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멸과 갱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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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폭언·횡령·인권침해. 장애인 거주 시설 관련 기사에서 빠지지 않는 말들이다. 2020년부터는 ‘집단감염’과 ‘코호트 격리’도 빼놓을 수 없다. 왜 비슷한 문제가 계속 생기는 걸까? 잘못한 사람들만 쫓아내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절멸과 갱생 사이〉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사회복지법인 운영 시설이 탄생한 역사와 형제복지원의 구조에 관한 여덟 편의 논문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은 이 책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사회복지법인들이 따르는 ‘수익모델’이다.
형제복지원은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처럼 그 안의 사람들을 모두 ‘절멸’시키는 곳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듯 입소자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갱생’시키는 곳도 아니었다. 형제복지원은 근대화 과정에서 ‘국민’ 혹은 ‘시민’이라는 범주를 구성하기 위해 특정한 몸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공간이었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인’들을 수용했는데, ‘부랑인’은 그 의미가 단 한 번도 명확하게 규정된 적 없는 모호한 용
어다. 그래서 이곳에는 노숙인·구두닦이·넝마주이부터 지적장애인에 이르기까지, 한 범주로 묶이기 힘든 이들이 모두 잡혀 들어갔다. 문제는 국가가 이들이 시설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시설에서 몇 명이나 ‘자활’하여 나오는지, 나온 뒤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등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시설에는 입소자의 머릿수에 따라 돈을 지급했고,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국가가 복지예산을 최소화하면서 ‘도시 정화’를 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즉, 형제복지원은 국가가 자활 사업을 민간에 위탁함으로써 복지지출을 줄여서 효율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어나가는 데 필수적인 공간이었으며, 자활이나 갱생 같은 말들은 그저 허울이었다. 시설 거주인들은 그 안에서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었고, 항상 죽음을 예감하며 살아가야 했다.
형제복지원에서 사람은 국가에 돈을 청구하기 위한 머릿수일 뿐이었다. 이는 지금도 장애인 거주 시설들과 정부를 연결하는 기본적인 관계다. 폭력은 시설의 역사이고, 횡령은 시설의 수익모델이다. ‘나쁜 시설’을 없애도 인권침해 시설이 계속해서 발견되는 이유다.
어떤 이들은 장애인 시설이 원래 장애인을 돕고자 만들어졌고, 그 역할에 집중하는 ‘좋은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틀렸다. 시설은 원래 장애인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절멸과 갱생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단히 얽힌 사회적 배제와 착취의 고리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구조적 폭력 말이다. 시설 개선이 아닌 탈시설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