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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 ‘장난감 도시’ 망태꾼 친구들

초등학교 1학년,  아빠와 엄마는 친할머니와 삼촌에게 어린 나를 잠시 맡겨놓고 서울 구로동으로 일자리를 구해 떠났다.

 블럭담에 검은색 콜타르를 씌운 루핑 지붕을 얹은 쪽방촌  마을 뒷켠에 넝마주의로 생계를 이어가던 망태꾼들이 모여사는 천막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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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도시로 이사를 왔다. 아주 맥 풀린 하품을 토해 내며 새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촘촘히 들어앉은 판잣집들, 깡통 조각과 루핑이 덮인 나지막한 지붕들, 이마를 비비대며 길 쪽으로 늘어서 있는 추녀들, 좁고 어둡고 질척한 그 많은 골목들, 타고 남은 코크스 덩어리와 검은 탄가루가 낭자하게 흩어져 있는 길바닥들, 온갖 말씨와 형형색색의 입성을 어지러이 드러내고 있는 주민들, 얼굴도 손도 발도 죄다 까맣게 탄 아이들…… 나는 자꾸만 어지럼증을 탔고, 급기야는 속엣것을 울컥 토해 놓고 말았다. 딱 한 잔 분량의, 오렌지빛 토사물이었다.    
ㅡㅡㅡㅡㅡ이동하 '장난감 도시 ㅡㅡ중략



    

이동하의 '장난감 도시'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식되어 혹독한 허기와 궁핍, 그리고 아버지의 일시적 부재와 어머니의 죽음을 속절없이 체험해야 했던 가족 환경,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어린이의 시선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소설 '장난감 도시'의 공간 묘사가 8살 때 살던 내가 살던 수원시 매산동 넝마촌과  많이 닮아 있다.     

  속된 표현으론 '양아치들' 그리고 넝마주이들 '망태꾼'들은 내가 어린 시절 가깝게 지냈던 이웃들을  지칭한던 이름이었다.    

''넝마는 버린 옷이나 이불 따위를 말한다. ‘넝마를 걸치다.’란 표현이 아직도 쓰이고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내 어릴 적만 하더라도 넝마주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넝마’를 주웠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등에 대로 짠 큰 바구니를 매고 손에는 끝이 기역자로 꺾인 꼬챙이나 집게를 들고 다니면서 주로 버린 종이를 주웠다. 깡통 같은 쇠 조각을 모으는 이도 있었다. 이제는 손수레나 작은 트럭을 끌고 다니면서 재활용용 빈 유리병, 플라스틱 병, 포장지 들을 거둬가는 사람이 있지만 넝마주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이들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땅거지’랑 비슷하지만 ‘땅거지’는 직접 소용되는 것만 줍지만 넝마주이는 돈을 만들기 위해 줍는다는 점이 다르다. 지금 자원재생공사가 하는 일은 옛날엔 고물상과 넝마주이들이 다했던 셈이다. '' 
ㅡbryoco님의 네이버 블로그 글 인용-ㅡ-



   

8살 내 친구들은 넝마주이촌에  살았다. 어른들은 그 아이들을 양아치새끼들이라 비하해서 불렀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커다란 망태를 어깨에 메고 쇠로 된 큰 집게로 쓰레기를 줍고 사는 부모들의 영향으로 그 아이들도 역시 땅거지처럼 철공소 주변에 쇠 조각이나 공터 주변에 뒹구는 전선줄을 주어  고물상에 넘긴 돈으로 군것질을 했다.

 해질 무렵까지 부지런히 각자 주워온  크고 작은 철사줄을 모아 불을 붙이면 나일론으로 씌운 껍질이 불타오른다. 매캐한 유독 가스를 뿜어내며 초록불, 파란불 또는 주황불로 타오르는 불꽃들

마녀의 주물 냄비에 끓어 오르는 마법의 불꽃에 몽롱하게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쓰레기 더미에선 황동 구리 덩어리가 발갛게 달아 오르며 한줌의 고철로 바뀐다.

대장 오빠의 부스럼 자국으로 드문드문  머리가 빠진 빠박머리 준호 오빠가 쏴!하고 소리치면 대여섯 살 꼬마 아이부터 열 살에서 열 세 살  정도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으며 오줌을 싸서 불을 껐다, 지린내나는 매캐한 악취는 잠시, 그날 주어온 수획량을 가늠해 황동을 고물상아저씨께 넘기고 바꾼 박하사탕이나 뻥튀기를 줄을 서서 나눠 받았다.

달달한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둘러 앉은 아이들 무리에 유일한 여자 아이인 나는 불꽃 구경에 취해  코구멍에 검은 검탱이를 바르고 방실방실 웃었다.

지금도 아련히 떠오르는 초록불꽃...    

술만 마시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던 작은 삼촌이 넝마주이 청년  떼에게 집단 린치를 당해 허리뼈가 주저앉아 오래도록 방구석에 누워 있었기에 친할머니는 넝마꾼 아이들과 떼지어 다니는 나를 보면 쌍욕을 퍼부었다.    수원  도청 가는 입구에 진을 치고 앉아 학교 갔다 오는 나를 기다리던 연자언니는 주머니 속에 캬라멜을 주며 전선줄 주우러 가자고 불렀다. 8살 치곤 겁이 없던 나는 삼촌의 맥가이버 칼을 훔쳐 멀쩡한 전선줄을 잘라다 그 아이들에게 갖다주기도 했다,

군것질의 유혹보다 달달한 불장난이 세상 무엇보다 황홀하고 신났던 거 같다.

2학년 될 때 구로동에 자리잡은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땅거지같은 그 아이들 덕분에 외롭지는 않았던 거 같다. 

수원시 매산동 아카데미 극장에 껌팔이 오빠들하고도 친하게 지냈던 거 같다.  가슴에 목판을 매고 양갱,  새우깡,  쥬시후레시 껌을 팔던 오빠들  덕분에 아카데미극장 쪽문으로 들어가 공짜 영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때는 전철이 없을 때라 수원역에서 영등포역까지 기차를 타고 다녔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던 거 같다. 교실 바닥 청소 당번이었던 나는 피마자 열매를 할머니가 짜서 주셔서 피마자 열매로 만든  기름을을 발라 얼굴이 비칠 정도로 걸레질을 잘했다.    

서울에 전학 와서 서울 아이들은 피마자 기름 대신 동그란 쇠통에 왁스로 교실 바닥을 닦는 걸 보게 되었지만  피마자 기름으로 닦는 거에 비함 광택  내기는 쨉도 안된다 싶었다.  8살 때 함께 놀던 넝마주이촌 아이들을 할머니는  양아치라고 함부로 대했다. 양아치’란 말은 넝마주이를 낮춰 부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

 ''망태할아버지 오신다!'' 소리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떨던 유년의 기억을 가졌을 내 또래들에게  망태아저씨나 망태 아이들은 참 착해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재활용 잘하는 일꾼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많던 넝마주이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지?

살짝 그립기까지 하다.            

삼중당 문고, 300원인가? 아마도 이 책이 없었으면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어떻게 달랬을지 ㅎ

다른 건 암시롱 부럽지 않았는데,  책장 가득 하드커버에 금박으로 새겨진 친구네 서재를 보고 온 날은 밤새 속이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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