의 공백이었다.
매일 회의하고, 후배를 이끌고, 전략을 세우던 사람.
그런 내가 사라지고, 그냥 '퇴직한 누구'가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누구의 무엇도 아니게 됐다.
그래서 이제부터 다시 설계하려 한다.
누군가의 직원이 아닌, 나로서의 삶을 설계하는 일.
이제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삶의 방향과 리듬, 그리고 나라는 사람 자체.
지금은 잠시 멈췄을 뿐이다.
하지만 멈춘 자리에 서서,
다시 내 길을 그릴 수 있다면,
그게 진짜 '인생 2막'의 시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