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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킹라이프 10     추억의 <삼중당 문고>



여고 시절 우리들의 취미는 주로 연애 아니면 독서, 글쓰기였던 거 같다.

글 잘 쓰는 훈남 남학생과 책 많이 읽은 여학생은  나름 잘 어울리는 문학 소년, 소녀의 콜라보레이션이던 시절.

문학 소녀 또는 소년이라면 책가방 속에   포켓북 사이즈의 손때 묻은 삼중당 문고 1권정도 가지고 다니는 건 센스.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박정희군부 독재 시대에 독서 취향은 억지를 부려 우기면 ‘평등’했다.

구로공단 여공들이 쪽방에도 전혜린의 산문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앉음뱅이 책상 위에 꽂혀 있었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인질극을 부리다 총상를 입고 죽은 지강헌의 취미는 독서였고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죽기 전 틀어 달라던 감성 청년이었다,

원하는 것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들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없었던 그 시절 우리는  450원 또는  700원짜리 삼중당 문고를 읽으며 지성인 코스프레에 흡족한 70년대 독서 덕후였다.  

어둠의 터널을 향해 걸으면서도 "쨍하고 해 뜰 날"돌아 오리란 유행가 가사를 가슴에 품고 노신의  소설  아Q정전의 주인공 아Q 의 정신승리법으로 버텼다.

책 을 읽으면 사랑, 혁명, 순수, 열정 이 모든 에너지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기에, 책을 통한 대리만족은 군주독재의 암울함을 잊을 만큼 중독성이 있었다.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 여성들도 월간 잡지 ‘여성동아’ ‘레이디경향’ ‘여성동아’등을 읽으며, 교양있는 현대 여성이 되려는 꿈을 키웠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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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당 문고     

                    장정일    

 열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 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 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 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 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히 끼고 나온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홍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 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 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 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배때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 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 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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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120세 인문학 북클럽>이란 모임에서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고  서울대 p교수님의 강연을 들었다.

 50대 중반에 파리 유학파 P교수는 이 작품의 주인공 '쥘리앙 소렐'의 욕망의 사다리와 욕정의 삼각형을 이미지로 그려 주며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마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의 영혼이 빙의된 듯.

  여고 시절  연애 소설의 대표작인  '적과 흑' 을 읽으며, 나 역시 불멸의 사랑과 신분 상승을 동시에 이루고자 한 주인공 쥘리앙 소셀이란 캐릭터에 무작정 빠져 든 적이 있었다.

평균 연령 50세의 북 클럽 회원들의 상기된 표정과 1시간 20분의 강연에 후끈 달아 오른 현장의 역동을 느끼며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세계 문학의 향기.

특히 이 소설이 격동의 1970년대 출판시장인 팬 서비스  포켓북 '삼중당문고"에 수혜를 입은 당사자들에게 다가온 감동은 상상 이상인 거 같았다.

 그 당시 우리 모두는 가난한 사제 줄리앙 소렐이 되고 싶었고, 연하의 미남 사제와 금지된 사랑을 나누는 베리에르의 시장부인인 레날과 대귀족의 딸인 마틸드가 되고 싶었던 문학 소녀, 소년인 적이 있었기에 한권의 소설로 연결될 수 있었다. '적과 흑' 쥘리앵 소렐을 우리 모두의 마음 한 켠엔 젊은 날의 영혼의 심볼이기도 했다.

 <적과 흑>(1830)의 남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가난한 평민(목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의 구박이나 받던 처지였지만 쥘리앵은 라틴어 성경을 암송하는 뛰어난 지적 능력 덕분에 레날 시장댁의 가정교사가 된다. 그의  능력은 타고난 신분의 제약에서 벗어나 인생역전의 기회를 갖게 해주지만,  쥘리앵은 이번에는 도도한 귀족처녀 마틸드를 유혹하여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하고, 두 사람의 처지를 고려한 후작에 의해  라 베르네이란 귀족 신분을 얻게 된다.

성경 암송능력으로 교구신부의 추천을 받아 가정교사가 된 그는 마치 나폴레옹의 군사적 원정을 흉내 내듯이 레날 부인을 유혹하고 나선다. 그를 짝사랑한 하녀의 밀고로 부인과의 관계가 탄로나서 쫓겨나지만 다시금 파리의 대귀족 라 몰 후작의 비서가 됨으로써 재기의 기회를 잡는다.
 소설은 레날 부인과의 관계를 폭로하는 투서가 후작에게 전달되자 격분한 쥘리앵이 고향에 내려가 레날 부인을 총으로 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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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를 위해 시대와 대결했던 쥘리앵 소렐, 그가 유일하게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 레날 부인,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쥘리앙 소렐의 법정 최후 진술은 지금도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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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여러분, 부당한 경멸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계층에 속하는 영예를 얻지 못했습니다. 보다시피 나는 자신의 보잘 것없는 운명에 반항한 일개 농부입니다. (7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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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미수 혐의로 재판정에 선 . 라 베르네이라는 귀족의 지위도 어렵사리 얻어낸 쥘리앵은 스스로를 ‘일개 농부’로 지칭한다. 역설적으로 그런 행위를 통해서 쥘리앵은 진정 귀족다운 태도를 부르주아들 앞에서 과시한다. 덕분에 <적과 흑>은 신분상승담을 넘어서 계급투쟁의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승격된다.



김영삼 정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수학능력시험으로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린 세계문학은 시험 범위에 안 들어 가는 단원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여고 시절 독서는 우리들에게 값싸게 누릴 수 있는 취미 생활이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을 수 없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나 될 수가 없는 아, 아 대한민국에서 신분 고하 빈부를 떠나 독서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용한 양식이었다.

교실 뒤 켠에 자유교양문고라고 불리는 초록색 표지의 추천 도서들이 비치되어 있었고,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과정도 손바닥만한 종이 카드로 언제든지 가능했다.

산업 역군이라 불리던 여공들의 자취방에도 월부로 끊어 책값을 치르는 월간 여성지들이 화려한 화보 빛내며 꽂혀 있었다. 담배 한 갑 정도 값을 치르면 누구나 토스토예프스키나 헤밍웨이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수 있었다.

 대개 1970년대에  출판 시장엔 값싼 문고본 책들이 등장했다. 을유문고, 서문문고, 삼중당문고 등의 저가의 책을 점심값을 3번 정도 모으면 사 볼 수 있었다. 자습서 산다고 거짓말을 하고 산 책도 있고, 심부름을 하고 남은 우수리를 떼어 먹고 산 책도 있다.

암튼 책을 산 날은 무지하게 설렜다. 거사를 치리기 전의 비장함과 어떤 내용이 펼쳐질까하는 궁금함,

1960년 대 전국 단위 학생들을 위한 잡지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학원’ 재미로 읽는 잡지 제목을 ‘학원’이라고 붙여도 암시롱도 않을 만큼 학생 잡지는 인기가 있었다. 종이가 부족해 교과서도 못 찍어 헌 교과서를 물려 받던 시절인데 이 잡지는 ‘10만부’를 찍었다고 한다. 순천고 김승옥, 보성고 조해일, 경복고 황석영.

나도 ‘학원’에 원고를 투고하며 문학 소녀의 꿈을 불 태웠는데......

시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배때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 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 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장정일 시인의 시처럼 삼중당 문고만한 금고 속에 내 꿈은 봉인하고 난 지금

글쓰기 노동자의 꿈을 키운다.



반세기를 지나 반백의 중년으로 만나 왕년의 문학 청년, 소녀들은 강연을 마치고 수고한 P교수님을 모시고 호프집에서 세계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하면 어. 하는 말이 필요없는 삼중당문고 세대의 공간 토크.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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