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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May 25. 2022

별 게 다 안심입니다

생각편의점

별 게 다 안심입니다



누군가를 알게 되고

그를 좋아하지 않아도 되어서

즐겁다거나 다행이라는
느낌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처음 보는데, 문득
다시 볼 이유가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누군가는 좋아할 인간이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은 겁니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를 보고,
그가 출연한 다른 영화를
일부러 찾아보지 않아도 되어서
안심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괜히, 하염없이
그리고,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인간상_像을 갖고 있을까요?
마치, 맥없이 사랑하게 만드는
인간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관능 덕분이겠지만,
인간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주 이상한 건 아니어서 안심입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목판 인쇄에서
금속 활판 인쇄술을 채택하여
책을 찍기 시작한 15세기 중엽 이후,
세계를 통틀어
현재까지 출판된 책은
1억 5000천만여 권 가량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다른 언어로 중복 출판된 것과

오디오 북 등을 제외한 숫자인데,

그 가운데 우리가 평생 읽는 책은

움베르토 에코의 계산처럼
책에 미쳐, 죽자 사자 한다 해도
2만 5000여 권 정도입니다

하루 한 권씩, 나이 여든에도 
읽을 수 있을 때 그렇습니다
일상에 필요한 시간을 빼면
읽을 수 있는 책의 숫자는,
채, 1만 권이 되지 않을 겁니다
1억 5천여만 권 가운데
고작 그건가 싶어도,

그 정도 읽으면

평생 책만 읽었다고 할

독서광이 맞습니다

그 덕분일 테지요, 우리에게는 
누군가가 골라놓은, 
권장도서, 추천도서 그리고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순수한 관점에서 선정했든

판매부수를 올리려는 작가와 
출판사의 협잡에 의한 것이든
읽을 책의 선택을 거기 의지하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 책을 읽지 않으면 
인생이 충족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럴듯한 공갈과 함께 
세상에 던져놓은 책들이, 하필
내게 좋은 책이란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감정의 소모 없이, 

수많은 타인의 생각을 알고 

내 정체성을 찾는 자료로서, 또는

지리적으로 한정된 삶을 살며

이 세상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것도

책의 도움 없이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정보의 과잉 시대에는

되도록이면 읽지 않는 게

현명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다면,

때로 불편할 때도 있겠지만
잠깐 참으면 지나가는 게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모든 책을 다 읽을
물리적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있어서 안심이고,
아직 좋은 책을 찾고 있다는
변명이 통할 수 있어서, 얼마든지
지식인인 척할 수 있어 안심입니다




낮 기온이 점점 높아지는
22년 5월의 세계 인구는

대략 79억여 명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연락처엔
수 천명의 이름이 있어도

몇 년 만에 봐도 얼굴빛 꾸미지 않고
'쓸데없는' 대화를 함부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몇일까요?
속을 나누는 친구가
네댓 명이면 많다 싶은데,
박해영 극본의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주인공 박동훈에게는 형제와
많은 동문들이 주변에 있지만
그나마 친구라고 할 만한 이는
단 하나, 출가한 겸덕뿐입니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듯한
이지안인데, 그에게도

송기범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처지를 이해하지만
함부로 속을 내주는 친구는 아닙니다
세월과 함께 얼굴이 바뀌면서
삶의 갑옷이 두꺼워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서,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흔해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대개
친구라고 하기엔 뭔가 마뜩잖습니다
그렇다고, 2016년 개봉된,
퍼펙트 스트레인저(Perfetti sconosciuti),
우리나라에서는, <완벽한 타인>으로
2018년 리메이크된 영화가 짚어낸
인간관계의 맹랑함을 보고,
누군가의 타인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내가 있다면,
누군가는 내게 필히
타인이어야 하니까요
로빈슨 크루소의 생존은
그를 있게 한 타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않나 싶거든요
지난번에 말했던 친구는,
책 몇 만 권의 가치를 가진,
사람 79억 명을 잊게
할 수 있는 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들어가 앉으면
책으로 가득 찬 골방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밤을 새워도 전혀
거북하지 않은 타인이었습니다

죽은 그를 그리워하지는 않습니다

그에게 나는 어떤 친구이었을까,
나를 반추할 뿐입니다

끊임없이 그에게서 배웠던 기억 위에,
나는 그에게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한심하게도 생소합니다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더는 그에게
마음의 빚을 지지 않아도 되어서
안심이 된다면, 나중에
그에게 욕을 먹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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