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단설 이야기
그를 만난 건 술집에서다.
우연히 합석하게 된 그. 그는 척 보기에도 서른은 족히 넘겨 보였다. 유행이 지나간 낡은 점퍼, 여기저기 땜질이 되어 있는 츄리닝 바지. 목에는 그 흔한 목도리 하나 없었으며, 얼굴에는 이미 깊게 패인 주름살과 함께 깎지 않은은지 몇달은 되었음직한 수염이 나 있었다.
"죄송하지만,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여기 앉아도 되겠수?"
"아, 네. 그러십시오."
그렇게 우리들은 사이좋게 술을 마셨다. 어느덧, 그가 말을 걸어왔다.
"댁도 뭔가 일이 있으신가? 혼자 술을 마시는 걸 보니.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참 세상이란 건 고약하지?"
나를 위로하려고 한 건지, 아니면 자기 신세를 한탄하려고 한 건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울 아버진 돈을 번 적이 없었어. 무능력했지. 덕분에 학비란 걸 한번 제대로 내본 적이 없었지. 학원? 수학여행? 그런 거 꿈도 못 꿔 봤지. 다른 친구들 그런거 가려고 운동장에 모여서 버스에 타는 모습을 보고 교실에서 혼자 펑펑 울었지. 너무 너무 가고 싶었었는데.
내 앨범에 보면 유일하게 우리집 전화번호만 없다네. 또 유일하게 수학여행,소풍의 단체사진에서도 내 모습만 없구. 사진과 이름만이 내가 그 학교를 다녔던 학생란 걸 말해줘.
중학교 졸업후, 고등학교 진학은 상상도 못했지. 나 외에는 집 수입이 없었거든. 16살 나이에 돈을 벌어야 했으니. 하지만 돈 모을 생각은 전혀 못하고 하루 하루 먹고 살기 바빴어. 입들이 많아서 하루 번돈으로 하루를 살기에도 빠듯했지.
그렇게 살다가 군대 갔다 오고 나니 눈물이 나더라구. 다른 놈들은 대학졸업후 취직자리 알아보려고 여기 저기 뛰어 다니는데 나는 뭐하나 해놓은것이 없으니.
공부? 할 수가 없지. 내가 있어야 돈을 벌지, 내가 공부하면 누가 돈을 버나? 집에 돈이 없으니까 공부할수도 없고, 나만 바라보는 가족들은 누가 먹여살려? 꿈이고 뭐고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게 내 운명이야.
요즘은 김치니 뭐니 시끄럽지만, 난 그런거 전혀 신경이 안 쓰여. 세금에 목죄어 살수가 없다. 유가가 장난이 아니라지?? 이런거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도 그게 안돼.
가난은 이런거야.
정말 가난한 사람은 그런거에 신경 조차 안 써.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너만 잘해라. 부모가 가난이 네 가난은 아냐. 사람은 공평하게 태어나. 개천에서 용난다. 열심히 살면 좋은날이 올거야.
웃기고 자빠졌네. 개천이 아무리 지랄염병을 해도 개천일 뿐이야.
난 잘 때가 하루중 제일 좋아.
자기전에 1시간 정도 내 꿈을 생각하는게 유일한 낙이거든.
상사의 꾸지람을 듣고, 늦게까지 술먹고 밤늦게 소리 지르고, 애기가 울고, 아내와 부부싸움도 해보고, 주말에는 애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내와 나들이를 가고, 애기가 다 커서 결혼을 하면 아내와 오붓하게 노후를 보내는 생각... 이제는 다 꿈으로 간직할 수밖에..."
"여러분, X는 '곱하기' 라고 하는 거에요. 자, 따라서 해보세요."
"곱하기!"
"참 잘했어요. X는 어떤 숫자가 있으면 다른 숫자만큼 배를 해서 그만큼 더해주는 거랍니다. 예를 들어 보면, 1에 3을 곱하면 얼마가 될까요?"
"3이요!"
"그래요. 1을 3번 더하는 거니까 3이 되겠죠? 그럼, 0에 4를 곱하면?"
"0이요!"
"그래요. 0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수를 곱해주어도 0이랍니다. 아무리 어떤 큰 수를 더해주어도 말이지요."
"선생님! 그럼 0이 아니면 백을 곱하면 엄청 커져요?"
"그렇지요. 자신이 0이 아니라면, 커진답니다. 그리고 숫자가 백이나 천이라면, 2나 3같은 작은 수를 곱해주어도 그 배로 커진답니다. 놀랍지요?"
문득 오래전 산수시간이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야기를 들어 주면서 같이 아픔을 마셔주는 것뿐이었다.
초저녁에 시작했던 이야기는 어느 새 시계가 다섯 바퀴는 더 돈 후에야 그쳤다.
술값을 내가 대신 내겠다고 했지만, 그는 한사코 자기 값을 내고야 말았다.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중천에 뜬 달이 먹구름을 밀어내고 있었다.
한단설, 2005/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