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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k split Dec 19. 2020

비행기 타는 남자

수염

나이가 들면서 귀찮아지는 게 많아지는 거 같습니다.

침대에서 눈을 뜨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데까지도 여지없이 시간이 걸리니 말입니다.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하고 나면 비로소 움직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납니다.


비행을 멈추고 휴직을 하던 초창기에는 TV 부터 켜고 아침 뉴스를 보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는데, 정치하는 인간들의 다툼 소식을 매일 접하니 어느 순간부터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캠핑의자를 거실 창 가까이에 펼쳐놓고 아침 풍경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턱과 볼 언저리에 매일같이 새록새록 자라나는 수염을 만지작 거리다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휴직의 시간이 길어짐과 함께 게으름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까칠하게 자란 수염을 만지작거리면 하루의 시작이 게으름으로 시작했다고 깨달으면서, 日日新 又日新(일일신 우일신)의 생활 자세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게으름은 승무원 생활에서 가장 접하기 쉽고 물들여지기 쉬운 나쁜 습관 중의 하나인데, 요즘처럼 집에서 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일상생활에서도 나타나는 나쁜 습관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행경력이 두터워지면서 호텔 생활 중에서 배우는 게으름은 피할 수 없는 극기의 시간입니다.

비행 후 지쳐 잠든 후에 일어나면 만사가 귀찮아 집니다.

게다가 혼자 있는 호텔방에서는 무슨 짓을 하던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장점 때문에 더욱 게을러집니다.

세수는 물론이고 양치까지 거르고 잠드는 경우와 음주 후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냥 잠드는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요즘처럼 투어(tour) 나가기에도 빡센 스케줄 패턴에서는 그냥 호텔에서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게을러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픽업 전 자라난 수염을 깎으면서 호텔에서의 게으름을 털어버리고 비행 준비를 할 때 휘파람이 절로 나오고 노래가 불려지는 걸 생각하면,혼자있는 시간 동안의 게으름이란 인간의 피로를 풀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더욱더 우울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수염 난 남자에게서도 멋짐과 매력을 발견할 순 있겠지만 그 멋진 수염을 관리하기 위해 그가 기울인 부지런함과 세심함은 짐작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몸단장의 마지막에 수염을 정리하던 조선의 사대부는 아니지만,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세안을 끝내면 하루를 부지런하게 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아이들이 학교로 가고 아내가 출근한 아침 현관을 정리합니다.

거실 탁자와 아이들 책상 정리가 끝나고 청소를 하면서 가볍게 노래도 불러봅니다.

그리고 다시 햇살이 스며드는 창 옆 캠핑 의자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인스턴트 달달이 커피지만 내 마음을 가만히 데워줍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다시 비행할 날이 올 것이란 확신이 듭니다.


산책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 역시 나갈 준비를 합니다.

추운 날씨에도 바깥 풍경은 여전히 매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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