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생 김두리 할머니의 구술 생애사
이제 감나무를 보면 쉬 지나치지 못한다.
우리 사무실 건물 뒤편으로 보이는 감나무를 보면서도 그랬다. 재개발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경축 플래카드가 바람 따라 출렁이는 곳. 불도저가 먼지 풀풀 날리며 매일같이 무너뜨린 자리의 땅을 골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가는 회색 아파트의 숲. 그 한가운데는 외로운 섬 같은 집이 한 채 있다. 그 감나무의 집이다. 수십 년도 더 된 듯한 색 바랜 기와를 곱게 얹고 있는 옛 가옥, 거기에 감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서 있다.
이 책을 읽고서는 그 집의 감나무가 그리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혹시 모던한 도심의 액세서리 같은 녹색의 인테리어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질기고 모진 세월을 오롯이 버틴 감나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 책의 화자인 김두리 할머니가 말한다.
"우리는 이사를 자주 댕기니까 감나무가 하나도 없어"(p168)
"그때는 감나무 숨가서 열매 열 만하면 또 살림을 옮겨야 되고, 과일이 잘 없어. 과일이 기리워"(p169)
29년 생 할머니가 손자에게 처음으로 내놓는 인생 역정의 파노라마를 읽다 보면 그저 한 줄의 기록으로만 전해진 역사에도 무수한 민초들의 사연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가난한 탓에 치료받지 못한 이웃의 식구가 죽어나가는 게 어색하지 않던 시절, 아무리 못 배워도 재봉틀 하나만 있으면 가족의 입에 풀칠이라도 하던 때의 이야기는, 돌아가시기 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 같다.
전쟁의 그늘에서 대낮같이 벌어진 학살의 비극 앞에서는 한없이 숨죽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비극이라고.
"그래놔놓이 손도 곱고 말굼하잖아... 이 새끼 뺄개이구나 하면서 두드리 패는 거야"(p76)
"군대 가 죽었다 하면 식구들은 기 피고 사잖아. 근데 뺄개이인데 끄직개갔다 하면 어디 가 말또 몬하잖아"(p86)
"아군인데 잡해도 밤에 그리 댕기니까 뺄개이라꼬 죽고, 이쪼 잡해도 죽고, 저쪼 잡해도 죽꼬"(p104)
그리하여 그 어렵던 시절에 겨우 키워가던 감나무는, 어쩌면 할머니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도 사는 기 너무 힘들고 사는 이유가 없어가지고 내가 죽을라 했다"(p135)지만 옮기는 살림집마다 감나무를 심은 것은 그래도 자식들과 함께 살기 위한 안간힘이었고 마지막까지 포기 못한 희망이지 않았을까.
오래전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막걸리를 유난히 좋아하시던 외할머니의 시골집에도 그러고 보니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떠다 마실 물길을 내기 위해 시멘트 공사를 한 바닥을 뚫고 일어선 나무. 배수구를 내는 공사를 하면서도 차마 그 감나무만은 베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길을 가다가 우연찮게 감나무를 발견하면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김두리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들이 키웠을 이 땅의 외롭고 쓸쓸한 감나무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서 함께 컸을, 이제는 칠순이 넘은 우리 엄마의 삶도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