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와 제품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터널 만들기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터널을 경험한다. 다른 나라에 대한 경험은 없지만 일단 대한민국에서 고속도로를 한 시간 이상 타다 보면 필연적으로 하나 이상의 터널을 지나게 된다. 보통 터널은 산맥을 뚫고 지나간다. 인접한 두 지역의 기상 차이는 산맥 하나를 기점으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터널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중충하거나 비가 왔는데 긴 터널을 나오니 쨍하게 맑은 하늘에 정 반대 날씨를 만나는 경험을 심심치 않게 할 수 있다. 물론 날씨가 맑았는데 터널을 지나니 비가 올 것 같은 반대의 경우도 있다.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환경의 변화는 매우 충격적이지만 터널을 지났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꽤 자연스럽다. 고등학교 때 한국지리를 버려서 이런 변화가 특히 더 신기할지라도 터널이라는 무채색 중간지대가 적응할 여유, 터널의 반대편은 뭔가 날씨가 변해도 괜찮을 것 같은 타당성을 만들어준다. 심지어 어느 정도 터널을 경험한 이후에는 터널을 들어가면서 터널 반대편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생기기도 한다. 터널 끝엔 날씨가 다르지 않을까? 눈이 오지 않을까? 차가 덜 막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도 모르게 온 몸의 근육이 감탄사를 내뿜을 준비로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터널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환경이 똑같으면 괜히 고개 쭉 빼고 뭐라도 다른 게 있나 찾아보려 한다. 결국 똑같으면 굉장히 아쉽고 억지로 두리번거리다 어깨가 결리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접한 터널에서의 경험이 비슷한 맥락으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주 활용된다. 당장 떠오르는 가장 인상적인 터널 장치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있다. 영화는 주인공 가족이 외부와 단절된 길고 긴 숲 속 길을 따라 차를 타고 쭉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굴다리 비슷한 터널을 지나고 그 끝에서 완전히 새로운 환상세계가 펼쳐진다. 영화가 끝날 땐 주인공이 맨 처음 지났던 터널을 다시 통과하며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런 터널 장치를 꽤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이웃집 토토로]에서도 주인공 가족은 도시에서 시골로 차를 타고 이동하다 점점 인적이 드문 숲 속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인공 자매가 처음 토토로를 마주할 때를 보면 수풀을 어느 정도 헤치고 지나가다 그 끝에서 자매가 토토로를 만난다. 숲길과 수풀이 일종의 터널로 작용해 토토로가 자연스레 등장할 공간적 맥락을 만들어준 셈이다. 터널은 이렇게 극적인 경험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다.
UX 디자인 이야기를 한다면서 갑자기 터널 이야기는 왜 하나 싶겠지만 유저와 제품이 만나기 위해서는 바로 이 터널 공사를 어찌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할 때 늘 누군가 설계해 놓은 터널을 지나고 있다. 특히 놀이공원이나 스키장처럼 실제 공간이 중심이 되는 서비스에서는 사용자에게 극적인 경험을 선사하기 위한 터널 장치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놀이공원이나 스키장에 가는 걸 떠올려보면 초입구부터 매표소까지의 거리가 꽤 멀다. 자차나 시설이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전용 도로로 한참을 들어가야 주차장과 매표소가 나온다. 북적이던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표지판을 따라 숲 속 도로로 들어서면 어느새 달라진 가로등 모양과 표지판 디자인이 내가 바깥세상과는 다른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리고 별안간 눈앞에 동화 속 웅장한 성의 모습, 반짝이는 설원을 마주하면 멀고 먼 이곳까지 오면서 쌓였던 피로가 설렘과 흥분으로 뒤바뀐다.
여기서는 기다란 입구 도로가 터널의 역할을 한 셈이다. 만약 우리가 편의점에 가듯이 그냥 곧바로 놀이기구 코앞으로 들어가게 되면 현실 세계에서 꿈과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간 경험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경험적인 예를 들자면 잠실 롯데월드 폐장 시간에 집에 가려고 나올 때 느끼는 허탈함의 정도와 용인 에버랜드에서 집 갈 때 느끼는 허탈함의 정도에 극명한 차이가 있다. 롯데월드에서 신나게 놀다가 집에 가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곧바로 잠실의 혼잡한 교통체증을 만나게 된다. 로티와 로리가 선사했던 환상동화를 소화할 틈도 없이 버스 정류장, 지하철에서 지친 퇴근길 직장인들의 우울함을 마주하게 된다. 놀이공원의 소음과 도시의 소음이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에버랜드는 매표소 바깥에도 여전히 에버랜드에서 틀어주는 흥겨운 음악이 들리며 마음만 먹으면 꿈과 환상의 나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긴 전용도로를 통해 빠져나오며 어느 정도 호흡을 가다듬게 되고 천천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어느새 고속도로와 만나게 되면 정말 내가 그런 곳에 있었나 싶은 꿈을 꾼 것 같이 아련한 기분이 든다.
롯데월드가 지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에버랜드만큼의 터널 효과를 만들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터널 장치를 갖추었다. 나는 롯데월드 하면 주관적으로 가장 먼저 강렬하게 떠오르는 것이 입구의 기다란 에스컬레이터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꽤 길게 느껴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그 끝에 아르바이트생이 환하게 인사하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환상의 롯데월드가 펼쳐진다. 많은 어린이들이 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설레어하고 빨리 에스컬레이터가 끝나기를 부모님 손을 꼭 잡고 기다린다. 지하철이나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 경험과 결이 다른 롯데월드 에스컬레이터만의 경험이 분명히 있다. 롯데월드가 도심 속에 있어 에버랜드만큼의 터널 효과는 없을지라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나름대로 입구의 에스컬레이터가 터널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는 것 같다.
놀이공원이나 스키장 같은 공간이 아니어도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제품에도 유저의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한 터널 장치가 있다. 바로 패키지 디자인이다. 우리가 새로운 제품을 사용할 때를 떠올려보면 제품 본체를 곧바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 비닐, 박스를 먼저 만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훌륭한 패키지 디자인을 가진 제품은 언박싱 자체가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래서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제품 소개를 위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언박싱이다.
편의점에 가보면 패키지가 없는 제품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품 자체를 보고 구매를 결정하기보다는 겉면의 패키지 디자인을 보고 구매를 결정하게 된다. 과자의 모양이 어떤지 알 수도 없는데 과자봉지에 그려져 있는 그림만 보고 바삭할지 부드러울지 맛이 바나나맛일지 옥수수맛일지 판단하고 계산대로 가져간다. 단순히 그려져 있는 캐릭터가 귀여워서 과자를 살 때도 있다. 이렇게 패키지는 고객이 제품을 사기 전 제품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실제 제품을 만나기 전 고객이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주는 터널이 된다.
터널 장치가 실제 공간이나 패키지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터널을 무조건 길고 웅장하게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품의 특성에 맞는 사용자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터널 공사를 꼼꼼히 기획해야 한다.
터널 길이 결정
식품의 경우에는 터널 장치를 크게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터널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매우 짧아야 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고 당장 먹고 싶어서 식품 포장을 뜯는데 그 과정이 길다면 짜증이 확 올라오지 않을까? 심지어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포장지에 그려져 있는데도 배가 고파 일단 봉지를 찢는다. 뜯고 나서 어떻게 요리하지 하고 다시 찢어진 포장지 조각을 맞춰서 확인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제품을 사용할 때 유저가 어떤 환경에 처해있을지 연구해서 패키지의 터널 길이를 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한 터널,
터널을 뚫기보다는 돌아가기
전자제품 중에서도 게임기나 스마트폰처럼 물리적 크기가 크지 않은 제품의 패키지에서는 터널 장치를 조금 더 명확하게 체험할 수 있다. 크기가 큰 제품의 경우 박스 포장을 뜯는 행동 자체가 노동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언박싱 과정이 간단하고 빠를수록 좋다. 여러 구조물을 통해 언박싱 과정에서 사용자에게 특정 경험을 전달하는 게 좋을 수 있지만 큰 박스에 커다란 구조물을 많이 끼워 넣는 것에 대한 높은 비용도 생각해야 한다. 이럴 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험을 기다리게 하는 터널 장치보다는 언박싱 과정에서 큰 기기가 부서지지 않게 해주는 안전장치에 힘을 쏟는 게 오히려 유저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한다.
터널의 조명 결정
작은 기기의 패키지에는 큰 기기에서 보다 쉽게 터널 장치를 확인할 수 있다. 제품을 직접 손에 쥐기 전까지 터널을 통과하며 이 제품을 사용할 때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달라질지에 대한 기대감과 구매 결정에 대한 타당성을 심어줄 수 있다. 패키지의 터널 장치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요소는 바로 터널의 조명, 브랜드 색상 활용이다. 애플의 공통적인 새하얀 패키지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모두가 새하얀 에어 팟을 끼고 있는 미래로 안내하는 것 같다. 어지롭고 정리 안된 책상에 아이폰 박스를 올려놓는 순간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하나가 책상 한가운데 뻥 뚫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문을 열었을 때 만나는 새하얀 세상은 내 어지러운 책상과 대조되는 극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물론 깨끗하고 정리된 책상 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단순히 새 물건을 열었으니 설레는 게 당연하다. 내 책상이 늘 더럽긴 하고 억지 설득을 위해 조금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상자를 열자마자 곧바로 아이폰이 떡 하고 나오는 것과 박스를 열었을 때 나와 아이폰 사이에 하얀 종이가 끼워져 있는 경험의 차이는 엄청나다. 내가 실제로 아이폰을 손에 쥐기 전까지 마음의 준비할 수 있는 호흡을 패키지의 터널 장치가 제공하는 동시에 그런 장치가 제품을 한번 더 숨겨 제품 자체에 어떤 신비로움까지 부여하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형태가 많은 IT 기기의 스마트한 패키지 터널 장치는 난생처음 보고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기기가 튀어나올지라도 이 제품은 당연히 이런 거지라고 사용자 스스로 납득하게 해 준다. 반대로 면도기나 욕실용품처럼 익숙하고 흔해빠진 제품에서도 패키지 속 각자의 브랜드 색상을 품은 종이나 뚜껑 한층이 마치 처음 보는 기기를 사용하는 것 같은 신선한 사용자 경험을 만들어 준다. 어떨 때는 기능적으로 실사용 경험이 경쟁사 제품보다 떨어지는 제품도 차별적인 패키지 디자인과 독특한 언박싱 경험이 재구매를 유도하기도 한다. 식품이나 구호물품을 뜯을때만큼 긴급하지는 않은 동시에 커다란 기기를 뜯을 때만큼 위험하거나 힘들지 않은 적당한 수준의 제품 패키지에서는 이렇게 브랜드 컬러가 담긴 단색 종이 한 장으로도 사용자 경험을 뒤바꿀 수 있다. 만약 여기에 작은 인사말이라도 적혀있다면 제품을 구매한 사용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동시에 제품의 품격까지 높여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 경험한 패키지중 면도기 구독 서비스와 자연주의 비누 패키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면도기 구독 서비스의 경우 면도기 형태가 기존 면도기들과 큰 차이가 없고 심지어 면도날 절삭력은 일회용 면도기보다 떨어져 구독을 취소하려 했다. 그러다 새로 면도기 날이 리필되어 오면 그 리필 박스 패키지를 언박싱하면서 구독취소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더라. 마치 그 면도기를 사용하기 위해 고급스러운 호텔 객실로 안내되는 느낌이었다.
자연주의 비누의 경우 특별하지 않았지만 상자를 열고 비누 위에 얹어진 반투명한 트래싱지의 인쇄물 한 장이 순식간에 제주도 청정지역에서 현무암 세면대에서 세수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만약 곧바로 비누가 나왔다면 비누를 사용할 때마다 그런 기분이 환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제품 패키지의 터널 장치는 제품을 열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지만 이후 제품을 사용하면서도 내가 어떤 터널을 지났는지 계속해서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수많은 제품을 경험하면서 이미 나름대로 터널 경험에 대한 데이터가 쌓여있다. 여러분이 어떤 제품을 처음 구매한 후 언박싱 과정이 실망스러웠던 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나름대로 좋은 언박싱 과정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좋은 패키지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경험적 데이터가 쌓여가는 유저들을 위해서라도 UX 디자이너는 제품을 처음 만나는 유저의 환경을 생각해서 우리 제품 세계로 고객을 안내할 터널을 짓는데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