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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28. 2023

미래는 _____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한윤정, <The Future is Red>. 2021, 3D 프린팅 조각

“Now you need a half ounce of Madeira syrup.”


작년부터 흥미를 붙여서 보고 있는 술 관련 유튜브 채널 중 최근에 발견한 것은 ‘Zero Waste Cocktail’을 지향하는 한 백인 남성의 채널이다. 라임이나 레몬처럼 칵테일을 만들 때 자주 들어가는 과일에서는 보통 기껏해야 열매 하나에 1온스, 즉 30밀리리터 정도 나온다. 그는 한 알에서 빼낼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의 과즙을 뽑아내겠다고 구연산과 사과산 등을 활용해서 통상적인 과즙의 약 여덟 배나 되는 과즙을 뽑아냈다. 시도해 본 결과, 이는 꽤나 효과적이었다.


‘마데이라’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건 그의 채널에서였다. 설탕과 물을 1:1 혹은 2:1로 섞은 ‘심플 시럽(simple syrup)’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항상 ‘마데이라 시럽’을 먼저 사용했다. 그런 이름의 시럽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고급스러운 윤기가 도는 짙은 갈색의 마데이라 시럽은 꽤 탐났다. 그리고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를 읽고 나서, ‘마데이라 시럽을 애용하는 제로 웨이스트 지향 백인 남성 유튜버’는 꽤나 기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렴한 것’의 문제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자본주의의 태동부터 발전까지를 세계의 수많은 사례를 통해 보여주면서, 그 핵심에 ‘저렴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이분법과 한 뿌리에서 나온 ‘인간/문명/사회’와 ‘자연’이라는 이분법,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수많은 이분법이 앞서 언급한 자연, 돈, 노동, 돌봄, 식량, 에너지, 생명을 저렴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리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일곱 가지의 저렴함에 질문하는 것이야말로 곧 자본주의의 근간에 문제를 던지는 일이라고.


저자들은 ‘저렴한 것’을 “자본주의가 위기를 관리하고 생존하기 위해 채택한 전략이자, 추상적인 것들을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수완이며, 저렴한 자연이라는 원죄에서 생겨난 독립적인 존재”라고 규정한다(44). 이야기는 식민주의, 문명화, 개발, 농업, 도축업, 석유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의 기틀을 이루는 산업과 역사로 뻗어나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렴한 것들’ 중 어느 것도 원래 저렴하지 않으며, 그것은 일방적인 식민주의적 규정을 통해 저렴해졌거나, 그러한 규정을 통해 가능해진 착취적 생산방식 안에서 비용이 외부화됨으로써 저렴해졌다.


자본주의는 항상 발전을 통한 풍요를 약속하는 듯하다. 그러나 생활과 노동에 필요한 열량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실질 임금을 통해 서기 301년 로마 제국의 생활수준(standard of living)이 중세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산업혁명 시기의 유럽의 생활수준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분석한 연구를 고려한다면(Allen, 2007), 누군가가 점점 발전하여 더욱 풍요를 누리고 있을 때 다른 한편은 점점 더 저렴해지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


부재 지시대상과 쓰레기


‘외부화’를 통한 ‘저렴화’는 한편으로 아담스가 육식의 문제에서 도살의 기능을 분석하면서 제안하는 ‘부재 지시대상(absent referent)’의 개념을 상기한다. 도살은 동물의 이름과 신체를 소거하고, 수요와 용도에 따라 분절된 고깃덩어리로 살아 있는 동물을 대체한다. 이를 통해 고기를 먹는 행위에서 동물이 부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부재 지시대상은 독립된 실체로서 동물을 망각하도록 만들고, 그런 동물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아담스, 2006: 81) 마찬가지로, 쓰레기 처리나 자원 마련의 비용을 떠넘기며 전 세계를 속속들이 각기 다른 용도로 저렴하게 착취하는 (금융/글로벌) 자본주의의 효율은 도시에 살아가는 이들이 저렴한 것들의 본래 모습이나 본래의 값(value/price)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모든 것은 생산 공정과 유통 체인의 일부분일 뿐이다.


쓰레기. 그것은 자본세의 핵심이다.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제국이 토착민을 착취하고, 절멸시킨 것이 자본세의 언어로는 ‘개발’이라고 말한다(91). 실제로 경제학에서 쓰레기는 단지 비용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쓰레기는 그것의 처리 비용으로, 즉 음의 효용으로 계산되어야 할 것 같지만, 경제학은 쓰레기를 그에 따라 발생하는 쓰레기봉투의 판매/소비로 환원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요소로 계산한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의료 소비와 수리 자재 소비로 환원되는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쓰레기는 ‘프런티어’로 외부화되고, 쌓인다. 식민주의 시대의 프런티어가 표면적으로도 분명한 폭력과 갈취로 드러났다면, 현대의 프런티어는 생산한 것을 저렴한 값에 빼앗긴 후,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비용까지 덮어 쓰는 형태로 드러난다.



시사 주간지 <시사IN>의 2020년 12월 30일 사진 기사 “〈2020 올해의 사진〉 쓰레기의 ‘귀환’”​에서는 위의 사진을 두고,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쓰레기를 배출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배출’이라는 단어는 쓰레기가 생산물이 아닌 생산의 부산물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틀렸다. 쓰레기는 그 자체로 생산된다. 하나의 상품을, 서비스를 생산할 때, 우리는 언제나 쓰레기를 함께 생산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쓰레기를 배출하는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인간이다(사실상 여기서 ‘생산’과 ‘쓰레기’는 잘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 쓰레기가 도시에서 먼 곳에, 혹은 도시 안에서도 외진 곳에 감춰지도록 하는 것.


현대의 프런티어는 국경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 바깥은 모두 생산 과정에 포함된 존재들을 부재 지시대상으로 만드는 프런티어가 되어 간다.


발전국가 대한민국과 시설이라는 프런티어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에 따르면,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배할 때 ‘토착민’이라는 범주를 발명하여 정착민이 가진 것과 다른 종교, 종파를 이 범주에 넣고서 감독, 운영했다. 이를 통해 인도인의 삶은 영국인의 뜻에 따라 정의되고, 지배되었으며, 인도인의 생명은 저렴해졌다(262). 이는 제국 일본이 미크로네시아를 점령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토인’이라고 정의한 후, ‘게으름’, ‘방종’ 등을 토인의 특성으로 규정하여 이를 교정하고 노동력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과도 비슷한 전략이다(토오루, 2013).


‘토착민’과 ‘토인’이라는 범주는 한편으로 발전국가 시기 대한민국에서 활용된 ‘부랑인’이라는 단어를 상기한다. 일제강점기부터 그 모호함을 무기로 식민 통치에 활용된 ‘부랑인’은 어떤 생명들을 ‘저렴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정부는 ‘부랑인’을 저렴하게 만들어서 복지 예산을 아꼈고, 이를 통해 발전과 풍요를 이룩했다. 당시에 정부는 부랑인 시설의 수익사업과 수용자 인권 침해를 막지 않았고, 수용자들이 지역사회로 복귀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는 비용의 최소화와 거리를 ‘정화’하겠다는 목표 사이에서 이루어진, 공적 개입의 부족을 민간 영역과의 탈법적 관계로 채우며 부랑인들을 철저히 도구화하는 과정이었다(추지현, 2021: 99-104; 김일환, 2021; 소준철, 2021: 166-183).


‘장애인 문제’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발견된다. 이승만 정부 당시 상이군인 단체들은 비공식적으로 미군 부대 폐기물 처분권, 공설시장 관리권, 버스 배차 업무, 혹은 정부가 요구하는 ‘청부 폭력’(판자촌 철거 등)과 같은 ‘이권 사업’에 개입함으로써 생존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한국 복지정책의 시초가 되는 이승만 정부의 상이군인 원호 정책은 원호 대상자의 수를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이를 위해 일부 상이군인 단체에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이권을 배분한 국가에 상이군인 단체도 순응하면서 둘 사이의 공모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하금철, 2020: 302-303).


이러한 역사에서 장애인을 포함한 부랑인을 수용한 시설은 ‘대충 오물인 것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실제 오물’로 만드는 공간이었다. 그러한 시설의 가장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인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언론과 정책, 법령 모두에서 범죄자, 구호 대상으로만 그려지거나 그저 삭제되어 버렸다. 나아가 복지원 내부의 폭력은 이들을 정말 “‘부랑인’의 행색으로, 부랑인이라 말해도 저항할 수 없는 이들로 만들어” 버렸다(박해남 2021: 67, 75-79).


요컨대, 발전국가 시기 대한민국은 ‘부랑인’이라는 범주를 부활시켜 도시를 ‘정화’했고, 거기서 ‘치워진’ 생명들은 시설로 끌려 들어갔고, ‘아직 치워지지 않은’ 생명들은 판자촌 철거처럼 다른 생명들을 ‘치우는’ 현장에서 저렴하고 폭력적인 노동을 통해 국가의 예산을 아껴주었다. 이들은 시설, 혹은 다른 저렴한 현장이라는 프런티어에서 국가가 정의한 대로 ‘부랑인’, ‘저렴한 생명’의 행색을 실제로 갖추어 갔다.


위험사회와 불태우는 인간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표지에 적힌 말마따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싸구려로 만들며” 비용을 감춰왔다. 무엇이 어떻게 싸구려로 만들어지는지도 알 수 없도록 하는 착취와 쓰레기의 사슬은 자연, 돈, 노동, 돌봄, 식량, 에너지, 생명을 독자적인 실체나 그 자체로 다양성을 지닌 무엇이 아니라 생산 체인의 일부로 포섭함으로써 부재 지시대상으로 만들었고,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프런티어는 당장 발전국가 시기 대한민국의 ‘시설’ 문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본세의 원리가 자본주의일지언정, 그것의 효과는 위험사회를 통해 함께 파악되어야 한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기본적으로 19세기 봉건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한 과정을 근대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특히 이때의 근대화는 자연에 대항하는 ‘문명’으로서 등장했다. 즉, 자연을 모두 이해하고 통제하고 지배하여 이용할 수 있다는 것, 그러한 맥락에서 ‘산업사회’가 등장하는 과정이 바로 근대화였다(벡, 1997: 40). 이는 (근대화의 정확한 시작 시점에서는 논쟁이 있겠으나)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가 분석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둘 사이의 핵심적 차이는 ‘자연’에 대한 지금의 관념에 대한 인식에서 드러난다. 벡은 “21세기의 문턱에 서 있는 오늘날, 발전된 서구세계에서 근대화는 그 타자를 소비하고 상실”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타자’는 바로 ‘문명’ 이전의 단계인 ‘미개’ 혹은 ‘전통사회’인데, 타자는 20세기 말에 이르러서 자연과 사회의 관계가 재설정됨에 따라 사라졌다. “자연이 더 이상 사회의 외부로, 또는 사회가 자연의 외부로 이해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벡, 1997: 143). 20세기 말의 자연은 문명이 정복할 대상이 아닌, 문명을 지탱하는 동시에 문명에 의해 위태로워진 “문명세계의 내부 장식”이 되었다(벡, 1997: 144). 자연은 전적으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성질을 띠게 되었고, 이러한 “자연의 사회화의 보이지 않는 부수효과는 자연의 파괴와 자연에 대한 위협의 사회화”다(벡, 1997: 144).


바로 여기서 ‘위험사회’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벡은 “(산업적) 위험사회의 개념은 문화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 ‘자연’에서 출발하며, 그것이 입은 상해는 변형되어 사회적 하부체계에 그 상흔을 남긴다”고 말하는데, 이는 자연과 사회가 서로의 외부가 아니게 된 상황이 자연의 파괴가 사회 구조에도 피해를 주는 구조임을 의미한다(벡, 1997: 144). 즉, “근대성이 선진적인 상태에 이른 곳에서는 […] 사회는 더 이상 자연에서 자율적이지 않다”(벡, 1997: 145). 자연을 착취하고, 자연에 외부화해 온 ‘저렴함’이 ‘위험’이 되어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설탕 산업은 마데이라를 불태웠다.”(215) 그러나 태워진, 혹은 태워지고 있는 것은 마데이라만이 아니다. 글의 맨 앞에 삽입한 사진은 2021 아르코 융복합 예술 페스티벌 <Nothing Makes Itself: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에 한윤정 작가가 전시한 <The Future Is Red>라는 작품의 일부분이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대한민국에서 기후위기에 의해 발생한 산불에 대한 데이터를 인터랙티브 아트와 재활용 필라멘트로 제작한 3D 프린팅 조각으로 보여준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도구가 고장 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그 자체로 들여다보게 되고, 이때 도구는 사물로 인식된다고 말한다. 사물이 아니라 용도를 바로 보려면, 사물은 투명해야 한다. 투명하게 인쇄된 한반도와 미국 캘리포니아의 땅은 ‘저렴한 자연’의 은유일까. 빨간 기둥으로 인쇄된 산불의 데이터는 비로소 그것이 솟아오르는 땅을 바라보도록 한다.


위험사회가 불러온 기후위기에 따라 발생한 산불만이 아니라,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생산과 화재의 현장들은 어쩌면 이미 역사 내내 그 자체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당신들이 태우고 있는 것을 보아라, 그 땅은 영영 투명하지 않고 당신들의 미래는 붉게 불타오를 것이다. 우리는 쓰레기를 생산하는 인간이기 이전에, 불태우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배에서 지배와 억압으로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는 이러한 문제들을 분배의 문제로 해결하고자 한다. 저자들은 “돌봄, 토지, 노동을 재분배해 모두에게 자기 삶을 개선하고 자신을 둘러싼 생태를 개선하는 데 기여할 기회를 제공”하여 자본주의의 폭력을 원상 복구할 수 있는 ‘보상 생태’라는 비전을 제시한다(66). 결론부에서도 다양한 키워드를 제시하지만, 그 핵심에 있는 것은 ‘재분배’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충분할까? ‘저렴한 돌봄’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제를 자원의 분배로 환원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자본주의 체제를 상대로 돌봄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종식을 요구하는 것”(180)이라는 문장은 일견 설득력 있지만, 돌봄의 사회화가 돌봄의 여성화로 이어지는 상황들을 보고 있으면 임금의 지불은 충분한 해결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책에서 말하는 남성-여성의 이분법, 인간/사회/문명-자연의 이분법은 재분배로 해결되지 않는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사회정의의 문제를 분배의 문제로 축소하는 분배 패러다임이 (1) 사회정의를 물질적 재화의 할당이나 사회적 지위의 배분 문제로 환원하고, (2) 그러한 배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구조와 제도적 맥락은 간과되기 쉽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부정의를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와 억압의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억압이란 “물질적인 박탈이나 편향된 분배를 포함”하면서도,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사회적으로 인정된 환경에서 좋은 기술들을 익히고 사용하는 것을 막는 제도적 과정 체계”를 의미하고, 지배란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할지 결정할 때”, 또는 “행위 조건들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게 금제하거나 막는 제도적 조건들”을 의미한다(영, 2017: 52, 99).


이처럼 패러다임을 분배에서 지배와 억압으로 바꿀 때, 우리는 이분법이 야기한 경제적 불평등을 넘어 제도화된 이분법 그 자체를 타격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붉게 타오르는 미래 대신,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보다는 나은 어떤 미래가 열릴지도 모른다.





김재형·박해남·추지현·김일환·소준철·곽귀병·이상직·최종숙, (2021) 『절멸과 갱생 사이』,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벡, 울리히. (1997) 『위험사회』, 홍성태 역, 서울: 새물결

아담스, 캐럴 J. (2006) 『육식의 성정치: 페미니즘과 채식주의 역사의 재구성』, 이현 역, 서울: 미토

영, 아이리스 매리언 (2017) 『차이의 정치와 정의』, 김도균·조국 역, 서울: 모티브북

토오루, 사카노 (2013) 『제국일본과 인류학자』, 박호원 역, 서울: 민속원

하금철, (2020) “‘앵벌이 장애인’의 외침은 어디로 갔는가: 1980~1990년대 영세 장애인 문제와 장애인운동의 대응,” 『기억과 전망』 42: 295-347

Allen, Robert C. (2007) “How Prosperous were the Romans? Evidence from Diocletian’s Price Edict (301 AD),” Economics Series Working Papers 363, University of Oxford, Department of Econo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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