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 루이 알튀세르 (최원)
* 나는 이전에 알튀세르에 대한 글을 전혀 읽어 본 적이 없기에 이 글에 대한 이해에 심대한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나, 일단 읽은 내용이 매우 흥미로워서 정리할 요량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해당 글에서 정리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분석을 내 나름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바깥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호명함으로써 주체를 생산하고, 호명된 주체는 자신이 언제나 주체였던 것처럼 착각하는 목적론적 전도를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이데올로기 뒤로 숨고,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결과로서의 주체는 호명에 응답할 수 있는 원인으로서의 주체가 된다. 이것이 '주체효과'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서로 관련 없던 요소들이 역사적 계기 속에서 우연히 마주쳐 관계를 맺음으로써 특정한 효과를 생산하는 '돌발'로서의 '사회효과'다.
브뤼노 라투르가 알튀세르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음에도, 실험실과 사실의 생산에 대한 라투르의 논의는 이와 다소 흡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도구들의 물질적 배치로서의 실험실에서는 사실을 생산하고, 생산된 사실은 그것이 언제나 사실이었던 것처럼 과거를 다시 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무언가를 설명할 수 있는 전제나 근거, 즉 원인이 된다. 즉, 실험과 기입의 '결과'인 사실이 블랙박스가 되면 '원인'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사실이라는 블랙박스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물질적 배치로서의 실험실이다. 그리고 실험실이라는 물질적 배치는 사실이 만들어진 뒤에 사실 뒤로 숨는다.
이 두 사람의 사상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논의를 통해 라투르의 논의가 지니고 있는 난점을 발견할 수는 있다.
이데올로기적 동일화, 혹은 주체효과에는 항상 공백이 남는다. 최원은 이를 '이데올로기의 배꼽'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배꼽은 자신이 누군가의 뱃속, 즉 타자로부터 나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스스로를 낳은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의 작동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점을 증거하는 바로 이 배꼽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고 있는데, 알튀세르는 바로 이 배꼽이 외부의 실재를 지시하는 하나의 징후라고 보았다. 그 외부의 실재는 "이질적인 심급들 내지 실천들의 복잡한 절합으로서의 사회적 전체이자,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계급적대의 구조"다. 이데올로기는 그 안에 포함되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이 복잡한 전체를 주체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적 구조로 전도시키거나 또는 환원"시킨다(230).
그래서 알튀세르에게 저항이나 반역은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외부, 이데올로기의 타자로서의 실재의 침입을 무대 위에 조직하는 것"(232)에서 시작된다. 그에게 진정한 저항은 갈등을 구성하는 몇몇 가능한 위치들 가운데 하나를 차지함으로써가 아니라, 기존의 허구적인 대립구도를 깨고 그 대립구도 자체의 진정한 타자로서 '실재'를 무대의 중심에 가져다 놓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이데올로기 내에 어떤 균열과 공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또는 이미 이데올로기 안에 있지만 동시에 주체에 의해 부인되는 그 공백을 가시적으로 만들어주는 것"(234~235)이다. 저항은 이데올로기의 내부에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배 계급의 것이라면, 그 안에서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발리바르는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힘을 얻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들의 광범위한 인정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배 이데올로기는 '모두', 즉 보편의 행복과 평등, 자유와 같은 것을 외치게 된다. 그래서 피지배자들은 적대가 가시화되어 이데올로기에 저항할 때도 이데올로기의 바깥으로 탈출함으로써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서 있는 이데올로기 안의 바로 그 자리에서 보편성을 실현하고자 싸우게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오히려 이데올로기가 자신에게 부여한 보편성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고자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형태가 된다.
앞서 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실험실에, 이데올로기 혹은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사실에 대응시켰다. 주체효과에 항상 공백이 남듯, 사실이 블랙박스가 될 때도 항상 틈새가 발생한다. 블랙박스는 언제나 새고 있다. 그러한 틈새는 사실이 실험실이라는 물질적 배치 안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혹은 주어진 진리나 자연이 아니라 인공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배꼽이라고 볼 수 있을까?
블랙박스에는 언제나 다수의 틈새가 존재하며, 블랙박스를 이루는 행위자들은 언제나 이것을 유지 보수함으로써 감추려고 애쓴다. 즉, 블랙박스의 틈새가 배꼽이라고 한다면, 그 배꼽은 블랙박스가 단지 다른 행위자들에 의해 조립되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것이 계속해서 다른 행위자들을 요청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라투르의 경우에 '배꼽'이 지시하는 것은 '외부의 실재'가 아니라, 블랙박스의 경계를 유지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경계 안팎의 행위자'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알튀세르와 라투르가 명백히 다른 지점인데, 알튀세르는 '전체'를 상정하고 라투르는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라투르의 난점이기도 한데, 이론적으로 전체 혹은 바깥을 상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일단은 평평한) 연결망의 형태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지언정, 우리가 모든 행위자를 영원히 따라갈 수도 없고, 모든 행위자가 진공 상태로부터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이야기인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사회적 전체, 그리고 계급적대의 구조 안에 놓여 있다면, 블랙박스는 어디에 놓여 있는가? 연결망이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할 때, 블랙박스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행위자들의 역사가 복잡하게 엉켜 만들어진, 그리고 블랙박스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또 하나의 망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블랙박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행위자들의 역사는 뒤엉키며, 그러한 뒤엉킴이 블랙박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온갖 번역을 가능하게, 또 성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블랙박스의 표면은 행위자들의 뒤엉킨 역사가 된다.
블랙박스의 배꼽, 즉 블랙박스가 새는 지점, 사실이 구성되었고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현시하는 바로 그 증거들은 블랙박스의 외부로서의 역사를 지시한다. 왜 그런가? 블랙박스가 새는 이유, 블랙박스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떻게' 지금도 구성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행위자들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 역사란 각 행위자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 사이의 번역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장면들에서 일부분씩 포착될 뿐이다.
이때 역사는 단번에 전체로서 포착될 수 없으며, 오히려 행위들이 이루어지는 순간들에 계속해서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행위를 설명하는 원인이 되었다가,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과가 되기를 반복한다. 사회적 전체, 그리고 계급적대의 구조가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는 다소간 선형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행위자들의 역사는 실험실을 통해 사실을 생산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을 이루는 모든 행위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다시 쓰인다. 블랙박스의 배꼽이 지시하는 것은 매 순간 변화하는 역동적인 경계로서의 역사인 것이다.
행위자-연결망-이론에 역사를 도입하는 것은 행위자를 덜 쫓아가겠다는 체념도 아니고, 행위자들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행위자-연결망들이 매 순간 시간을 (다시) 구성하고 있는 역동을 살피고, 행위들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행위들의 엉킴을 보겠다는 것에 가깝다. 이는 시작점부터 쫓아갈 수 없는 더 많은 행위자들과 블랙박스를 행위자-연결망-이론으로 분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오히려 이론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혹은 이데올로기 내부로부터의 저항, 혹은 이데올로기적 반역에 대응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라투르에게 '저항'은 특별한 방향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약자로부터 강자를 향하는, 혹은 피지배계급으로부터 지배계급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행위자에 의해 온전히 통제되지 않는 모든 행위자의 본성을 지칭한다. 즉, 저항에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조건이 필요한 편은 통제이고 지배다. 블랙박스에 항상 틈새가 남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라투르는 '저항'에 대해 특별히 설명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저항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그것은 번역이 필요한 원인이고, 블랙박스에 틈새가 남는 원인이다. 하지만 통제와 지배의 기제가 강해졌을 때, 즉 특정한 행위자들에 대한 번역이 아주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만큼 특정한 블랙박스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면, 저항은 단지 원인이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항이 일어나는 상황은 분명 '설명'이 필요한 것으로서, 저항은 원인이 아닌 결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행위자들과 행위들이 특정한 계기 안에서 우발적으로 만나 관계를 맺고 특정한 효과를 산출하게 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블랙박스의 경계와 내부에서 블랙박스를 해체하게 되는가?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그러한 '돌발'로서의 '사회효과'가 아닌가? 행위자의 행위들 사이에는 또 다른 행위들과 행위자들만이 아니라 분명 수많은 우연이 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우연은 한편으로 라투르가 모든 실재의 본성으로 전제하는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인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장치의 작동과 효과를 분석하기 위해 사회효과를 이야기했다면, 나는 여기서 거꾸로 확립된 사실에 대한 저항을 분석하기 위해 사회효과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라투르와 알튀세르 사이의 차이는 '우연성' 혹은 '우발성'이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역사적 계기 속에서 우연히 특정 요소들의 결합으로 인해 돌발하는 것과 달리, 블랙박스는 무수한 의도적인 번역을 통해 간신히 구성된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피지배자와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의 관계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필연적이라면, 블랙박스 안에서 저항이 일어나는 것은 행위자들이 번역으로 모두 통제할 수 없는 무수한 우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연이라는 것 자체의 필연성이라는 역설적 속성 때문에 다시금 저항을 원인으로 자리매김시킬 위험을 내재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우연은 왜 통제되지 못했는가'라는 지점이 될 것이다. 우연은 필연적이지만, 모든 우연이 저항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연이 통제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우연은 저항이 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우연이 돌발할 수 있는 틈새를 점차 늘려나가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것은 행위자들의 아주 구체적인 번역 과정을 쫓아갈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