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은퇴 후 첫 3개월, 가장 외로운 시간

어느 날 갑자기, 하루가 너무 길어졌다

by 제드 Jed
1. 출근하지 않는 아침, 이상하게 더 피곤하다


자명종이 울리지 않는 아침.

눈을 떴는데, 몸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예전엔 6시 30분이면 자동으로 눈이 떠졌고,

씻고 나면 그 바쁜 하루가 내 자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아침밥은 내가 차렸다.

밥솥을 열고, 계란프라이를 하고, 된장국을 끓였다.

'이렇게 쉬워 보이는 일들이 왜 이렇게 낯설지.'

30년을 바깥일에 쏟은 나는,

집안의 리듬이 잘 모른다.


일이 없는 하루는 오히려 더 불안했다.

멍하니 리모컨을 들고,

TV를 보다 보니 어느새 11시가 되었다.

무기력한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시간이 많아졌는데, 왜 나는 더 지쳐가는 걸까.


2. 하루 세끼가 부담이 될 줄은 몰랐다


“오늘 점심은 뭐예요?"

아내의 말투엔 아무 악의가 없었지만,

나는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이 집의 점심은 왜 내 몫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대화도 많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대화는 줄고, 질문만 남았다.

"뭐 먹지?", "오늘 뭐 해?",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하루 세끼를 챙기는 일은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를 찾는 일이 되어 버렸다.

무의미한 선택들이 쌓여

점점 나를 소모시키는 걸 느낀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건가, 견디고 있는 건가


3. 친구와의 대화에서 자꾸 작아지는 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회사 다닐 땐 자주 못 보던 사이였다.

소주 한 잔에 웃음꽃이 피는 줄 알았는데,

대화의 절반쯤은 일 이야기였다.

"이번에 드디어 임원 됐다."

"요즘 사람들 예전하고 너무 달라."


나는 웃었다. 맞장구도 쳤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한마디도 '현재'를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형만 반복했다.

"그때는 그랬지."

"예전에 말이야.."


집에 오는 길, 유난히 거리가 길었다.

친구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지금'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4. 집에서 눈치라는 걸 배우다


거실 불을 켜는 것도, TV 채널을 돌리는 것도,

이제는 조심스러워졌다.

'나만 너무 한가한 건 아닐까?'

'저 소파 자리를 내가 오래 차지한 건 아닐까?'


아내는 말없이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한다.

나는 그 옆에서 휴대폰을 본다.

아무 말이 없는데, 마음이 불편하다.

말은 안 해도, 말이 들린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

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다가온다.


집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어쩐지 더 복잡해졌다.

아내의 공간에 내가 들어온 건지,

나의 공간에 아내가 계속 있는 건지,

애초에 우리는 둘만의 공간을 함께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5. "시간 많으시죠?"라는 말의 함정


은퇴 상담을 받으러 갔다.

상담 직원이 밝은 얼굴로 물었다.

"시간 많으시죠? 커피 한 잔 드릴게요."


그 말에 이상하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아직도 일할 수 있고, 할 일이 많고,

생각도 많고, 계획도 세우는 사람인데.


'시간이 많다'는 건 좋지 않은 뜻으로 들렸다.

시간을 들일 일이 없다는 것.

세상의 루틴에서 살짝 벗어난 사람이라는 뜻.


그날 이후로 나는 스스로를 다시 정의하기로 했다.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다르게 쓰기로 한 사람이라고.


그 말 하나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제는 나의 시간을 나 스스로 채우기로 했다.


6. 점점 작아지던 나, 다시 숨을 쉰다.


은퇴는 마치 커다란 방에 혼자 떨어진 기분이다.

문은 닫혔고, 불은 꺼졌고, 처음엔 무서웠다.

하지만 어둠 속에 오래 있다 보니,

조금씩 눈이 익는다. 공간도 보이고, 나도 보인다.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이제는 조금씩 내 루틴을 만들고 있다.

아침 산책을 하고, 작은 일거리를 찾아본다.

글을 써보기도 하고, 동네 도서관에도 간다.


은퇴 후 첫 3개월,

세상은 조용했지만,

나는 가장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내가 나를 다시 붙잡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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