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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Aug 18. 2021

흔히, 아는 이야기

생각편의점

흔히, 아는 이야기




옳거나 좋은 일,

그르거나 나쁜 일로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다면, 우리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겁니다


옳거나 그른 것으로

뭔가를 나누는

어린아이와 달리

어른은,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것으로

아이와 구별이 될 겁니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선택이나 결정일 때

법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법은 어떤 일을 하라고 하며,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른의 세계에서 쓸데없이

옳다, 그르다고 가끔

상대를 맞대 놓고 말하는 건

무심한 아이와 같은 법을 등에 업은

과시욕을 버리지 못한 판사들인데,

딱히 그가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저항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지배 의식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네가 뭔데?"

대개는 이런 핀잔을 듣지 못할 테니까요)


사람 사이에 일이

어제오늘을 가리지 않지만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못할 짓을 해서,

정말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건가 싶은 시사가

요즘 자주 보입니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하지만, 우리는 그의 삶이

얼마나 버거운지 모르고,

그에게 빵 한쪽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릅니다

적어도 그가 굳이 '왜 그렇게 사냐'라는

말을 들으려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

우리는 똑 부러지지 못하고, 미심쩍은 것에 딴지를 걸지도 않는다.

우리는 사실, 흐리멍덩해서, 다른 것들에 비해 덤벙대고 멋대로다.

런 처지에서는, (우리의)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


인간의 자유분방함에 대한 일갈인 것 같지만,

프랭크퍼트라는 철학자가 그의 논문

<개소리에 대하여_On Bullshit>에 쓴 맺음말입니다


그대가 '사람이냐'는 말을 들었다면

그대 자신에게 겸손하기 전에

그의 그릇의 크기와 깊이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타인을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며 

자신의 소용 때문일 겁니다

 이기적이며,

무책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그릇에 담아낸

제 입맛에 따른 선언과 같아

입 밖에 내뱉을 경우

한 마디로 개소리이기 쉽습니


"너도 사람이구나"

따뜻한 시선 한 줌도 필요 없습니다

잠깐 들여다 보고

그래도 비난해야 한다면

그때 비난해도

비난하는 즐거움이

줄어들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무시한 채 갖고 있는

너무 키가 큰 자존감 때문에

오히려 열등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자존감은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니어도

다는 여유에서 옵니다


나는 내게 소중하지만, 군중 속의 나는

'군중'으로부터 대우를 받아야 할

특별한 자격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감 같기도 합니다만,

현명한 우리는 '내'가 사는 현실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런 내가

'나'라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진솔하면서도 탄탄한 자존감을 갖게 될 겁니다


그 자존감을 삶 앞에 던져놓고

보통, '나' 자신을 응원하는

자신의 소리 하나쯤 가진 어른으로

우리는 삽니다


물론, 삶에 부대끼다 보면 나를

항상 견지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나 아닌 나를 강요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나'를 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우리가 '삶을 고해'라고

읽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그런 고해를 살아내는 그대여서

그대가 어른으로 불리는 것일 겁니다




몸이 늙으면 늙은이가 되지만,

삶은 시간과의 싸움이므로

늙음은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늙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꼰대가 됩니다

시간과의 싸움이 아니라

익숙함과의 싸움인 겁니다

그대가 꼰대가 된 것은

세상살이에 굴복함으로써

스스로 족쇄를 찬 것과 같습니다


(꼰대를 성적으로

구별하는 이는 없겠지만,

그리 구별하는 그대는

영락없는 꼰대가 맞습니다)


늙음에게 삶이 졸졸

따라다닌다고 할 수 있다면

꼰대에게는 덜 익은 삶이

매달려 있는 꼴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가

가변적일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시간과 세월 덕분입니다

젊음이 흔히 가진 것들이지요

그리고 젊음이 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월의 힘이 제법 큰 겁니다


엄연한 사회의 틀에 끼어

그 틀에 익숙해진 때문인지

젊은 꼰대가 많아지는 모양입니다만,

"깨달음을 위한 진정한 여정은

새로운 조망의 탐색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에 있다"는

프루스트의 말을 새기면

삶의 질을 가름하는 것뿐 아니라,

꼰대가 아닌 어른으로 사는 데도

모두들 이야기하듯이,

삶을 보는 태도에 달려 있다 여겨집니다


그러나 젊은 꼰대든 늙은 꼰대이든

거기에 따뜻한 시선 한 줌 더하면,

꼰대에게서도 우리를 위한

보시(布施)를 볼 수 있습니다


실존하는 모든 것이

서로에게 보시가 됩니다

그가 꼰대라면 그는 우리에게

그런 꼰대로 살지 말라는

보시일 수 있을 겁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그보다는 좀 더 사랑스러운

꼰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한편, 우리 나름의 삶을 '내'가

긍정해야 가능하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꼰대 같다고 해도

크게 자책할 것까진 없다고 봅니다


좀 더 친절하게 말하면, 우리는

법과 사회가 나를

어른으로 대우해주지만,

타인들 앞에 선 자기 자신을

진정한 어른이랄 수 없어서

어른인 척하는 요령을

먼저 배운다고 하는 게

좀 더 솔직한 이야기일 겁니다


살펴보면, 우리는 늘

어른을 배우는 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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