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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28. 2023

봄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 이 글은 <기획회의>에 쓴 글입니다. 



겨울을 난 바질을 보며 깨달은 것


몇 년 전부터인지 봄이 반갑지만은 않다. 원래 비염이 심했던 나는 미세먼지가 유독 싫었다. KF94로도 부족해서 아예 방독면 같은 것을 사서 끼고 나간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러나 회색 플라스틱인지 실리콘이 입과 코를 막고 양쪽 볼을 넓고 둥근 분홍색 필터가 덮는 모습은 흡사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빌런인 ‘임모탄’과 같아서, 자주 쓰고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걸 쓰면 머리카락이 눌리고, 입과 코 주변의 선크림이 다 밀렸다. 몇 년째 그 방진마스크는 서랍에 처박혀 있다. 마스크가 이렇게 일상화된 코로나19 이후에도 그 방진마스크는 다소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봄이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다소 예상과 빗나가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식물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내게 봄은 양가적인 계절이다. 봄에 활짝 피어나는 꽃들과 돋아나는 잎들을 보고 있으면 겨울에 떠나보낸 아이들이 떠오르니까. 특히 바질과 같은 식물들은 관리를 정말 잘해 주지 않으면 추운 날씨에 쉽게 죽는다. 어느 날부터인지 빛나는 세상에서도 사라진 것들, 잃어버린 것들,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게 버릇이 되어 버린 나는 푸릇푸릇한 마삭나무 이파리를 보면서 죽은 바질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에는 조금 달랐다. 바질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겨울에 떠나보낸 식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화단에 심어 두었던 레몬이 죽었고, 집에서 기르던 꽤 큰 레몬나무도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그럼에도 강인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바질의 존재감이 이리도 큰 것은 겨울을 나는 데 성공한 바질이 내게 가르쳐 준 교훈 때문이다. 그건 바로 봄이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 의해서 온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존재, 하나의 세상


바질도 나도 단독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는데, 그 연결에 따라 우리의 생은 달라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바질이 플라스틱 화분, 분갈이용 흙, 30년쯤 된 빌라, 시공한 지 몇 년 안 된 샷시, 그 창문과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바람, 그리고 우리 가족과 연결되어 살아갈 때, 바질은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겨울처럼 식물등과 커피 찌꺼기가 여기에 결합하면, 바질은 겨울을 날 수도 있다! 이 모든 요소의 결합, 그리고 바질을 매번 이리저리 옮겨주고 물을 주고 관리하는 아버지와 나의 행위들이 바질에게 봄을 가져다 준 것이다. 


바질이 겨울을 나는 데에 필요한 연결들만 해도 이만큼인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연결은 얼마나 방대할까? 아마 이 지면 전체를 할애해도 아픈 내가 지금과 같이 봄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연결망을 모두 설명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한 명의 아이를 키우는 데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렇게 변형해 보자. 하나의 존재가 봄을 맞이하는 데에는 하나의 세상 전부가 필요하다. 거꾸로 생각하면, 하나의 존재가 겨울을 나지 못하게 하는 데에도 하나의 세상 전부가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봄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연결망을 모두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장면을 그려 보자. 내가 집 밖으로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는 데 필요한 연결망은 무엇일까? 일단 나는 30년쯤 전에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빌라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눈을 뜨고, 가족과 함께 식사 준비를 한다. 수도를 통해 공급되고, 보일러로 데워지는 물로 몸을 씻고, 급한 경사를 걸어 내려가 별다른 조치 없이 버스를 탄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려 계단을 빠르게 걸어 내려가 지하철을 탄다. 친구를 만나면 인터넷으로 맛집을 찾아서 밥을 먹으러 간다. 그리고 귀가할 때는 비슷한 절차를 거꾸로 반복하게 된다. 


여기서 나를 ‘친구를 만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벽돌로 지어진 자유로운 집, 가족, 도시가스, 수도, 보일러, 경사길, 버스, 계단, 지하철, 인터넷, 그리고 맛집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무언가 하나라도 빠진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만약 아침에 나가야 하는데 수도관 이상으로 물이 안 나온다거나,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카드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거나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면 간단하다. 하나의 삶이 만들어지는 데만이 아니라, 내가 그저 친구를 만나는 데에도 온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평범한 삶을 만드는 연결망에 연결될 수 없다면


그런데 이러한 연결망에 연결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언제 일어나고 자고 나갈지 결정할 수가 없다. 가스비와 수도세가 밀렸을 수도 있다. 사는 곳의 문턱만 넘으면 계단과 급경사뿐이라 나갈 수가 없다. 저상버스는 언제 올지 모른다. 지하철역까지 가더라도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승강장까지 내려갈 수가 없다. 목숨을 걸고 리프트를 타거나, 승강장과 열차 사이 간격이 너무 넓어서 바퀴가 낄 위험을 감수하고 지하철에 타야 한다. 아무 맛집이나 갈 수도 없다. 식사는 맛있는 곳이나 분위기 좋은 곳이 아니라, 일단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하는 것이니까.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운동은 작년 출근길 지하철 타기 행동과 이에 대한 서울교통공사, 정치인들의 억압으로 계속해서 뜨거운 화두다. 이동하기 위해 투쟁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사회의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데, 나는 이것을 평범한 삶과 연결의 문제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떤 이들은 이동권 운동에 반대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저 장애인 단체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지하철과 버스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저 장애인 단체는 탈시설 예산을 요구하고 있다. 저들은 심지어 일반 시민들의 일상을 해치면서 이동권이라는 이름으로 그 이상의 과도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진실에 가닿는다. 탈시설은 시설이라는 공간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나오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 평범한 삶의 연결망을 생각해 보자. 내가 지역사회에서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나를 ‘친구를 만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연결망을 누군가는 그대로 활용할 수 없다. 이를테면, 내가 걸어 내려간 계단은 휠체어 바퀴에 저항함으로써 장애인이 버스와 지하철을 탈 수 없게 한다. 시설의 규칙은 시설 밖으로 나가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장애인은 ‘친구를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시설만이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을 시설에 가둠으로써 장애인이 평범한 삶에 연결될 수 없게 만든 온 세상이 이런 상황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동권은 근본적으로 탈시설을 포함해서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시설에서 나가는 건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작년에 도서출판 오월의봄에서 나온 『집으로 가는, 길』은 바로 그 복잡한 책임의 문제를 다룬다. 향유의집이라는 장애인 거주시설이 폐지되는 과정을 다루는 이 책의 절반은 어떤 형태로든 시설에서 일하며 시설 거주 장애인들의 탈시설 과정에 함께한 직원들의 이야기로, 나머지 절반은 탈시설 후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탈시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지역사회는 장애인이 살아갈 수 없는 곳이고, 탈시설은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무모한 행위라고, 시설이 장애인이 살기에 훨씬 안전하다고. 지금의 지역사회가 장애인이 살아가기에 충분히 안전하거나 인프라가 잘 정비된 곳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동권 운동이 필요한 현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언한다. 바로 그렇기에 탈시설 운동은 시설의 문제만이 아니라, 시설을 필요한 공간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사회까지도 겨냥한다. 


장애인이 원래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장애인은 민간의 사회복지법인들과 국가 사이의 결탁 안에서 머릿수와 수당으로 셈되는 존재가 되었고, 장애인들이 머릿수가 되어 시설에 수용되는 동안 지역사회는 그들이 없다는 전제 위에서 건설되었다. 이런 근대화의 역사 안에서 장애인은 시설에 갇혀야 하는 사람으로 규정됨으로써 실제로 지역사회에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의 탈시설 운동이 맞서는 것은 바로 그 역사이자 세상이다. 장애인의 겨울을 끝내려는 것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올 것이다, ‘우리’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서 기억해 둘 만한 이야기는 굉장히 많지만, 그중 내게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직원도 탈시설해야 한다’라는 이야기였다. 책에 나오는 한 직원은 시설 거주인들이 먹는 국이 너무 차서 데워달라고 얘기한 뒤 ‘철이 덜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힌다. 시설에서 최소한의 생존 너머의 무언가를 고려하는 것은 ‘철이 덜 든’ 행위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시설문화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최소한의 생존과 이를 위한 안전일 뿐, 그 이상의 무언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문화. 이런 문화가 당연하게 녹아있는 사회가 바로 시설사회다. 


이러한 맥락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시설을 만드는 사회, 시설이 만드는 사회, 그래서 시설과 사회가 쉽게 구분되지 않는 사회인 시설사회에서 ‘탈시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준다. 시설 안에서는 직원들 또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책에서 한 직원은 한 거주인에게 투여하는 특정 약물의 양을 확 줄여 보았고, 그의 상태는 오히려 좋아졌다. 그는 그때 깨닫지 않았을까, 시설이 안전과 보호라는 이름으로 장애인을 무력화하고 있고, 시설 안에서는 자신도 그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원에게도 탈시설이 필요하다.


거주인들이 인권 침해와 시설 비리를 문제 삼으며 시설 바깥으로의 문을 열어젖혔을 때 금이 간 것은 시설과 지역사회의 경계만이 아니다. 장애인이 시설 안에서만 안전할 수 있다는 관념, 시설이 장애인에게 최선이라는 관념, ‘철 든’ 직원들도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던 바로 그 관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설문화에, 시설사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것이다. 추운 겨울에 서로의 곁을 지키며 봄에 할 일을 미리 준비하고 고민하며 만들어진, 서로와 사회에 대한 통감으로 만들어진 ‘우리’가, 봄이 오게 할 것이다. 꽃봉오리가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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