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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28. 2023

희망도 절망도 하얗게 얼려버리는 계절에

한강, <흰>

* 이 글은 <기획회의>에 쓴 글입니다.  



더운 것보단 추운 것을 더 좋아한다. 몸을 드러내기보다 가리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추위를 덜 타는 건 아니다. 크론병 진단을 받고, 면역억제제를 먹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점점 몸이 약해졌다. 의학적 인과관계까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추위에 약해지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다.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니던 아이는 이제 겨울이면 네다섯 겹을 껴입는다. 


산이 많은 동네에 산다. 집 뒤로도 산이 있고, 집에서 나오면 앞으로도 산이 보인다. 서울 한복판에서 그리 흔치만은 않은 풍경이다. 다니던 고등학교에 앉아 있으면 인왕제색도가 눈앞에 펼쳐지곤 했다. 겨울에 이 산들을 바라보는 일은 묘한 안정감을 준다. 푸르른 이파리들 대신, 와글거리는 생명력 대신, 잠깐 멈출 채비를 하는 거대한 산의 모습이 주는 고요한 안정감.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잘리는 하얀 하늘 아래


거대한 산에 눈이 쌓인다. 가득 쌓여서 오직 흰 것만이 보인다. 이상하게 겨울에는 하늘도 얼어붙은 듯 하얗게 느껴진다. 눈 덮인 산, 눈 덮인 아스팔트, 하얀 하늘, 진눈깨비에 하얘진 시야… 나에게 겨울은 흰색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흰색을 좋아했다. 어릴 때 찍은 사진 중 기억에 남는 것이 몇 안 되는데, 그중 하나는 흰색 티셔츠를 입고 흰색 오디오테크니카 헤드폰을 쓴 사진이었다.


밥을 굶어서 앨범을 구입하던 어머니를 닮은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내가 사고 싶은 앨범을 사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겨울에 듣길 좋아하는 음악들도 앨범 아트가 흰색이다. 이를테면 영국 록 밴드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와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의 앨범 아트는 전반적으로 흰색이다. 중학교 때 힙합 그룹 에픽하이의 타블로를 좋아해서 많이 듣던, 그가 참여한 프로젝트 그룹에서 만든 <Eternal Morning>은 앨범도 흰색인데 타이틀 곡 제목은 ‘White’이기까지 하다. 음악이 좋아서 듣기 시작한 것인지, 흰색이 좋아서 더 이 앨범들에 끌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흰색은 묘하다. 포근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금속과 같이 차다. 그 찬 기운이 포근함과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기쁨과 슬픔을 섞지 않고 오롯이 품는 듯한, 섞여서 흐려져 버릴 수 있는 감정들을, 고요한 컵에 담긴 물과 기름처럼, 그 사이의 경계를 보존하는, 그런 차갑고 조용한 힘을 지닌 듯하다. 포근하지만, 포근함보다는 냉정함이 더 많이 느껴지는, 엄한 선생님이 낙담한 내게 건네는 짧은 포옹과 같달까.


식물을 키우는 사람에게 겨울은 죽음을 예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보통 바질은 한 해를 넘기기가 쉽지 않은 편이다. 바깥에 내놓으면 추워서 얼어 죽고, 겨울에 집 안에서만 키우면 보일러 때문에 건조해진 공기에 말라 죽는다. 1년 동안 아무리 잘 키웠어도 겨울에 하루 이틀 잠시 신경을 쓰지 못하면 이파리는 금방 힘을 잃는다. 우리 집에 있는 바질과도 이별을 준비한다.  


겨울에는 가로수들도 자비 없는 가위질에 잘려 나간다. 가지들을 그대로 두면 봄에 가지를 더 뻗고 잎이 무성해져서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로 겨울에 미리 나서서 가지들을 마구 잘라낸다. 분재를 기르는 사람들이 나무와 영원을 꿈꾸며 적절한 수준으로만 가지를 치려 애쓰는 것과 달리, 가로수들은 그저 자르기 위해 자르는, 목적은 아무렴 상관없는 기술자들의 손에 잘려 나간다. 마구잡이로 잘린 가로수들은 머잖아 죽음을 맞기도 한다. 


그런 가로수들을 보거나 들을 때면 내 욕심 때문에 죽어 버린 작은 향나무가 떠오른다. 분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무에 하얗게 사리를 내곤 한다. 오랜 풍파를 겪어낸 나무들은 일부분 껍질이 벗겨지고 그곳이 하얗게 변하곤 하는데, 그걸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 또한 사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 나무는 새하얀 가짜 사리를 몸에 뱀처럼 두른 채 죽어갔다. 향나무는 여전히 내 방에 놓여 있다. 


잘린 가로수의 단면들, 정리되다가 굴러 떨어진 마른 가지들, 그 위로 내려 쌓이는 눈, 하얀 사리.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그런 장면들. 기록으로라도 남겨서 누군가의 바짓가랑이라도 잠시 붙들고,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런 상실이 있었다고, 떠나간 존재들이 있다고 얘기하고 싶어지는 그런 장면들. 흰색과 죽음은 그렇게 겨울에 겹쳐진다. 


바라고 바라다가 기어코 희어지는 마음을


그래서 나는 겨울이 되면 한강의 『흰』을 떠올린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도 겨울이었다. 추운 겨울날, 사랑하던 이와 함께 두껍게 옷을 껴입고 인천 송도의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았다. 그는 내게 『흰』을 선물했다. 그때의 우리처럼 작고 하얀 소설책. 읽으면서도 소설인지 산문시를 모은 것인지 헷갈릴 만큼 짧은 글들의 연속인 이 책의 몇 문장은 내게 단단히 박혀서, 생각을 하다 보면 이따금 만져지곤 했다. 별생각 없이 배를 만지다가 어릴 적의 맹장 수술로 남은 자국이 우드득 만져지는 것처럼. 


내가 친구에게 『흰』을 읽었느냐고 묻자, 그는 조금 읽다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덮었다고 대답했다. 『흰』은 무겁다. 글자와 문장에도 무게가 있다. 소매에 닿자마자 금방 녹아버리는 그 눈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무거울 수 있는지 『흰』은 알려준다. 띠지에 적혀 있는 문장,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처럼 이 소설은 눈 내리는 겨울에 스러져 가는 타인의 생을 붙들려고 그토록 간절히 애원한다.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54쪽〜55쪽)


작고 오래된 주택들이 늘어선 좁은 골목에, 가로등 두어 개쯤이 비추는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별일 없이 집에서 나왔다가 난데없이 새하얀 절망에 빠져 버리는, 그 절망을 더욱 새하얗게 만드는 흰 눈이, 바람도 없이, 다른 방향도 없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리는 흰 눈이 그 절망에 차갑게 내려앉을 때. 너무 하얀 나머지 그것이 나의 모든 상실과 좌절을 조롱하고 웃어넘기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런 눈, “아무리 희게 빛나도 그늘이 서늘한.”(68쪽)


하지만 이 소설에 절망만이 담긴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흰색 안에서 절망과 희망은 별개가 아니다. 때로 절망은 희망 위에서만 피어난다. 절망과 희망의 ‘망’은 같은 ‘망’이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의미. 희망의 ‘희’도 바란다는 의미다. 바라고 바라는 일,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바람을 끝낼 수도 있다. 바라고 바라다가 그 바람이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고 느낄 때, 어떤 방향으로도 뻗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바라기를 끝낸다. 그렇게 절망이 시작되는 것이다. 


『흰』은 이렇게 서로 뒤얽힌 희망과 절망을 부스러지지 않게, 흩어지지 않게 보존한다. 둘의 얽힘에 좌절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안에서 다시금 희망을 되살리려 한다. 페인트칠을 하고, 저녁을 차려 먹고, 이런 하나하나의 작은 일들이 나의 일상이 무너지기 전 나를 마지막으로 붙들어준다는 사실은 “엉거주춤 서서,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들의 움직임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17쪽)을 때 문득, 정말 문득, 나에게 닥쳐온다. 절망도 희망도 희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40쪽)


흰 것을 건네겠다고 한다. 깨끗한 것이라기보다, 쉽게 더럽혀질 수 있는 것. 그 모든 상실 위에서 다시 흰 것을 건네겠다고 한다. 갓 태어난 아기의 피가 묻은 흰 천을 딛고서 다시 흰 것을 건네겠다고 한다. 무엇을 믿고, 무엇에 기대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몰라도, 다시 흰 것을 건네겠다는 그 마음이 절망을 조금 덜 불행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끗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36쪽) 고개를 돌리고 눈을 뜰 때, 절망은 자기 아래에 깔려 있던 희망을 다시 드러낸다. 


그래서 『흰』에는 흰 것 중에 눈이 가장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눈은 흰 것 중에 가장 약하다. 손에 닿기만 해도 사라진다. 해가 뜨면 사라진다. 따뜻하면 사라진다. 밟으면 더럽혀진다. 피를 흘리면 그 자국 그대로 남는다. 하지만 눈은 계속 내린다. 녹아도 다시 쌓인다. 녹을 게 빤해도 쌓인다. 핏자국 위에, 발자국 위에 다시 쌓인다. 그 흔적을 지우지 않고, 치우지 않고, 덮어서 희게 만든다. “희어지고 있었다.”(123쪽)


얼어붙은 바람들 사이, 새하얀 웃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31쪽)


그렇게 눈은 죽었거나 파괴되고도 여전히, 어쩌면 다시, 눈일 수 있다. 흰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절망과 희망을 또렷이 바라보는 사람. 절망 아래에 깔린 희망을 잊지 않는 사람. 새하얀 절망 안에서도 흰 입김을 생명의 기운으로, 온기의 증거로 이해하는 사람(72쪽). 


그래서 하얀 웃음이란 겨울의 웃음이다. 다시금 희어질 겨울의 흰색 안에서, 겨울의 차가움 안에서, 그 차가움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포근함의 흔적 안에서, 절망과 희망을 또렷이 품고 웃는 웃음. 세상엔 절망밖에 없다는 냉소와도, 희망만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는 낙관과도 결별하며 절망과 희망을 함께 견뎌낼 때 비로소 나타나는 파르스름한 웃음. 겨울의 새벽에 떠오르는 차가운 해를 바라보는 새하얀 웃음.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129쪽)


흰색, 어딘지 모르게 아득해지고, 어딘지 모르게 아련해지는 색깔. 겨울에 어떤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하얀 산과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나간 것들, 사라진 것들, 아니, 지나감이나 사라짐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내 안의 어딘가에 파묻혀 여전히 존재하는 것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희망과 절망은 꽝꽝 얼어 있다. 불순물이 많아 새하얀 얼음들이 가슴에서 하나씩 굴러 나온다. 조용히 그것을 들여다본다. 공기가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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