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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May 17. 2024

흔해서 어려운가요

생각편의점

해서 어려운가요




말장난 잠깐 하겠습니다


사는 건 죽어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잘 사는 건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잘 죽었다는 소리는, 아무래도

좀 더 일찍 죽어야 했는데

이제야 죽었다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러니까, 잘 죽지 않으려면

 대로 사는 게 현명할 겁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삶의 즐거운 구석을 보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죽는 건

내가 확인하지 못합니다

'나'의 죽음을 확인한

죽은 이는 없습니다

죽음을 가소롭게 여기는 건

남겨진 자의 권리이니까요




나는 당신을 있게 하는 도구이지만

그 역으로도 그렇습니다

물론 나는  편한 대로 

모든 것을 평가를 하지만

그건 대개 내게 그렇다는 것일 뿐

그것의 가치에는 전혀 영향이

없으므로, 내 평가가 어떻든

나는 비난받지 않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열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 콘은

요즘 천이백 원이면

웬만한 가게에서 사 먹을 수가 있습니다

이걸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 차갑고, 무심한 사회가

내게 해주고 있는 것들이 보입니다

천이백 원으로는 도저히,

그 수천 배의 돈을 들여도 그 콘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콘을

만들어 먹고자 할 때 필요한 돈,

그리고 시간과 사 먹을 때의 돈,

그 사이의 모든 수고의 차이가

내가 이 사회에서 받고 있는

혜택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그 콘에 대한

평을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싸다, 비싸다, 맛있다, 맛없다,

크기가 작다, 크다...

사회가 나에게 해줘야 할

봉사 기준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만을 위해서 파는 건 아니잖냐,

그들 자신의 사업 아니냐?"

반론이 가능합니다만

그전에, 그 콘을 먹고 싶은 내가

만들어 파는 이를 위해

내가  했나를 따져야 할 겁니다

그래도 내가 그 콘을 사주는 게

그들에게 시혜라면,

그 콘을 내게 팔아준 그도

내게 시혜를 베푼 겁니다

게다가 그들이 파산하든 말든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굳이 그가

나만을 위해 만든 것도 아닌데,

내가 그 콘이 먹고 싶을 때

그것을 만든 이와 옮겨준 물류회사,

그 콘을 가게에 입점한 주인이,

단지 천이백 원을 손에 쥔

나를 위해 한 수고일 겁니다




나의 선택-그것이 옳든 그르든,

영리하든 미련하든-의 결과로써

삶이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 콘을 몰랐을 수 있고

즐길 수 없었던 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천이백 원의 행복,

이것이 내가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 보람이며

눈에 뜨지 않는 혜택 가운데

하나인 건 분명할 겁니다


나는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지만

큰 어려움 없이 쌀을 먹고 살아왔고

번도 천을 짠 적이 없지만

남부끄럽지 않도록

나름 겉치장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나를 살게 해서

내가 사는 중이라는 게

아주 틀린 생각도 아닙니다


사랑도 문명의 혜택 가운데 하나이지만,

사랑은 다른 것과 달리,

혜택일 뿐 아니라 시혜일 수도 있지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시혜이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혜택일 겁니다




꾸준히 내비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누군가의 수고로 살고 있습니다

그 수고가 잘 모르는

당신에게서 오는 것이어서

당신에게 감사하는 겁니다

당신과 내가 가진 '나'는

우리 모두, 또는 서로를 위한

보시(布施)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해가 지면 어둠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밤을 데려다주는 것은

해가 아닙니다 전깃불입니다

혹시, 촛불일 수도 있겠네요


삶이 어처구니없이 팍팍해도

혜택을 받으며 사는 바에야

소소히 삶을 즐기는 것이

그럴듯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그 겸손을 어렵게 하는 것도

내게 혜택을 주는 사회이지요


그렇다면, 오래된 의미, 중용이

삶의 무게를 덜어줄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중용이 뭐냐 물으면,

인간이 거만하게 구별해 놓은

동물의 왕국을 생각합니다


굶주렸다고 과식을 하는 경우가 없고,

먹이를 다른 동물에게 빼앗겼다고

땅을 치며 통곡하지 않습니다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먹이사냥을 하다 다치면

자연치유를 기다리거나 죽습니다

때로는 다친 몸을 끌고 다니다

산 채로 뜯어먹히기도 합니다

때로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합니다만

우리가 사회에서 받는 것과 같은 혜택은

대개 기대하지 않는 모습으로 삽니다


그게 중용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중용을

즐기고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주어진 대로의 삶을

수용하모습만 보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비해

삶을 즐길 수 있는 조건 하나를

더 갖고 있습니다


웃음입니다

혹시 그게 너무 흔해서 

삶이 어려운가요


우리가 여타 동물 같지 않게

중용이란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삶을 즐기고자 하는 것은

웃음을 가진 덕분일 겁니다

게다가 동물의 무표정보다

 당신의 웃음이 좋습니다


막말로, 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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