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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28. 2023

모든 것은 제자리에

<분해의 철학>

* 이 글은 <기획회의>에 쓴 글입니다.



제자리에 있지 못한 것


날씨가 순식간에 더워졌다. 확 더워졌다가 비가 쏟아진 뒤 쌀쌀해지는, 비가 자주 내려서 꽃잎이 빠르게 떨어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개인적으로 여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땀이 많은 체질이라 그런지 더위를 잘 못 견딘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세게 틀자니 낮은 면역력과 함께 사는 식물들 때문에 소심해진다. 아무리 더워도 버스나 지하철 때문에 외출할 때 겉옷은 필수다. 하지만 더위보다 더 싫은 게 있다. 바로 음식물 쓰레기에서 나는 냄새와 파리 떼다. 먹고 남은 음식이 썩는 냄새, 거기에 달려드는 벌레들. 사람들은 여름의 온도를 ‘쪄 죽는다’라고 표현하지만, 음식물 쓰레기의 관점에서 여름의 온도는 ‘썩기 딱 좋은’ 온도다.


우리는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무언가를 더럽다고 느끼는 건 본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생은 지극히 문화적으로 구성된다. 『순수와 위험』을 쓴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더럽다’는 감각이 어떤 사물이 ‘제자리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는 집 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신발이 신발장에 있을 때, 우리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신발이 식탁 위에 올라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얼른 치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발이 ‘제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발이 더러운 것은 거기에 흙이 묻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놓여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부패를 몰아내기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라는 위생의 이분법은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내가 이걸 가장 많이 느끼는 곳은 식물들이 있는 베란다 근처, 그리고 부엌이다. 집에서 식물, 흙, 물, 그리고 벌레는 화분 안에만 존재해야 한다. 이것들이 화분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는 ‘청소’를 해야 한다. 그래도 식물 근처에서는 흙이 떨어져 있거나 벌레가 돌아다니는 것이 익숙해졌다. 식물과 함께 살면서 집이라는 공간의 암묵적 규칙이 변한 것이다. 약간의 흙이나 물이 떨어져 있는 것 정도는 괜찮다. 그 정도는 ‘제자리’의 규칙을 해치지 않는다.


부엌은 나와 가족의 입으로 들어갈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기 때문에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음식과 닿아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는 강력하다. 모든 것은 정해진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릇은 선반에, 칼은 싱크대 아래 칸의 칼집에, 수저는 수저통에, 그리고 먹고 남은 음식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이때 음식물 쓰레기통은 다 채워지면 얼른 비워져야 한다. 부엌에서 더러운 냄새, 썩는 냄새가 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에는 더욱 빨리 치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리와 곰팡이로 부엌이 난리가 난다. 냉장고에 넣은 지 오래되어 썩는 것들, 음식물 쓰레기통 안에서 썩는 것들은 얼른 치워져야 한다. 냄새로 등장하는 부패는 부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제자리’는 부엌 바깥, 집 바깥이다. 부패는 안 보이는 곳으로 유폐된다.


분해함으로써 다시 가치를 얻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토록 일상에서 지워내고자 하는 부패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다. 농업기술사, 음식사상사, 환경사 등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며 활동하고 있는 일본의 학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분해의 철학』이라는 책에서 부패의 개념을 ‘분해’로 좀더 일반화한다.


어떤 사물의 속성이나 기능이 다 소진되어 마침내 그 사물이 사라져 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것에 흡수되고 이용되는 것을 생태학에서는 ‘분해’라고 부른다. 부패도 분해의 일종이다. 음식물 쓰레기는 일상 속에 수없이 많은 분해의 과정 중 유독 눈에 띄는 사례일 뿐이다. 후지하라 다쓰시는 나무블록부터 쇠똥구리까지, 한 번에 묶이기 어려워 보이는 사례들을 ‘분해’라는 이름으로 묶어내면서, 분해를 우리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로 자리매김한다.


후지하라는 어릴 때 살던 주택가를 청소해 주던 청소 아저씨를 떠올린다. 그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이는 그의 친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청소를 하다가 주운 쓰레기들이 그에게는 그저 쓰레기가 아니었다. 그는 주운 것들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고 조합하여 장난감을 만들어 내는 손재주가 있었고, 아이들은 이를 동경했다. 이처럼 청소 아저씨는 “쓰레기가 되어 사회적 가치를 박탈당한 것을 다시 한 번 사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재조립하여 그것의 연명을 성취”한 것이다.


여기서 ‘쓰레기’라는 이름은 어떤 사물의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그것은 물건의 이름이기보다, 사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었거나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연소되거나 땅에 묻히는 상황을 이르는 말에 가깝다.(19쪽) 그러니 분해란 한편으로 쓰레기를 다른 사회적 관계 안으로 끌고 들어감으로써 그것에 다시금 가치를 부여할 가능성을 마련해 주는 일인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존재들이 바로 ‘분해자’다. 분해자들은 인간사회에서 더럽다거나 역겹다는 식의 낙인이 찍히는 것들, 이를테면 썩는 것들을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존재로 전환한다.(346쪽)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분해자는 곰팡이나 벌레일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청소 아저씨까지도 분해자에 포함되듯, 분해를 부패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할 때 분해자의 개념 또한 넓어진다. 사실 생태계에 속한 생명체 중 분해자가 아닌 것을 찾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먹고 싸는 행위가 그 자체로 분해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따라 형태가 다를지언정, 먹고 싸지 않는 생명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먹음으로써 반강제적으로 분해 과정에 속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사람에게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혀와 치아와 식도와 위장과 십이지장과 소장과 대장과 그 외 다양한 소화 기관 및 거기서 분비되는 소화 효소, 그리고 특히 대장 속에 사는 무수한 장내 세균”을 활성화하는 일이며, 따라서 인간 자신 또한 미생물에게 ‘사용’된다는 자연스러운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71쪽)


축적이 아닌 분해로서의 지속 가능성


이처럼 『분해의 철학』은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포함시키면서, “우리가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파열의 과정, 즉 분해의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뭔가가 쌓이거나 만들어지는 것은 분해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덧셈이나 곱셈이라기보다는 뺄셈이며 나눗셈인”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다.(32쪽) 살아가는 것이 아닌 썩어가는 것, 단단히 묶어내는 것이 아닌 서서히 풀어지는 것, 쌓아 올리기보다 묻히고 사라져 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분해의 사유는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뒤집길 요구한다.


몇 년 전부터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사방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기후위기와 환경 파괴 등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더는 지속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함께,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을 함축하는 단어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에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낀다.


‘지속 가능성’이나 ‘ESG’, 심지어는 ‘녹색성장’과 같은 이름으로, 지금껏 세계를 파괴해 온 바로 그 발전의 논리에 다시 인류의 지속을 맡기는 건 찬란한 희망으로 포장된 파괴의 순환을 불러오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우리를 에워싼 세계 안에서 계속되는 분해의 고리 안에 있을 뿐이다.


원래 순환이나 지속가능성이라 불리는 현상은 그런 반들반들하고 반짝거리는 현상이 아니라, 거칠고 누덕누덕하며 껍질은 벗겨지고 알맹이는 튀어나와 대단히 가혹하고 마구 북적이며 악취가 물씬 풍기는 현상이다. 그로테스크하기 그지없는 것임과 동시에 미생물이나 곤충 같은 작은 분해자들이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고집스레, 그리고 부리나케 해내는 바지런함의 정수 같은 것이기도 하다. (26쪽)


『분해의 철학』에서 말하듯, 삶의 순환과 지속 가능성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현상이다. 물론 인간은 생명체이고, 생명체는 자신을 구축하고 유지하고자 한다. 생명체 중에서도 인간은 특히 더욱 ‘분해에 저항하는 세계’를 만들어 내고자 애쓴다. 분해에 저항하며 다음 세대의 생명을 산출하는 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생명의 일일 테다(125쪽〜126쪽).


그러나 우리는 생명이라는 것이 분해 과정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먹는 행위는 다른 분해자들을 활성화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분해와 구분하기 힘들다. 초기 인류에 대한 가설 중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남성 사냥꾼-여성 채집자 가설’이다. 남성들은 덩치 큰 짐승을 사냥하고, 여성들은 작은 동물이나 열매 등을 주로 채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가설이 등장했다. 바로 ‘스캐빈저 가설’이다. 이때 스캐빈저는 생물의 사체를 먹이로 하는 동물의 총칭으로, 구더기와 하이에나, 까마귀가 대표적이다. 스캐빈저 이론의 핵심 주장은 인간 또한 스캐빈저라는 것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육식동물들이 먹고 남긴 뼈에 붙은 고기를 한발 늦게 가서 뜯어먹으며 생존했다. 사실 우리는 죽은 것, 썩어가는 것, 쓰레기를 먹는 존재다. 이러한 인정은 우리의 존엄을 전혀 갉아먹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썩는 냄새, 지속되는 삶의 희망


부패하지 않는 것이 떠받쳐주고 있는 한, 그 기반 위에 서 있는 사회는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다. (66~67쪽)


우리는, 세상은, 썩을 수 있기 때문에 지속된다. 우리는 서로를 먹고, 소화시키고, 소멸시키기에 지속된다. “온갖 생물들이 떼로 달라붙어 먹어 치우는 잔혹하고 소름 돋는 떠들썩함”, 하나의 기능만을 지닌 요소를 모든 존재들에게 영향을 주는 작용을 지닌 요소들로 변화시키는 “분해의 향연”은 모든 곳에서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다.(346쪽) “생선장수에 의해 생선에서 분리되어버린 (미생물들이 엄청 좋아하는) 내장처럼, 소의 소화기관으로부터 떨어진 (미생물이 듬뿍 담겨 있는) 분뇨처럼” 제자리에서 분리된 것은 온갖 “극미한 생명과 그들이 서식하는 집을 활성화하고 영양으로 가득 채운다.”(216쪽)


어떤 것도 더럽지 않다. 냄새나는 그것들이 바로 우리의 삶이 지속된다는 희망이다. 쓰레기가 빠르게 썩는 계절에, 부엌에서 냄새가 나고 파리가 꼬이는 계절에 『분해의 철학』을 읽자. 실로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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