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룩 Jul 09. 2023

최선의 비극과 읽기의 윤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과 임솔아 장편소설 『최선의 삶』

영화 <어느 가족>(2015) 후반부 中 할머니 시신 유기와 쥬리 유괴 혐의를 쓰고 경찰에게 취조당하는 노부요의 얼굴. 평소보다 헝클어져 부스스한 머리, 진하고 탁한 녹색 라운드 티셔츠. 눈물이 닦여 나간 오른뺨이 햇빛을 받아 옅게 빛난다. 카메라를 말없이 응시하는 노부요의 두 눈. 회색 벽과 낡은 라디에이터.


Ⅰ. 구석을 향한 주움


“버린 게 아니라고요.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 노부요, 경찰 진술에서.
“창고에 있는 물건들은 언제나 버려진 것처럼 보이므로 주워오는 거라고 했다. 아람은 나를 주워온 고양이처럼 대했다. 소영과 싸웠던 그날부터 쭉, 아람은 나를 버려진 고양이처럼 대했다. 집을 나가자던 아람의 제안이, 나를 주워가기 위한 것이었을지 몰랐다.” (강이, 139)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2015)에서 노부요는 할머니의 시신 유기 혐의로 경찰 취조를 받을 때, 할머니의 시신을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거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남편이 남기고 간 집에서 자신의 연금으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 노부요는 원래 술집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의류 세탁 업체에서 일하는데, 술집에서 일할 때 손님으로 만난 남자와 부부처럼 이곳에서 함께 지낸다. 할머니는 이들과 꽤 행복하게 지냈고, 그 집에서 지내던 6명이 모두 함께 바다에 놀러갔다 온 날 밤에 자다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섯 명의 식구 중 혈연이든 무엇이든 법적인 관계로 이어진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민간복지사가 방문할 때마다 할머니는 식구를 숨겨야 했다. 그런데 어떤 사건으로 인해 이 가족의 이야기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고, 이들은 법과 뉴스의 언어에서 할머니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유기한 용의자가 되어 있었다. 왜 할머니의 시신을 버렸냐는 경찰의 질문에 노부요는 대답한다.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거라고. 그렇다면 버린 사람은 따로 있지 않겠냐고.


‘사회적 버림의 공간(zones of social abandonment)’에 관한 논의들은 ‘환대(hospitality)’의 이면에 존재하는 배제와 축출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구조적 맥락을 지적한다. 어떤 죽음들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며,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은 비가시적인 공간에 버려지기까지(abandoned) 다양한 도덕적, 정치경제적 메커니즘과 얽힌다. “사회적 버림의 공간은 글로벌과 로컬,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국가와 가족 등 여러 층위의 변화가 수렴하는 지점에서, 여러 사회적 논리의 날실과 씨실이 교차하는 직조 물 위에서 형성된다.”(정택진, 2020: 12)


노부요의 말은 ‘사회적 버림의 공간’에 문제를 제기하는 듯하다. 이들이 살아가는 할머니의 집에는 할머니가 혼자 산다고 생각하는 민간복지사가 꾸준히 찾아오고, 할머니는 그가 부동산 거래를 주선하여 수수료를 챙기러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할머니의 집을 어떻게든 팔려 하고, 그 집에서 누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전혀 관심 없는 복지사의 모습은 그 집이 한편으로 이미 비가시화된 공간임을 보여준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철저히 비가시화되어 있다.


이들은 주소지 등록도 이 집으로 되어 있지 않고, 할머니와 어떠한 법적 관계에도 있지 않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서로의 외로움과 결핍으로 연결되어 그 집에 모여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를 ‘줍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강이, 174)

<어느 가족>에서 쇼타에게 ‘아빠’라고 불리길 바라는 오사무는 왜 아이에게 도둑질을 가르쳤냐는 경찰의 질문에 “그것 말고는 가르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최선의 삶』에서 강이가 그 모든 선택들, 말없이 가출하고, 횟집과 술집에서 일하고, 소영과 싸우고 그에게 무릎을 꿇고 얻어맞고, 결국 선생님에 의해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그 모든 과정을 “최선”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오사무가 쇼타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건 왜 도둑질뿐이었을까? 여기서 ‘최선’이라고 표현된 선택들이 정말 최선이었다고 가정할 때, 드러나는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이 ‘줍다’라는 행위, 즉 ‘주움’에 주목한다. <어느 가족>과 『최선의 삶』에서 주움에는 언제나 버림이 전제되어 있다. 돈 없고 공부 못하는 강이가 돈 많고 공부 잘하는 소영과 싸운 뒤 학교와 또래집단에서 버림받고 나서 아람이 강이를 주웠고, 연락도 안 하는 자식들과 사회가 할머니를 버리고 나서 식구들이 할머니를 주웠듯이, 주움에는 버림, 그리고 버리지 않았어야 할 책임이 전제된다. 이 글은 두 작품에서 발견되는 주움의 형상에 착안한다.


이 글은 <어느 가족>과 『최선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빈민의 생존 방식인 ‘주움’을 읽기라는 행위에도 적용하여, 주움으로서의 읽기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읽기란 고정된 텍스트를 의자에 앉아 안온하게 쳐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방식을 통해 그 삶의 궤적을 어설프게나마 따라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읽기란 텍스트 안팎의 부스러기들을 주움으로써 자신의 위치에서 텍스트 속 삶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어야 한다.



Ⅱ. 구석에서의 선택


밤늦은 시간에 갑자기 옛날에 같이 활동하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되게 다급한 목소리로 다급하기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란이 누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최옥란은 네 통의 유서를 품고 살다가 2002년 2월 21일 새벽, 집에서 음독을 시도했다.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3월 26일에 결국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애인 노점상이자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최옥란은 노동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가장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데 반복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에 수급비 286,000원과 장애수당 45,000원을 합한 총 331,000원으로 생활했는데, 그는 병원에 가기 위한 차비로 월 120,000원을 써야 했고, 1년에 두 번 회당 800,000원인 근육이완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 외의 생활비까지 합하면 매달 그에게 남는 돈은 없었고, 오히려 300,000원이 넘는 적자가 쌓여 갔다. 그는 집 밖으로 나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 노점상을 해야 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게 남긴 편지에서 그는 “작은 꿈을 다 잃”었다고,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을 찾으려고, 힘이 들어도 참으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희망이 없어서 “죽음을 선택”한 그는 남은 이들에게 투쟁을 촉구했다(비마이너, 2021: 221-254).


뇌성마비장애인인 그에게 주기적인 병원 방문과 근육이완주사는 그의 삶의 토대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근육이완주사 비용은 보전되지 않았고, 병원에 오가는 비용도 마찬가지였다. 월 평균으로 따지면 그는 의료비만으로 수급비의 대부분을 지출해야 했다.


그가 처한 현실적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2002년 2월 21일 새벽의 최옥란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의료비처럼 지출하지 않을 수 없는 고정 비용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써도 죽고, 아껴도 죽는 돈. 그렇게 그의 ‘선택’은 구석으로 내몰렸다. 이때 그가 구석에서 내린 선택이 그에게 최선이었다고, 어떻게든 합리적인, 최적의 선택을 하려고 애쓰다가 도달한 지점이었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으며, 그와 우리는 어떤 존재로 거듭나는가?


‘타자의 합리성’은 사회학의 질적 연구방법 중 ‘생활사 이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 ‘타자의 합리성’은 ‘자신이 바란 적도 선택한 적도 없는 사회의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시 마사히코는 자신이 오키나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앞에서 하나의 딜레마를 마주한다.


만일 그를 그저 합리적이라고만 가정하여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가 차별받는 이유도 그가 합리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결론으로 이어져 차별적 사회 구조를 외면하게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타자의 말을 부정한다면, 그를 무력한 존재로 대상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모든 상황을 피하고자 타자의 삶과 이야기, 혹은 세상과 이야기를 분리하고, 타자가 말하는 방식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타자는 자신이 선택한 적 없는 세계에 내던져져서 살아간다. 이 과정을 포착하는 ‘타자의 합리성’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기투(企投, Entwurf)와 피투(彼投, Geworfenheit) 개념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핵심이 되는 단어는 ‘타자’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용법에서 기투와 피투의 주체는 인간의 실존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현존재’인데, 타자의 합리성 속 ‘타자’는 사회적 억압이나 차별과 같은 상황에 내던져진 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내던져짐’을 의미하는 ‘피투’는 현존재가 자신이 선택한 적 없는 세계에 내동댕이쳐져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상황을, ‘내던짐’을 의미하는 기투는 현존재가 자신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을 추구하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언제나 세계에 내던져져” 있고, “자신의 가능성에 입각하여 새로운 무언가를 행한다.” 그러나 기투라는 행위도 여전히 기존의 세계에 묶여 있으므로, 기투란 언제나 피투적 기투(geworfenes Entwerfen)일 수밖에 없다(장소원, 2019: 64).


‘타자의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고안되었다. 타자는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상황들에 놓여 있고, 그럼에도 이를 뚫고 나아가려고 분투한다. 타자가 자신이 놓인 상황 안에서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그의 선택을 단지 비합리적이거나 비극적이라고 재단하거나,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냄’으로 낭만화하지 않으면서, 타자의 선택들과 함께 그것들이 놓인 사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이때 타자의 이야기는 삶이나 세상과 불가분한 대상이 된다(기시, 2021: 39). 즉, 여기서 ‘합리성’이란 한편으로 그의 삶을 어떻게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읽는 이’ 혹은 ‘듣는 이’의 도구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합리성은 피투적 기투라는 인간 조건에 관한 추상적 층위의 논의를 사회적 차별이라는 지극히 구체적인 층위로 가져온 것이다. 우리가 모두 세계-내-존재라고 할 때, 그 ‘세계’라는 것은 어떤 모습이며, 그에 따라 각각의 세계-내-존재는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되는가? 이 과정에서 삶은 어떤 삶이 되는가? 타자의 합리성이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일 테다.


Ⅲ. 최선의 비극


<어느 가족>과 『최선의 삶』에서 등장인물들의 삶은 구석에서 누구와 함께할지 선택하는 과정, 즉 주움의 반복이었다. <어느 가족>에서 오사무와 노부요는 버려진 쇼타를 자동차에서 주웠고, 할머니는 집이 없는 이들을 주웠다. 그리고 동시에 쇼타는 아이를 원했던 노부요를 주웠고, 오사무와 노부요는 가족이 필요했던 할머니를 주웠다. 노부요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쥬리를 주웠고, 쥬리는 쥬리를 주워야만 했던 노부요를 주움으로써 ‘유리’가 되었다.


『최선의 삶』에서 강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아람을 주웠고, 동시에 아람과 소영은 친구가 필요했던 강이를 주웠다. 아람은 완전히 고립된 강이를 다시 주웠고, 강이는 함께 서울에 갈 사람이 필요했던 아람을 주웠다. 구석점에서의 주움은 언제나 상호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움의 과정은 순탄치 않다. 유리가 마트에서 라멘을 훔치려 하던 그때, 쇼타는 유리를 보호하기 위해 (무엇으로부터?) 일부러 대놓고 과일을 훔쳐 달아나고, 붙잡혀 경찰서로 간다. 유리에게 이를 전해들은 가족은 쇼타를 두고 도망치려 하지만, 집에서 나가는 그 순간에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그리고 경찰 수사와 언론 보도라는 공적인 파헤침의 과정에서 이들은 다시금 어떤 구석으로 몰린다.


“가족인 척을 했던 자들이 무슨 목적으로 여기 모여 살았던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 기자


여기서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다. “가족인 척”을 한 이들의 ‘목적’은 밝혀져야 하는 의심스러운 대상이었다. 그들의 역사는 가족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데에 총동원되었다. 노부요를 언니라고 부르고, 할머니의 옆자리에서 자는 걸 좋아하던 아키에게 경찰은 식구들의 과거를 들려준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함께 노부요의 전남편을 죽였고, 그것은 일종의 “치정 사건”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라는 경찰의 말에서 이들은 부부보다 공범에 가까운 형태로 재현되었다.


같이 살자고 아키에게 말한 할머니는 아키의 부모님한테서 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키의 부모님은 아키와 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음을 몰랐다. 아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할머니는 돈이 필요했을 뿐일까요? 제가 아니라.”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아키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은 사실 당신이 함께 살던 이들이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메시지였다.


노부요를 취조하는 경찰. 단정하게 가르마를 타서 뒤로 묶은 머리, 검은 정장 재킷과 밝은 와이셔츠. 단호하게 다문 입 양옆으로 주름이 지고, 왼쪽 뺨이 햇빛을 받아 밝다. “하지만 안 낳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라는, 자신에게 너무도 당연해서 의심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말에 대한 확신이 담긴 얼굴.


유리는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갔지만, 쥬리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몰려온 기자들에게 쥬리의 아버지는 쥬리가 이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푹 잔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오므라이스를 직접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리는 이 모든 소음 뒤에서 집에 갇혀 문 자물쇠를 만지작거린다. 공적인 절차들과 보도 안에서 유리는 할머니를 죽이고 시신을 유기했을지도 모를 유괴범들의 집에서 지내다가 안전한 가정으로 돌아온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쥬리는 유리가 되는 과정에서 ‘선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 그가 할머니 집 식구들을 만났을 때, 거의 모든 질문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유리는 남편에게 맞아 생긴 멍을 화장으로 감추며 자기 딸을 때리려는 친모의 폭력을 분명히 인지한다. 유리는 가까이 오라는 친모의 말에 고개를 내젓는다.


경찰: 아이한테는 엄마가 필요해요.
노부요: 엄마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죠. 낳으면 다 엄마가 됩니까?
경찰: 하지만 안 낳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 당신이 아이를 못 낳아 힘들었던 건 이해해요. 부러웠어요? 그래서 유괴했어요?
노부요: 그렇네요. 증오했던 것 같네요. 엄마를.
경찰: 두 아이는 당신을 뭐라고 불렀어요? 엄마? 어머니?


카메라는 한동안 노부요의 얼굴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말없이 변하는 노부요의 표정과 손으로 가려지는 눈두덩. “글쎄요. 뭐라고 불렀을까요.” 그는 엄마로 불리고 싶었을까, 아니면 무엇으로 서로를 딱히 부를 필요도 없었던 관계가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한 걸까, 아니면 다시 ‘새 옷을 사주겠다’며 아이를 불러서 때리고 있을 유리의 가족을 상상하며 참담함에 입이 막힌 걸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무어라 말해도 설득되지 않을 것 같아서 선택한 침묵들.


노부요는 전과가 있는 오사무를 위해 모든 혐의를 뒤집어쓴다. 그는 5년의 징역을 살게 되었다. 할머니의 사망을 확인했을 때 이들은 이 집에서 계속 살기 위해 할머니의 죽음을 숨겨야 했다. 실종 상태인 유리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동료에게 들켜 동료 대신 해고당한 노부요, 건설 현장에서 사고를 당했지만 산재 처리도 안 되어 한 달은 무급으로 집에서 쉬어야 했던 오사무는 그 집과 가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번듯한 장례식장을 빌려 장례를 치르는 대신, 할머니가 자다가 죽은 그 자리에서 할머니의 머리를 빗어주었고, 그를 집에 묻었다. 그러나 이는 ‘장례’가 아니라 ‘유기’로 해석되었다. 마치 아빠는 엄마를 폭행하고, 엄마는 ‘낳고 싶지 않았던’ 딸을 폭행하는 집으로부터 유리를 ‘구조’하고 ‘보호’한 것이 ‘유괴’로 해석된 것처럼.


우리는 크게 웃었다. 요요를 선택한 아이들은 부메랑 각도에 대해 설명을 들을 때 고개를 저었다. 자와 각도기를 들고 신중하게 계산하는 일을 우리는 싫어했다. 까다롭고 신중한 것보다 위험해도 단순한 것을 좋아했다. (강이, 102)


아담 스미스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며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계산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레이버, 2009: 43). 이를테면, 인간은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마다 효용과 비용을 따져서 최적점을 골라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 계산에 드는 비용이 너무도 커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단순한 방법을 통해 의사결정 비용을 절감한다. 강이도, 아람이도 복잡하게 선택한 적은 없다. 소영이가 자와 각도기로 언제 누구의 뒤통수를 칠지 계산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강이와 아람이의 선택은 자꾸만 어디론가 미끄러졌다.


소영은 꼭 필요한 아이였다. 싸움이 났을 때 미지근하게 끝내는 법이 없었다. 아이들과의 싸움은 물론이고 어른들이나 선생과의 문제에도, 소영이 개입하면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주먹질은 정당방위가 되었고 이 주일의 징계는 일주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최선의 결과만을 원하는 아이는 우리 중 소영뿐이었다. 우리는 다만 최악의 결과가 두려울 뿐이었다. (강이, 88)


소영의 제안은 괜찮은 제안이었다. 나는 조금씩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었다. (강이, 115)


무릎은 꿇지 말았어야 했다. 무릎을 꿇으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 태도, 희망을 향해 다가가려는 태도가 나를 희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 같았다. 병신이 되지 않으려다 상병신이 되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을 상상했다. 그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였다. 무차별하게 흙을 긁어쥐던 순간처럼, 아무 곳에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순간에야만 그러잡을 것이 생기리라는 희망이었다. (강이, 124)


소영이는 늘 ‘최선’의 결과만을 바랐고, 다른 아이들은 최악을 피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나 최악을 피하고자 해도 여전히 강이는 희망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소영이와 완전히 관계를 끝내는 대신, 한 번만 무릎을 꿇으면 된다는, “병신이 되지 않으”려는 “희망”이 강이를 구석점으로 내몰았다. 그 구석점에서 강이는 아람이와 가출해서 서울로 향했고, 술집에서 일하다가 다시 아람이에게 버려졌다.


마지막으로 강이는 소영이를 칼로 찔러서 이 모든 일을 끝내려 한다. 하지만 소영이는 죽지 않았고, 강이는 구치소에 들어갔다. 뉴스에서 강이를 설명하는 단어는 ‘위장 전입’과 ‘가출’이었고, 소영은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학생이자 “수많은 오디션 끝에 첫 광고를 찍자마자 질 나쁜 친구에게 습격을 당한” 안타까운 아이였다.


소영의 소식은 TV에서 나왔고, 사람들은 소영을 응원했으며, 장우산으로 친구의 얼굴을 피칠갑으로 만들고, 그의 친구의 등에 의자를 내리찍어 전학을 보낸 소영은 이제 ‘찜질방천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최선의 삶』을 원작으로 하는 이우정 감독의 영화 <최선의 삶>(2021) 中 강이, 아람, 소영이 가출하여 아무도 없는 밤거리 길바닥에 앉은 장면. 아람은 바닥에 누워 강이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셋은 먼 곳 어딘가를 함께 바라본다. 배낭을 멘 아람, 모자를 쓴 소영의 빨간 캐리어.


나의 칼이 이상한 방식으로 소영의 꿈을 이루게 했다. 엄마는 매일매일 나를 찾아왔다. 아빠는 권고사직을 당했다. 주민들의 항의 때문에 부모는 이사를 했다.
(강이, 173)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강이, 174)

‘칼’은 강이의 최후의 선택이었다. 강이는 이것까지도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모두의 행동은 최선이었다. 다만 누군가는 구석점에서 그 선택을 했고, 누군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최선이란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면, 그는 할 만큼 했다는 의미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과가 친구를 칼로 찌르고 구치소에 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의 선택이 이루어진 세계를 볼 수밖에 없다.


할머니는 죽었고, 노부요는 감옥에 가고, 쇼타는 아동 보호 시설로 가고, 유리는 원가정으로 돌아가면서 ‘어느 가족’은 해체되었다. 강이가 구치소에 들어가면서 강이의 가족은 터전을 잃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일으킨 ‘사회’, 그러니까 애초에 누군가가 다른 이를 줍거나 찌르도록 만든, 사람을 버리는 사회는 안전한 곳으로 자취를 감췄다.


김연우(201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관한 연구에서 ‘최선의 비극’이 “최선의 배움과 추론의 기회를 제공하는 비극”이며, 비극이 “우리를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드는 계기이자 자극”이 되는 “과정이 최대한 효과적으로 수행되도록 사건들을 인과성과 개연성 그리고 보편성이라는 규칙들로 구성하는 것”이 ‘최선의 비극’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비극’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연극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을 지칭한다. 그래서 이 ‘최선’이라는 표현은 해당 연극의 내용 자체보다는 그것의 전달력과 같은 지점에 대한 평가에 가깝다. ‘최선의 비극’의 조건은 영화와 소설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이때 이러한 역할 혹은 효과는 각 작품에 내재하기보다 작품이 속한 연결망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 감독 혹은 작가와 매체뿐 아니라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어떤 작품이 사유와 판단의 계기, 배움과 추론의 기회가 되는 일은 바로 그러한 연결망 안에서 만들어지는 효과다. 재현된 비참, 혹은 비참의 재현으로서의 비극에서 독자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와 비극은 각각 어떤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계에 내던져진 타자들의 합리성은 계산적 이성, 혹은 합리적 이성과 점점 멀어진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자 이어 온 선택들은 그의 삶을 더욱 구석으로 내몰고, 그렇게 내몰린 이들은 ‘최적화’가 아닌 구석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누군가의 ‘최선’의 선택은 그를 결국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최선의 비극’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읽어냄으로써 변화의 계기로 이어나갈 수 있는 독자의 역량, 그러한 역량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재현의 역량, 그리고 이 역량들의 연결을 포착한다. 이 연구가 닿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그러한 역량을 현실화하는 ‘읽기’의 윤리이며, 동시의 그러한 ‘읽기’에 대한 하나의 예증(例證)이다.


Ⅳ. 주움의 역동을 읽어내기


폐가를 찾아낼 때마다 아람은 집을 주웠다며 좋아했다. 아람은 줍거나 훔친 물건들을 폐가에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벽돌 한 장을 들면 꽁초들이 수북했다. 삐걱거리긴 하지만 앉아서 쉴 수 있는 작은 나무의자도 생겼고, 바람 빠진 축구공도 생겼다. 콘크리트 벽에 마음대로 낙서를 할 수 있는 분필 조각도 생겼다. […] 좋아하는 남자애와 첫 섹스를 했다는 친구는 없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불행을 한자리에 모아놓고서는 어이없이 교집합을 발견하고 즐거워했다. 나는 다시 무인 모텔에 온 것처럼 행복해졌다. (강이, 90)


김애령은 그저 듣기만 하는 수동적인 듣기로 ‘윤리적 경청’을 완성할 수 없으며, “주체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투명하게 알 수 없다는 것, 주체 내부에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타자성의 계기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윤리적 경청은 시작된다”고 말한다(2020: 210-211). 이때의 주체는 듣는 사람으로, 듣는 사람이 “타인의 취약성에 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나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김애령, 2020: 231) 이때 듣는 사람은 줍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앞서 살펴보았듯, 사회로부터 버려진 이들의 주움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가족>과 『최선의 삶』에서 줍는 사람은 언제나 주워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때 주움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아람이는 폐가를 주워서 친구들과 놀았다. 줍거나 훔친 물건들을 폐가에 모아 두고, 이를 통해 폐가를 자신이 주운 친구들이 지내기 편한 하나의 ‘집’으로 만들었다. 할머니의 집에는 오사무와 쇼타가 줍거나 훔친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쇼타는 자신이 자는 작은 칸 안에 주운 것들을 예쁘게 진열했다.


그 칸에서 쇼타와 유리는 남매가 되어 간다. 유리는 자신의 여동생이 아니라고 거부하던 쇼타는 점차 유리에게 마음을 연다. 이런 마음의 열림, 상호적 주움은 ‘호칭’과 같은 명시적인 무엇으로 나타나지 않고, 주운 것들로 가득한 집에 모르는 아이를 들이고 고로케를 함께 먹는 장면, 좁은 방에서 주운 것들로 함께 노는 장면과 같은 순간들에 이루어지는 실천으로서 존재한다. 그러한 상호적 주움이라는 관계가 이들이 타인에 대해 내리는 “윤리적 판단의 특성을 결정한다.”(김애령, 2020: 229)


영화 <어느 가족> 中 할머니의 집. 누런 벽과 바닥은 온갖 물건들에 가려져 일부분씩만 드러난다. 옷, 가방, 전기밥솥, 텔레비전, 비닐봉투, 흰색 가면, 컵, 라디오, 그림뿐 아니라 하나하나 분별하기 힘든 수많은 물건들이 집안에 가득하다.


양동 쪽방 주민 김강태의 생애사를 기록한 박소영과 이채윤은 그의 삶을 ‘정상 가족’이라는 틀로 보기보다, “그런 불행 속에서도 그가 계속 살아가도록 지탱해 준 사람들”에 집중한다”(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2021: 108-109) 구석에서 서로를 줍는 이들은 서로의 삶을 지탱하면서 또 다른 구석점으로 이동하기까지의 시간을 늦춘다. 주움이 구석점에서 서로를 구출하지는 못하지만, 구석점에서도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물론 쇼타를 버리려 한 가족, 강이를 버리고 간 아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주움은 버림의 종결이 아니다. 한번 버려진 것은 다시 버려질 수 있는 것이 구석점의 삶이었다. 주움은 상대에 대한 환대이기보다 자신이 살기 위해 만들어야만 했던 친밀성 혹은 관계의 문제였고, 주움이라는 구석점의 선택은 그 주체를 또 다른 구석점으로 몰아갔다. 이 구석점에서 주워야 했던 것이, 저 구석점에서는 버려야 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몰려간 구석점에서도 이들은 무언가를 다시 주울 것이다. 서로에 대한 주움과 버림은 그렇게 반복된다.


쇼타가 일부러 붙잡힌 것은 그러한 주움과 버림의 굴레에서의 삶을 상징하는 ‘도둑질’을 방해함으로써 유리를 이 굴레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거리에 있는 또래들의 가방에 교과서가 들어있을 때, 자신의 가방에는 훔친 식료품이 가득한 그런 상황을 자신의 여동생에게는 반복시키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여동생에게는 도둑질을 시키지 말라는 문방구 주인아저씨의 말은 항상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던 굴레를 직시하게 했을 것이다. 유리는 라멘을 훔치는 데 성공했지만, 쇼타는 자신이 대신 잡힘으로써 그 굴레에서 유리를 구출하고자 한다. 구출은 가능하지 않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사실 알았을지도 모른다.)


유리는 한밤중에 자신이 버려져 있다가 오사무와 쇼타에게 발견된 그 발코니에서 구슬을 갖고 놀며 ‘가족’을 추억한다. 같이 놀아주지도 않고, 화만 내는 엄마의 곁으로 돌아간 것은 굴레로부터의 구출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버림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구석점에서 쇼타가 내린 선택은 유리를 다시금 그의 구석점으로 버려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쇼타의 최선이었다. 그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것이 ‘가족’의 최선이었다.


이때 대면의 타자에 대한 듣기의 윤리를 비대면의 타자에 대한 읽기의 윤리로 전환하자. 우리는 대화할 수 없는 타자, 글이나 영상으로만 존재하는 타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비극을 ‘최선의 비극’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주움의 역동을 포착하는 읽기다. 비극을 일으키는 사회의 모습만을 읽는 읽기는 이미 폐쇄된 읽기다. 그것은 비극에서 삶을 배제한다.


그러한 사회와 동시에 그 안에서 버려진 서로를 줍고 버리길 반복하는 주움의 역동을 포착하는 읽기는 “더 이상은 우리의 세계가 이렇게 지속될 수는 없다는 최소한의 합리성에 근거한, 그래서 공동의 해결을 모색하는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이자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김애령, 2020: 265).


가난의 재현에서 최선의 선택이 비극으로, 그렇게 구석점이 또 다른 구석점으로 이어지는 합리성과 주움의 역동을 읽어낼 때,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통치성과 삶 사이의 관계를 지극히 구체적인 장면들 안에서 배울 수 있게 해주는 ‘최선의 비극’이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최선의 비극이 될 때, 그것을 읽어내는 우리는 그 사회에 대한 자신의 연루됨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공동의 해결을 모색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자신이 주운 누군가, 자신을 주운 누군가, 그리고 그 모든 주움에 전제된 버림과 버려짐, 나아가 그 속에서 연결되고 있는 서로의 취약함에 응답하는 주체.


이 응답은 ‘아마도’(perhaps)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확실성도 보증하지 못하지만, 미래를 향한 약속이자 기도로 다가오는 것”이며, 그 안에서 “가능한 연대는 사회제도나 관행의 부정의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함께 지려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일 것이다. 그 관계는 언제 이 사회에 의해 흐트러질지 모를 위태로움을 안고 있고,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구출할 수 없겠지만, “그 끝에서 우리는 보다 정의로운 타자와의 관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계는 최선의 비극과 해결을 모색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관계처럼, 서로를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만들 것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쥬리가 폭력 앞에 고개를 내젓는 유리가 됨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알게 되고, 한밤중에 쫓겨나 앉아 있던 발코니에서 자신을 주워준 이들을 바로 그 발코니에서 추억한다. 이런 과정들 안에서 사회라는 연결망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점은 천천히 변해가고,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회라는 것이 만들어져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김애령, 2020: 258)


타는 옷을 지켜보는 가족. 노부요는 품에 유리를 완전히 끌어안고, 쇼타는 옆에 앉아 함께 불을 바라본다.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오사무와 아키. 노부요는 낮에는 유리의 머리를 잘라주었고, 밤에는 그가 입고 온 옷을 태워 주었다. 그렇게 이들은 이 순간 안에서 가족이 되어 간다.



[단행본]

그레이버, 데이비드 (서정은 역), 2009,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서울: 그린비

기시, 마사히코 (정세경 역), 2021, 『망고와 수류탄』, 성남: 두번째테제

김애령, 2020, 『듣기의 윤리』, 서울: 봄날의박씨

비마이너 기획, 2021, 『유언을 만난 세계』, 파주: 오월의봄

임솔아, 2015, 『최선의 삶』, 파주: 문학동네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 2021,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 서울: 후마니타스


[논문/자료집]

김연우, 2014,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타난 최선의 비극의 조건. 연세대학교 철학과 국내석사학위논문

장소원, 2019, 외된 폰 호르바트의 『우리 시대의 아이』에 나타난 양심의 문제 -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을 중심으로 -. 헤세연구, 42(0), 59-82.

정택진, 2020, “쪽방촌의 사회적 삶,”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석사학위논문

Clarke, A. & Parsell, C., 2022 Resurgent charity and the neoliberalizing social, Economy and Society, 51:2, 307-329, DOI: 10.1080/03085147.2021.1995977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 2015

매거진의 이전글 우연성 이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