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문학동네, 8,000원) 서평
『데미안』이라는 책을 알게 된 건 ‘길 안내자’ 덕분이었다. 사회학에 대한 열망 하나로 편입생 신분으로 만난 우리는 살아온 삶은 달랐지만, 매우 닮아있었다. 그녀가 이 책을 소개해 준 덕분에 이 고전의 존재도 몰랐던 과거에 지난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나만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카인의 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랬구나…'하는 깨달음과 동시에 직접적인 신경쇠약을 겪지 않은 사람이어도 데미안을 읽음으로써 나에게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알려준 헤세라는 사람은 평생을 고통스럽게 산 사람이다. 고질적인 신경증은 그의 일생을 따라다녔다. 신학교에서 퇴학당했을 때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도, 결혼 생활 중에서도 우울증과 신경증은 감기처럼 언제든 찾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고집이 세고 반항적이었던 헤세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경건하고 억압적인 집안의 분위기는 그의 반항심에 불을 지폈으리라. 또한 그는 일상의 도피처를 찾아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여행자이자 방랑자였기에 자신의 현실 세계를 지탱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굳이 남에게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낯선 곳이 필요했을 테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길로 이르는 것은 그에겐 필수적인 일이었다. "어린 시절이 물러지면서 천천히 붕괴하는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우리의 운명인 죽음과 재탄생을 경험한다. 그동안 친숙해진 것이 모조리 곁을 떠나고, 돌연 고독과 세계공간의 죽을 듯한 냉기가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느낄 때면 그렇다. 아주 많은 사람이 이 낭떠러지에 영원히 매달려 있고, 평생 동안 고통스럽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에 달라붙어 있다." 필자는 이 문장이 그가 자신만의 길로 가기 위해 겪은 고난의 과정을 압축해 놓은 것으로 보았다. 데미안을 만나 어두운 세계의 존재를 인식한 주인공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와 어둠의 세계, 그 이분법적인 형상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어둠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과거에 존재하는 낙원을 볼 수 없고, 보다 끈질긴 생각으로의 초대만이 빈번하다. 그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정해진 것은 없다는 깨달음들, 그래서 세상에 정해진 모든 것에 물음표를 던지는 것, "그냥 말하기 위해서만 하는 대화"에 대한 의구심 등이다. 하지만, 결코 세상은 이분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님을,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함이 더 자연스럽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싱클레어는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대신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계속해서 알을 깨트리는 경험을 하며 더 자유로워질 방향키를 잡는다. 내면의 성장을 멈추지 않았던 싱클레어는 결국 크나우너라는 동급생의 성장까지 돕는 '길 안내자'가 된다. 결국 스스로가 자신의 '길 안내자'이며, 누군가에게 '길 안내자'가 된 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싱클레어는 새롭게 태어났다.
이 이야기가 누구의 것인지 감이 오는가? 바로 헤세 자신의 이야기이다. '자전적 소설'답게 그가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극복했던 과정이 싱클레어를 통해 서술되는데, 자아를 확장하며 느끼는 심리 묘사가 매우 세밀하다는 데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물질적인 풍요는 기묘하게도 정신적인 빈곤으로 이어진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사람들은 무질서 속에서 혼돈을 느끼는데, 이 "이전과는 다른 느낌."은 불안과 무기력, 회피적인 태도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일상에서 건강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무너지기 쉽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정서적 불안은 사실상 자신이 아닌 이상 곁에 있는 사람이 완전히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에서 찾을 수 있는 구체적인 심리 묘사는 핵 개인주의 사회에 굉장한 가치를 지닌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 것보다 어쩌면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치유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자아 확장'의 기회를 <데미안>과 함께 한다면 조금 더 건강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말이다. 이 글의 독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침잠하는 게 아닌 새로운 세계로 가는 여정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