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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근 Jan 26. 2023

Exile(추방) 되지 않기 위한 Agile(애자일)

어떻게든 일단 해보자


Agile, 멋진 신세계


애자일은 멋진 신세계다. 프로페셔널하면서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그 멋진 신세계 안에선 내가 더 중요해질 수 있고 내 의견이 제품에 더 반영될 수 있으며 언제든지 동료나 상사에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러분이 개발자 거나 IT 프로덕트와 관련된 디자이너라면 (Agile) 애자일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 자신이 애자일 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경험에만 의존했을 때 "우리는 애자일 하게 일하는 조직입니다."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다음과 같을 확률이 매우 높다. "뭔가 분주하게 하고 있긴 한데 제(혹은 쟤가)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는 사실 잘 모릅니다."



나는 과연 애자일이라는 신세계로 제대로 항해하고 있을까?

 





애자일(Agile)?


애자일은 일하는 방법론, 프레임워크 중 하나이다. 방법론 측면에서 분야에 관계없이 애자일 방식을 적용할 수 있지만 애자일은 처음에 실리콘밸리의 일부 개발자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워터폴(Water Fall) 소프트웨어 개발 방식의 대안으로써 제시되었다. 워터폴(폭포)은 연상되는 이미지에서 느껴지듯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개발방식이다. 이상적으로는 일의 순서가 명확하게 설정되어 선행 단계가 완료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뭔가 쿨하고 멋진 애자일한 이런 느낌...?

애자일은 기존의 워터폴 방식과 달리 빠르고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개발하며 사용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고자 한다. 언제든지 피드백을 통해 제품을 다시 수정할 수 있도록 1-3주 정도로 짧은 주기의 반복적인 작업 단위를 설정한다. 이 작업 단위를 보통 스프린트라고 칭하지만 내 생각엔 부르는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개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이 짧은 작업 단위를 계속 반복해 가며 처음에 완성도는 뛰어나지 않더라도 핵심 기능을 중심으로 전체 윤곽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MVP: Minimum Viable Product)을 빠르게 만들어내고자 한다. (MVP 말고도 MD(Desired) P라던지 방향성에 따라 프로토타입의 목표를 다르게 잡을 수 있다.) 새로운 스프린트가 시작될 때마다 이전 스프린트 과정의 피드백을 반영하면서 눈에 보이는 실물을 바탕으로 민첩하게 사용자 경험을 개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됐다.



빨리빨리!


그렇지만 국내에서는 사용성보다는 오로지 MVP를 얼마나 빠르게 시장에 선보이느냐 하는 속도에만 집착해 애자일을 선택하는 경우가 흔한 것 같다. 완성도가 떨어질지라도 일단은 뭐라도 시장에 빨리 내는 것이 목표이기에 애자일의 최고 장점인 지속적인 사용성 개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정말로 속도의 측면에서만 접근해 시장에서 추방(Exile)되지 않기 위한 사생결단으로 애자일(Agile)을 외치는 것이다.


스프린트 과정에서 디자인이면 디자인 개발이면 개발, 각 분야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끊임없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이 이상적이다. 속도에만 집착하게 되면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을 건너뛰고 일단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는데 급급하게 된다.




잔잔한 해류와 소용돌이


이런 식의 접근도 물론 잘못된 접근은 아니다. 기존 방법론들보다 애자일 프레임워크가 속도적으로는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투자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초기 스타트업의 경우에는 빨리 성과를 보여야 하는 압박감에 속도를 더욱더 고집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배의 속도가 빨라지면 그만큼 고도의 숙련된 항해사와 선원들이 필요한 법이다.


워터폴 방식에서 일의 흐름을 보자면... 상류에서는 계획을 수립한 뒤 천천히 하류의 실무진들에게 탑다운으로 업무지시가 내려진다. 정해진 흐름대로 각자 맡은 부분만 잘 수행하면 배는 알아서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선원의 숙련도가 낮을지라도 좁은 범위의 맡은 부분만 시키는 대로 수행하면 되기에 큰 문제가 없다. 워터폴 프로젝트는 갑자기 바람이나 물의 흐름을 바꾸어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지만 정해진 경로를 따라 하류를 지나 바다로 유유히 흘러간다.


반대로 애자일은 배를 폭풍우 속 소용돌이로 몰고 가는 것과 같다. 소용돌이의 심연에 웜홀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모르나 일단 웜홀에 다다르기까진 선장부터 선원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배를 침수시키지 말아야 한다. 소용돌이를 따라 돌면서 물의 흐름과 배의 방향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선장과 항해사, 갑판장은 워터폴에서 하듯이 일일이 선원들에게 행동지시를 내릴 수가 없다.


선원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능동적으로 동원해야 한다. 때로는 갑판 담당자가 물을 퍼내기 위해 선실로 내려가야 할 수도 있고 돛대에 올라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모든 선원들은 자기가 맡은 부분에 대한 실력이 최고여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동료의 전문분야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협조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애자일한 조직의 팀원들이 그러한 자세를 갖추지 못한다면 종국에는 스스로 파도에 휩쓸려 배에서 이탈 혹은 추방될게 자명하다. 




초짜 선원밖에 없는 현실


하.... 답답하네

빠른 유속을 감내하기 위해 최고의 선원들을 뽑아야 하지만 애자일을 가장 많이 활용한다는 국내의 벤처 스타트업 환경에서는 최고의 선원을 뽑기가 쉽지 않다. 최고의 선원들은 비싼 보상을 요구한다. 아직 수익성이 불안하고 자본이 부족해 투자에 의존하는 신생 조직은 고급 선원보다는 가성비 있는 선원을 좋아한다. 고급선원들은 대기업을 바라보거나 자기가 선단을 꾸리는 쪽을 선택하기에 굳이 연봉을 깎아가며 애자일 조직에 지원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경험 많은 고급 선원이 어떤 자아 목표의식이 있거나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한 애자일 조직에 지원하기는 쉽지 않다. 


초급 선원들의 비중이 많고 보수적인 고급 선원으로 이루어진 조직에서는 팀원들 간에 책임감과 오너쉽이 공유되지 않아 추진력 있으면서도 밀도 있는 프로젝트 진행이 쉽지 않다. 조직 내에 팀원 간 갈등과 이탈이 잦다. 공동의 목표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이 팀 내에서 점점 흐릿해지고 민첩하게 나아가야 할 애자일 조직은 같은 자리만 빙빙 돌다 침몰하게 된다.




고급선원 vs 선장

고급선원이자 선장...?


소용돌이 속에서 선원 개개인의 능력치도 중요하지만 선장의 리더십이 여전히 가장 중요하다. 언제나 실전인 애자일 프로세스에서는 리더는 언제나 민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적재적소에 리소스를 분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리더는 흔치 않다. 


국내에서는 실력보다는 연차가 높은 사람이 선장이 될 확률이 높다. 이들은 보통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거나 삼성 어디 출신이라거나 박사 출신이라는 등 여러 수식어가 붙어있다. 워터폴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소용돌이에 들어온 이상 나름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두 분류로 나뉘는 경향이 있다. 첫 번째는 단순한 개념은 이해해 열정적으로 실행해보려고 하지만 책이나 블로그에서 접한 보이는 용어들의 사용에만 집착하고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본질을 파악하더라도 리더가 리소스를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전자는 JIRA 라든가 AZURE 라든가 NOTION, SLACK 사용하고 있으니 애자일하게 일하고 있다는 식이다. 전체 구성원들이 실제로 어떻게 소통하고 일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오히려 여러 툴들에 집착해 문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쓰게 하는 경우가 있거나 스스로 대면 소통을 피하기도 한다. 


베스트셀러 한 권이 모든 프로젝트와 사용자에게 만병통치약처럼 유효하다고 할 수 없다. 애자일하게 일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유연함이다. 리더는 사용자에 적합하며 동시에 일 하는 조직에게도 맞는 업무 방식, 개발 방식을 끊임없이 찾고 시도하고 변형할 수 있어야 한다.


후자의 경우는 초급 선원들이 자신처럼 애자일의 본질을 파악해 높은 자유도안에서 스스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경험이 없는 초급 선원들은 워터폴 방식으로 이끌어줘야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다. 잔잔한 바다에서도 항해해 본 적이 없는데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물론 많은 리더들이 그런 것을 알고 있으나 일이 틀어질 대로 틀어지는 걸 참다가 참다가 뒤늦게 일괄 지시를 내리게 된다. 여기엔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수직적 위계와 상대적으로 사회초년생인 젊은 직원들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심리가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좋게 해석하면 배려일 수 있지만 결국 소용돌이 속에서 고급 선원 몇몇이 아무리 배를 붙잡고 있더라도 선장의 어중간한 결단력이 배를 침수시킬 수 있다.


애자일 방식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잘되는 조직에 가보면 겉으로 보기엔 애자일이지만 실제론 암암리에 워터폴 방식인 경우가 대다수다. 실제론 부서의 리더나 CEO의 결정에 따라 수직적이고 수동적으로 일을 해내고 있다. 이럴 때 애자일은 그저 젊고 건강한 조직문화 만들기 캠페인 정도로 활용되는 듯하다.




어떤 배를 타야 할까?

현실적으로 애자일은 팀빌딩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고의 소수정예 팀원을 뽑아 최고로 빠른 배를 만들어 블루오션을 찾아 나선다. 이때 이들이 타고 갈 배의 규모가 상당히 중요하다. 작은 배는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 심지어 비밀리에 시장에 침투할 수도 있다. 애자일은 규모가 작을수록 효과가 크다. 


처음 시작하는 스타트업에서는 적은 수의 인원이 꾸려지기에 비교적 효율적인 애자일 조직이 자연스레 형성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규모가 작아서 어쩔 수 없이 애자일하게 일하게 됐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애자일 하게 일하려면 팀 규모가 작아야 한다. 


애자일은 짧은 주기의 목표를 정하고 직무별로 목표한 로드맵을 달성하기 위해 매 순간 협력해야 한다.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필수다. 작은 배 안에서는 선장, 항해사, 갑판장, 기관장, 통신장등 각 분야의 능숙한 리더들의 의사소통이 즉각적이다. 


사실 IT 스타트업 같은 경우 기술에 이해가 빠른 리더와 유능한 개발자가 있다면 처음부터 항공모함을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초기부터 빠르게 큰 투자를 받아 갑작스레 조직이 커지기도 한다. 항공모함을 제대로 굴리기 위해 필요한 부서를 신설하고 선원을 대규모로 모집한다. 그런데 애자일한 조직이 아직 체계를 갖추기 전에 조직원이 100명 이상이 되면서부터 규모의 혼란이 시작되는 것 같다. 


규모가 클수록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

인원은 많더라도 아직은 시장을 휘어잡지 못한 상태라면 계속해서 빠르게 제품을 수정하고 검증해나가야 한다. 아무리 항공모함으로 출발했더라도 그 항공모함을 호위하기 위한 작고 빠른 호위함들이 필요하다고 비유할 수 있다. 아직 우리는 애자일하게 일해야 하는데 벌써 항공모함을 굴리고 있고 부서별로 출발한 고속정들이 저마다 또 다른 애자일 그룹을 형성했다. 커다란 항공모함 안 격실마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어렵고 서로 다른 고속정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은 더더욱 어렵다.


조직 내에서 유기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면 일단 각 분야에서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체크리스트에서 지워나가려다 보니 불필요한 기능을 고도화시킨다던지 기능이나 사용성에 관계없이 단순히 예뻐 보이는 디자인을 일단 찍어내는 등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일하면 모든 행동이 왜인지 다시 해야 할 것 같은 불안을 지울 수가 없다. 




규모가 주는 착각

규모가 큰 애자일 조직의 가장 큰 문제이자 최악의 상황은 고속정들이 하나 둘 침몰해 가도 항공모함이 있으니 괜찮다는 안일한 생각이 조직 전체에 퍼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항공모함 마저 소용돌이에 휘말리더라도 그 규모 때문에 격한 파도가 잘 체감되지 못한다. 그래도 나름 애자일 조직이라고 방향을 선회해 보려고 할 땐 항공모함의 절반은 침수되어 있을 거고 선원들은 스스로 탈출하거나 잘려나갔을 것이다. 결국 항공모함을 버리고 구명정 하나를 빠르게 잡아타고 나가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애자일 조직이라고 하면 작은 규모의 구명정으로 줄여서 나가서 오히려 다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초급선원들이 겪은 좌절과 유능한 고급선원들의 회의감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무리하게 몸집을 키우지 말고 천천히 체계를 잘 잡아나가다가 나름의 워터폴 체계를 확립한 이후에 확장된 사업 분야별로 애자일 조직문화를 격려하는 방향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입으로 글로 말하긴 쉽지만 사실 실제론 몸집을 키우는 것 자체가 참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미 항공모함을 잘 굴리고 있는 워터폴 기업들에서 새로운 사업분야를 만들어 시장 검증을 위한 애자일 조직들을 내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미 조직력과 자본을 갖추고 있기에 애자일 팀을 규모 있게 편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찬가지로 최대한 소규모 특수부대를 꾸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애자일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뭘까?


나는 지금 시점에서는 애자일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내가 5명으로 팀빌딩을 했을 때 자연스레 해왔던 일의 방식이 나중에 보니 애자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거꾸로 100명이 넘는 조직에서 나에게 주어진 애자일 프로세스는 이게 과연 맞는지 때때로 혼란스럽다. 나도 그저 조직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조직이 정한 애자일 프로세스에 그러려니 하고 따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해선 스스로 일의 의미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어떤 이론을 무작정 따르려 하기보단 자신만의 합리적인 프로세스를 먼저 세워보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판단해 보라. 나름대로 직접 생각한 일의 방식을 실행에 옮긴 이후에 우연히 여러 이론들을 참고하다 보면 이미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방식과 비슷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기존 이론에서 내 방식과의 유사점을 찾아내는 순간 나만의 일하는 방식을 스스로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애자일이 아니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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