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임신했을 때의 소망은 그저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는 거였다.
큰아이와 막내는 임신에서 출산까지 별다른 일이 없었으나 둘째는 기형아 검사과정에서 다운증후군이 의심되니 정밀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정밀검사는 양수를 채취해서 하는 것과 산모의 피로 검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지방의 산부인과 의원에서 양수를 채취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싶어 산모의 피로 검사를 해보고 그때도 이상증상이 있으면 대학병원에 가기로 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직 건강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 했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날 밤 꿈속에서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목사님이 기도 중인 내게 "걱정하지 마라,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3100분의 1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병원에서 나는 펑펑 울었었다. 의사 선생님이 전해준 흰색 종이의 아래쪽엔 3100분의 1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그 숫자는 종이에서 튀어나와 선명하게 내 눈으로 들어왔었다. 건강한 아기는 감사고 행복이다.
작년 봄 큰아들이 말했다. 여자 친구가 오빠라고 불렀는데 그 소리가 너무 설레 잠이 오지 않았단다. 그 말을 듣는 나도 아들처럼 설렜었다.
우리 모자를 설레게 했던 그 아이는 며칠 전 며느리가 되었다. 며느리는 내 핸드폰에 큰 애기라고 저장되어 있다.
지인이 며느리가 생긴 기분을 물었다.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며느리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는지 물었다. 아직 없다고 했다. 그럴 수 있냐고 또 물었다. 이번엔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식을 잉태하면 10달간 무슨 기대가 있냐고 내가 물었다. 기대는 없고 오직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길 바랐었다고 지인이 대답했다. 나는 잉태한 적 없고 배 아픈 적 없는데 건강하고 예쁜 큰 애기를 얻었다, 그래서 10달간 그냥 감사하기만 할 거라고 말했다.
시엄마가 되기 전엔 며느리랑 모녀지간처럼 쇼핑을 가면 좋겠고 영화도 보면 좋겠고 여행도 다니면 좋겠다는 로망이 있기는 했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앞선 생각임을 알았다. 내 아들들과도 여행이나 쇼핑을 맘 편히 하는 데는 10년 이상이 걸렸는데 전혀 다른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어느 날 내 자식이 되었다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을 하니 내 시어머니와의 기억이 났다.
시어머니는 나와 목욕탕을 가고 싶어 하셨으나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미루고 미루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야 겨우 온천을 다녀왔었다. 조금 일찍 함께 가지 못한 것이 늘 죄송했지만 자매들이 아닌 누군가와 목욕탕에 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별 기대가 없기로 했다.
자식들은 집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힘들고 지칠 땐 더 집을 찾았다. 오가는 길이 멀고 힘드니 있는 곳에서 쉬라 말하면 집에서 쉬어야 쉬는 것 같다고, 오지 말라는 말 하지 말라고 했었다.
'집에서 쉬어야, 엄마가 해 주는 밥이 좋아서 집으로 온다.'는 내 새끼들의 말이 나는 좋다.
다 커서 내 새끼가 된 큰 애기도 10달이 지나고 10년이 지난 후 집은 그랬으면 좋겠다. 힘들고 지칠 때 시엄마 곁에서 쉬는 게 쉬는 거 같았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