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향연, 삶

이름 불러주기

by 어뉘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은, 요란스러운 단어는 집어치우고, '두 발로 걸으며, 도구를 사용하고, 얍삽한 머리를 자주 굴릴 줄도 아는 속성'을 가진 개체를 '인간'이란 단어가 설명해주지 못하며, ‘행복마을’에서 행복을 찾는 건 인지상정이라 해도, 불행이 거기 끼어있다고 울 일은 아니라는 건가 싶다.


아름답다는 말이 아름다움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이야기이고,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아름다움이나 사랑 자신은 자신을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인간’이니,‘돌’이니 하는 것에는 그 개체를 관통하는 같은 속성이 있다. 어떻게 생겼든, 그들 전체를 아우르는 독특한 성질이 있는 ‘무엇’이다. 이것을 실재론(Realism)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여기에서 ‘~다움’이나‘~답지 않다’는 것이 그려지는 듯하다.


이름이 단순히 이름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실체를 그려내거나, 다가오는 실체인 사람(사물)으로 받아들인다. 이 실재론이 무책임하지 않은가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에서 나온 것인듯싶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영혼앓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가 글을 게시했다. <나는 XXX의 누드사진을 보고 싶다>란 글이었다. 그 글의 내용이 평소 <영혼앓이>가 즐겨 쓰는 소재나 의식과는 달랐나 보다. <영혼앓이>답지 않다고 핀잔하는 댓글이 달렸다. 댓글을 쓴 분이 평소 <영혼앓이>가 쓴 글을 찾아 읽으며 그에게 나름의 애정을 갖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영혼앓이>에게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필명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는 그를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그 단어의 뜻을 생각하며 그를 부르고 있지는 않다. 그를 알 수 있는 단서는 거의 없고, 그가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들려준, 또는 쓴 글로 그를 알 뿐이다. 그다움은 어디에 확인할 수 있는가.


“아하, 그가 지금까지 포스팅한 글에서 그만의 독특한 맛을 느꼈나 보다.”

하고 지나치면 좋겠지만, <영혼앓이>답지 않다는 댓글을 쓴 필벗의 말은 이런 거다.

"내가 그려놓은 네가 있는데, 나름 잘 그린 편이어서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린 것과는 다르게 생겼냐?"


그에게 생떼를 부리는 것이다. 극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그려 놓은 대로 해라’라는 주문에 가깝다. 그러자, 재미있게도 <영혼앓이>도 당당함을 꺾고 갑자기 원래 ‘자신다운 것’이 있었던 듯 수줍어하면서 이름 모를 필벗에게 움찔한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영혼앓이> 자신도 ‘~다움’을 마음속 어딘가에 상정(常定)하고 있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좌우간, 여기에서 ‘<영혼앓이>다운’ 게 뭔가? 그 자신이 그 답지 않다고 말하는 필벗을 위해, 필벗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모습에 자신을 맞추어야 할 까닭은 없다. 필벗의 <영혼앓이>가 될 의무는 없다는 거다. 그 필벗이 <영혼앓이>에게 애정이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애정이라면, <영혼앓이>가 놀고 싶은 대로 놀게 하는 것이 더 깊은 애정 표현이 될 것이다.


이런 우리의 사고를 둘러보면, 우리는 상당히 구상적인 사고를 하면서, 우리 자신을 추상적인 개체로 바라보는 모양이다. 나는 그분이 <영혼앓이>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거울에 비친 자신에 놀라서.


나의 필명은‘어뉘’이다. 어뉘가 나를 말해주는가? 어뉘란 이름이, 열심히 사랑 타령만 늘어놓으며, 그러나 분위기만 잡아주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별 귀여움을 다 떨어대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어뉘라는 필명 위에, 자신의 경험적 틀에 맞추어 어뉘를 상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어뉘가 한 행동이나, 올린 글에 어뉘답지 않다고 말하는 경우가 생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라고 하는 표현도 그 예다. 나이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세월을 형식화한 기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의 저 안쪽에 우리를 분석하기 위한, 나이에 관한 독특한 고려의 틀을 마련해두고 있다.)


<영혼앓이>다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앓이>는 유일(唯一)하다. 누드 사진을 보고 싶은 <영혼앓이>도 <영혼앓이>이며, 영혼을 앓고 있는 이도 <영혼앓이>이다.


모든 것을 사랑에 이입하는 나로서 한 마디 보태면, <영혼앓이>를 사랑하려면 <영혼앓이> 그대로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기에 즐거운 <영혼앓이>가 아닌, <영혼앓이>가 가진 <영혼앓이>를 사랑하는 거다. <영혼앓이>답지 않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은 <영혼앓이>가 아닌 내가 바랄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영혼앓이>답지 않아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영혼앓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뿐이다.


나다운 것은 없다. 나는 나다. 갓 태어나 똥오줌 구별 못 한 것도 '나'이고, 이제 나이 들어 똥오줌 구별하는 것도 ‘나’이다. 마찬가지로 그대다운 것도 없다. ‘그대다우려고’하는 것도 우습다. 그대이다. 그대답기 위해 사는것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향연은 간단하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본다. 임종에서야 깨닫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연습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할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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