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꾼의 흩어진 이야기를 풀어내다.
‘산조춤’의 명칭은, ‘살풀이춤’이 ‘살풀이’ 음악에 맞춰 춘 춤을 일컫는 것처럼, 음악의 명칭이 그대로 춤의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 중 하나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춤을 명시할 때에 ‘산조’와 ‘산조춤’의 명칭이 더러 혼용되었고, 곡명과 춤 명의 구분이 모호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산조춤 작품을 일컬어 말할 때는 ‘산조춤’이라고 명시하는 것이 옳다. 이처럼 ‘산조춤’은 ‘산조’ 음악과 밀접하기 때문에 ‘산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정확하게 음악을 파악해야만 늘리고 쪼이는 가락 위에서 맺고 푸는 춤사위가 나올 수 있다.
‘산조’ 음악은 19세기 말(1890년대 경)에 김창조라는 음악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야금산조를 효시로 보고 있으며, 거문고, 대금, 해금, 아쟁 등의 다양한 기악 연주곡이 생겼다. 김창조가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할 당시, 충청도 지역에는 이차수와 심창래의 ‘산조’가 있었다.
‘산조(散調)’는 한자어 그대로 다양하게 흩어진 음조를 의미한다. ‘산조’의 선율은 연주자가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즉흥성을 가진 변주형식이며, 감정의 흐름을 음악에 담아낸 것이다. 이러한 산조는 과거 ‘산조(酸調)’와 병행되어 사용된 바 있는데, 1918년에 발간된 조선예인화보집인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을 보면, 기생 조합(후에 일본식 명칭인 권번으로 바뀜)에 소속된 약 30여 명에 이르는 예기(藝妓)의 기예 종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애절한 마음을 녹여낸 듯한 ‘산조’의 선율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일반적인 한자어 표기는 ‘산조(散調)’로 통용되고 있다.
‘산조춤’은 ‘산조’ 음악에 맞춰 추는 춤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보편적이나, 춤 구성면에 있어서는 그 범주가 넓다. 즉흥성을 가지고 있는 ‘허튼춤’을 기반으로 보기도 하고, ‘살풀이춤’ 또는 ‘입춤’, ‘승무’의 요소가 ‘산조춤’에 스며있다고도 한다. 혹자는 이를 같은 선상에 두는 경우도 있다. 이는 전통춤을 학문적으로 구분 지으면서 생긴 양상으로, 본래 ‘산조춤’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된, 같은 뿌리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산조춤’은 춤꾼이 ‘산조’ 음악에서 느껴지는 감흥을 춤사위로 짜임새 있게 표현한 즉흥적 요소의 춤이라 하겠다. 이는 마치 한 구절씩 모여서 이루어진 시와 같이, 한 가락씩 모여 ‘산조’가 되고, 춤사위의 한 자락이 모여 ‘산조춤’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풍미를 담은 ‘산조’ 음악에 ‘춤’이 더해져서 ‘산조춤’의 미적 품격은 배가 된다.
‘산조’는 독주곡이다. ‘산조춤’도 독무로 선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무대화의 새로운 시도로 인해 군무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그러나 본래 ‘산조춤’은 춤꾼이 주체가 되어 춤꾼 다움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무대라는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며 움직이는 붓을 춤꾼에 비유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산조춤’이 극장 무대에서 추었던 것은 아니다. 유래에 대한 여러 이견(異見)이 있지만, 확실한 사실은 민간에서 행해지던 전통적인 춤이 무대화되어 신무용의 영향과 함께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산조춤’의 시초를 신무용인 한성준의 <학무>, <신선무>나 조택원, 최승희의 <신로심불로>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수면 위로 떠올라 공연된 ‘산조춤’은 다음 세대 춤꾼들이 그 맥을 이어가게 된다.
한성준에게 영향을 받은 한영숙의 ‘산조춤’과 조택원의 영향을 받은 정인방의 ‘산조춤’이 공연되었다고 전하고, 이후부터 반주음악이 다양한 유파와 악기의 ‘산조’로 구성되기 시작한다. 이때,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산조춤’의 형태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강태홍의 산조에 맞춰 추는 <산조춤>과 이추월이 시작한 <호남 산조춤>, 정인방의 <신선도>와 <신로심불로> 등이 속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산조춤>의 초기 형태가 첫째, 신선을 소재로 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산조의 음악이 신비스러운 도가(道家)적 이미지와 적합했다고 느꼈던 것 같다. 둘째는 춤의 시작이 앉아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춤의 도입부는 후에 다양하게 바뀌게 된다. 이러한 춤의 특징은 그 시대의 경향이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1940년대에는 많은 춤꾼들이 ‘산조춤’을 안무하면서, 다양한 유파가 생성된다. 위에서 언급한 한영숙의 <산조춤>은 후에 이윤자에게 전승되어 성금련류와 김죽파의 가야금산조에 맞춰 추는 <산조춤>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추월의 <호남 산조춤>은 최선, 이길주로 이어져 2013년에 시도 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었다. 부제인 <내 마음의 흐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김진걸의 <산조춤>과 부민관에서 공연된 조용자의 <산조춤>, 교통사고 후 재도약을 꿈꾸며 선보인 김백봉의 <청명심수>, 송범의 군무 작품인 박성옥류 철가야금산조 음악의 <백의 환상>이 있다. 또한 최현의 <비상>, 이매방과 강선영의 <산조(춤)> 등 수많은 춤꾼들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이와 같이 이름을 내건 유파로써 <산조춤>은 후대에 전해졌다. 황무봉, 김진홍, 송수남, 국수호, 정재만, 김매자, 조흥동, 김명숙, 이필이, 배명균 등 많은 춤꾼들에 의해 <산조춤>이 파생되었다. 이렇게 많은 유파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전통춤 분야가 활성화였던 점도 한몫했지만, 점점 춤꾼들의 가치관을 안무에 녹여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조춤’은 우리나라 민간에서 행해지던 춤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무대화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선대(先代)의 전승과 함께 여러 개성의 유파로 탄생되었다. 그렇게 ‘산조춤’은 어느새 춤꾼의 이야기를 눌러 담은 압축본으로 재탄생되고 있었다. 즉, ‘산조춤’을 통해 춤꾼은 춤 인생 속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자신만의 색깔을 오롯이 담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산조춤’은 오랜 시간 춤으로 한 땀 한 땀 엮어 쓴 춤꾼의 자서전과도 같다.
‘산조춤’은 춤꾼에게 가장 기본이 되면서, 또 자신의 내적 감정과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춤으로 손꼽힌다. 이런 점이 ‘산조춤’이 가지고 있는 묘미라고 하겠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춤꾼 자신의 배움과 습득을 통해 변천과 과정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춤 맵시가 그대로 ‘산조춤’에 나타난다.
오늘날 ‘산조춤’은 무대에 올리기 위해 체계화된 양식으로 공연되고 있으며,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즉흥적인 부분보다 정형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어쩌면 이러한 변화도 현대의 우리가 안고 가야 할 전통춤의 숙제이자 숙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산조춤’을 통해 답을 찾았다. 과거 ‘산조춤’의 발생이 전통춤과 그 시대의 새로운 신무용의 융합으로 발전되어 온 전례(前例)를 통해서 말이다.
‘산조춤’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고매한 정신을 실천한 대표적인 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현시대에도 ‘산조춤’의 전통을 이어가는 유파의 계승은 물론, 이를 넘어서 미래의 새로운 전통 창조를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시도는 당대의 가치를 담는 우리의 고유한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춤꾼들의 흩어진 이야기가 다채로운 유파의 ‘산조춤’으로 향연을 이루길 바란다.
* 이 글은 충남서산문화원 월간지에 기고한 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