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 조각 모음

한단설 이야기

by 노민

개인적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내 머리속에 여러 이야기들을 조금씩 쌓아두는 취미가 있다. 주변을 스쳐가는 흔한 학생들의 학창 시절이라든지, 늘 일에 찌들어 사는 아버지의 피곤한 이야기라든지. 또는 황혼의 시기에 발견한 순수한 사랑이라든지 등등. 흥미는 없지만 살짝 우스운 그런 사소한 이야기부터 가슴 한 구석이 찡하게 울리는 감동을 쥐어짜는 그런 이야기까지 가리지 않고 말이다.
뭐 이 취미가 다른 사람에 비해 특이하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고 딱히 그만두려 하지 않고 머리속에 조금씩 쌓아두곤 했다. 뭐 사람은 평생동안 뇌의 1퍼센트도 쓰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누구나 다 이야깃거리는 하나씩 가지고 사는 편이고, 난 단지 그 이야깃거리를 조금 더 많이 모아두는, 사소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사소한 일로 인해 문제가 생겨버렸다. 이놈의 뇌가 글쎄,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지 못하고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 오작동이란 바로, 주변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보이는 것. 예를 들면 A란 녀석은 흔한 학창시절 첫사랑의 주인공의 친구의 친구로 보인다던지, B란 녀석은 일에 찌들어 돌아오는 아버지가 들르는 포장마차집 단골이 키우는 강아지를 키웠던 옛 주인으로 보인다든지, C란 녀석은 순수한 사랑을 깨달은 할아버지의 아들로 할머니의 딸과 사각관계를 이루는 걸로 보인다든지.. 등등등.
언뜻 보기에 그리 심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그 사람과 말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의 이미지와 그 사람이 계속 겹쳐보이게 된다. 그 뭐냐, 드라마를 보면 나도 모르게 드라마의 스토리에 빠져서 혼자 답답해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주인공에게 알려주고 싶고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게 딱 지금 내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친구들에게 내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자니, 그것 참 자칫하면 딱 미친 X으로 취급받기 딱이다. 내가 그 이미지로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니니 말이다. 결국, 나 혼자만 답답해 미칠 노릇인 거다. 그럼 다른 해결책은? 쌓은 이야기들을 그냥 잊어버리기? 그 또한 쉽지는 않다. 그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조금씩 모아둔 내 보물들이다. 또한 취미를 한 순간에 바꾸는 것도 영 꺼림칙한 일이다. 결국 이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이 일로 인해 며칠을 끙끙대었다. 눈 딱 감고 미X 놈이 되느냐, 아니면 지금까지의 취미를 말끔히 포기하느냐. 참 힘든 선택이었다. 물론 주변 사람의 눈에는 뭔 병X 짓을 하고 있냐고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던 어느 날, 머리속에서 바로 이거다 하는 묘수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도 안되겠다, 버리는 것도 못하겠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뇌의 부담도 줄일 수 있겠다, '이야기'를 모은다는 취미도 계속할 수 있겠다. 참으로 신의 한수라 칭할 정도의 묘수였던 것이다.
방향을 정하자 마자, 바로 책상 앞에 앉아 종이와 펜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모아두었던 이야기를, 내가 보고 느꼈던 이야기를. 내가 생각했었던 모든 이야기를.그 외 등등등등.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난 후부터, 뇌의 오작동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이제 더이상 사람들이 이야기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놈의 뇌가 데이터가 초과될 때가 있어 가끔씩은 주변이 이야기로 될 때가 생긴다. 그럴때면, 그때마다 종이와 펜으로 정리를 해주곤 한다. 번거롭긴 하지만, 그래도 더이상 X친 놈 소리도 듣지 않고 취미도 지속할 수 있어서 만족한다.
아마도, 이 취미는 내가 질리지 않는 한 평생 계속되겠지. 그때까지, 조금 번거롭더라도 잊지 말아야지, 조각모음.




한단설, 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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