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룩 Jun 18. 2023

우연성 이후

<러시아 인형처럼>, 과학 밖 세계의 애도와 인간성에 대하여

모든 이해력이 와해되는 한계상황에서 살아갈 자유가 아닌 이상,
자유는 아무것도 아니다.
-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TB: Time Without Becoming
MF: Metaphysique et Fiction des Mondes Hors-Science. 페이지는 국역본인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이학사, 2017)을 따른다.
AF: Après la finitude. 페이지는 국역본인 《유한성 이후》(도서출판 b, 2010)을 따른다.
SD: Spectral Dilemma, Collapse IV


왜 발생하는지도 알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 그것도 온 우주가 나를 엿 먹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유독 나를 괴롭히는 전대미문의 사건 안에서, 나는 이 총체적인 난감함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우연성, 그저 굴복하고 그 우연에 붙들려 끌려 다녀야 하는 그런 절대적인 우연성 안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부대낌이 가능하며, 그러한 부대낌은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는가? 넷플릭스 시리즈 <러시아 인형처럼>은 바로 그러한 지점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 드라마의 서사 구조 안에서 형성되는 인간성의 핵심에는 우연성contingency이 존재한다. 이 글에서 나는 해당 드라마를 ‘과학 밖 소설’이라는 범주로 이해함으로써, 우연성을 끌어안는 태도와 거기서 만들어지는 인간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연과 우연


<러시아 인형처럼>의 기본 설정은 시즌 1과 시즌 2에서 꽤나 다르다. 시즌 1에서 ‘나디아’는 자신의 생일 혹은 그 다음 날에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사망하고 자신의 생일에 다시 똑같은 파티 장소에서 되살아나는 반면, 시즌 2에서 그는 지하철을 타고 과거로 가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되어 최선인지 최악인지 알 수 없는 선택들을 스스로 되풀이한다. 계속해서 자신의 하루를 다시 살아내는 이야기와 자신의 모계를 직접 살아보는 이야기는 굉장히 달라 보이지만, 이 두 이야기는 그 서사 형식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지닌다.


이 공통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판타지와 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의 구분을 우선 합의하고 넘어가야 한다. 통상적으로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서사 장르에서 ‘공상空想, fiction’은 크게 판타지 소설과 과학 소설로 나뉜다. 아예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하나하나 설정하고 엮어내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판타지 소설은 이미 있는 세계와 이미 있는 과학의 지식 안에서 그것의 진보한 형태를 상상하는 과학 소설과 아주 다르다고 논해진다. 이때 두 서사 장르의 차이는 현실과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로, 즉 지금-여기와의 연결성의 문제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두 장르는 근본적인 어떤 믿음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필연성necessity에 대한 믿음이다. 현실의 논리에서 말이 안 되는 판타지의 세계가 성립하는 이유는 그 판타지의 세계를 지탱하는 내적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과학 소설이 성립하는 이유는 그러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현실의 과학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 두 장르의 근간에는 그 세계를 합리화rationalize하는 논리라는 필연성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 그 세계들은 어찌 되었든 그러한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iasoux는 이러한 필연적인 논리로 뒷받침되는 서사가 아니라, 순수한 우연성에 기반을 두는 서사의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실험과학이 권리상en droit 불가능한 세계인 ‘과학 밖 세계’를 다루는 ‘과학 밖 (세계에 대한) 소설fiction (des mondes) hors-science’로, 이는 과학적 인식에 종속되지 않는 세계를 다룬다. 여기서 실험과학이란 동등한 조건에서 동등한 방법으로 실험을 시행했을 때, 같은 결과를 재현함으로써 필연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과학을 의미한다. 이때 실험과학이 권리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필연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없거나, 혹은 그러한 원리가 발견되는 일조차도 실은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즉, ‘과학 밖 소설’은 우리가 어떤 것이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고 확신할 수 없는 세계, 즉 과학 밖 세계에 대한 소설이다. 이때 과학 밖 세계의 지반은 다름 아닌 우연성이다.


과학 밖 소설


메이야수는 과학 밖 소설의 사례로 실제 존재하는 소설들을 언급하지만, 반드시 그것이 ‘소설’일 이유는 없다. ‘fiction’이라는 말은 특정한 문학 장르이기 이전에 상상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처럼 서사 구조를 지닌 것이라면 그 또한 ‘과학 밖 소설’에 포함될 수 있다. 이 글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작품들은 모두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 전제는 우선 합의될 필요가 있다.


메이야수는 우연성에 기반한 세계에 대한 칸트의 이해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필연성과 세계의 안정성을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칸트는 우연성이 지배한 세상은 반드시 카오스로 가득하며, 무질서만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 세계는 존속할 수 없고, 설령 존속하더라도 우리가 그 세계를 인식할 가능성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정확히 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필연적 법칙들에 종속되지 않은 세계들을, 그러니까 다소 불안정하고, 여기저기서 불합리한 운동들을 보일 수 있으나, 그 총체에 있어서는 규칙적인, 그럼에도 그 규칙성으로부터 결코 필연적인 인과 과정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닌 세계들을 상상할 수 없는가? 달리 말하면 칸트로 하여금 그 커다란 윤곽에 있어서는 사실상 규칙적이지만, 이 근사적인 규칙성으로부터 어떤 보편적인 법칙도 나오지 않는 그러한 세계들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하게끔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왜 법칙 없는 세계는 반드시 격렬한 유동성의 세계여야 하는가?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의 세계가 어떤 필연적 법칙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존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싶다.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세계는 그것이 정돈되어 있는 대신 카오스적이어야 할 어떤 이유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강제될 수 없기 때문에 무차별하게 정돈된 세계 혹은 카오스가 될 수 있어야 한다(MF, 51~52).


그러한 이유에서 과학 밖 소설이 온전히 카오스이기만 할 이유는 없다. 메이야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절대적 우연성에 기반하는 세계의 시간을 ‘하이퍼-카오스’라고 명명한다. 이 하이퍼-카오스는 통상적인 카오스와 다른 의미다. 통상적으로 카오스라고 하면 우리는 “무질서, 임의성, 모든 것의 무한한 생성becoming”을 생각하지만, 하이퍼-카오스의 우연성은 “너무도 급진적인 나머지 심지어 생성, 무질서, 혹은 임의성조차 그것에 의해 부서지고, 질서, 결정론determinism, 불변fixity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래서 이때 우연성이란 “파괴나 무질서의 필연성보다는 질서와 무질서, 생성과 영원불변sempiternity의 동등한 우연성을 의미한다.”(TB, 25)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세계란 그것이 반드시 무질서해야 한다는 법칙 또한 따르지 않는 세계여야 한다. 즉,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우연성이 지배하는 급진적인 카오스, 하이퍼-카오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우연과 카오스에 대한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메이야수는 세 가지 유형의 과학 밖 세계들을 개념화한다. ‘유형 1’은 “불규칙적이기는 하지만, 너무 미미하게 불규칙적이기에 과학과 의식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세계들”로, “원인 없는 사건들을 포함”하지만 그러한 사건들은 “매우 드물고, 매우 “간헐적”이어서 과학과 의식을 위험에 빠뜨리지 못할 것이다.”(MF, 56~57) 이처럼 인과 원리를 ‘가볍게 위반’하는 세계와 달리, ‘유형 2’와 ‘유형 3’은 그 불규칙성이 과학을 폐지할 만큼 충분히 강해진다. 이때 ‘유형 3’은 필연적 법칙을 아예 결여한 우주로, 칸트의 말처럼 의식의 가능 조건마저 사라져서 우리가 그 세계를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유형 2’일 것이다. ‘유형 2’의 경우 “불규칙성이 과학을 폐지하기에는 충분히 강하나, 의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세계”다.


이 세계는 “사물들이 일으키는 우발적 사고들”, 물질적 대상들의 갑작스런 “궤도 이탈”이 존재하는 세계, 인간의 삶 전체를 파괴하기에는 너무 드문 사건들이지만, 확실한 과학적 실험을 허용하기에는 너무 잦은 사건들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것은 그 가장자리가 변덕스러워지는─그러나 어떤 숨겨진 의도로도 환원되지 않는 변덕의─세계이다. 이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사물들의 연대기를 작성할 수 있을 뿐이다. […] 자연의 규칙성은 사회의 규칙성과 유사할 것이다. 즉 그것은 일상적 삶을 허용하기에는 충분히 안정적이나, 정확한 예측을 하거나 갑작스런 재난을 피하기에는 너무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MF, 61~64)


메이야수는 이를 ‘유형 2의 세계’ 혹은 ‘FHS-2’의 세계로 부른다. 이 세계는 우연성에 기반한 세계는 완전한 카오스가 된다는 칸트의 초월적 연역을 반박하는 메이야수의 하이퍼-카오스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로, 세 개의 유형 중 유일하게 과학 밖 소설이 만들어내는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 밖 소설이라는 개념 혹은 범주는 왜 필요할까? 메이야수는 데이비드 흄이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는 칸트와 칼 포퍼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과학 밖 소설이라는 범주를 통해 이들의 논증이 왜 틀렸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자연법칙들의 우연성이 불합리하지 않은 가설”이 될 수 있다는 데로 나아간다. 그러나 과학 밖 소설이라는 범주를 제시하는 글에서 그의 핵심은 그 범주가 “과학소설과는 동일하지 않은 상상을 동원하는 한에서 가지고 있는 “문학적인” 이점을 검토하는 것”이다(MF, 69). 메이야수가 제시하는 과학 밖 소설의 문학적인 이점은 다음과 같다.


과학 밖 소설은 형성된 세계의 환경적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떠받칠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제기했던 요구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실제적인 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르가 청소년 소설이나 모험소설의─물론 상당하지만 그럼에도 제한된─호기심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보기에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즉 전통적인 과학소설에서 출발하여, 과학 밖을 향하여 세계를 변동시킴으로써 전통적인 과학소설을 해체하고, 그리고 점점 더 거주하기 힘든 세계를 향해 가는 이 점진적 박탈 작업을 계속하여, 점차적으로 이야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결국 갈라진 균열의 한가운데에서 그 자신의 흐름 속에 수축된 몇몇 생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생은 과학 없이도 스스로 정신적인 경험을 행하고, [이를 통해] 아마도 [생과 과학 사이의] 이러한 간극 속에서 생에 대한, 혹은 과학에 대한 전대미문의 무언가를 발견할 것이다. 질식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여진 형상적 변환, 실험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경험. 불안정한 강도는 그 순수한 고독 속으로 무한히 빠져들 것이다. 붕괴를 유일한 환경으로 그 속에서 세계 없는 실존의 진상을 탐색하기 위해서. (MF, 93~94)


이는 그의 질문, “현재 세계가 어느 날 우리 발밑에서 사라질 수 있을 법한 유동적인 지반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MF, 68~69)와 이어진다. 자연 법칙들은 “원인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AF, 142) 바뀔 수 있다. 대상들은 “우리가 사물들과 가질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관계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실제로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가장 변덕스럽게 나타날 수도 있다.”(AF, 144) 앞서 설명한 하이퍼-카오스는 이러한 비-인과적 우주에 대한 메이야수의 논리적 귀결이며, 우리는 FHS-2를 통해 그러한 세계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사변적인 추론을 통해 비-인과적 우주를 도출해낸다. 그런 이유에서 메이야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과적 우주에서 비-인과적 우주로 이행할 때 우리가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아무것도, 수수께끼들을 제외한다면.”(AF, 157)


우연성 이후


메이야수에게 이러한 이행은 단지 사변적인 필요나 문학적 이점을 넘어서, 실제로 우리가 살아갈 때 가지는 태도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이와우치 쇼타로는 이를 ‘도래해야 할 신의 길’이라고 명명한다. 하이퍼-카오스와 삶의 태도 사이의 관계는 메이야수의 망령의 딜레마Spectral Dilemma라는 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망령이 무엇인지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메이야수는 망령이 “‘저승’으로 가길 거부하며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우리를 사로잡는haunt,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라고 말한다. 특히 진정한 망령, 혹은 참된 망령spectre par excellence은 우리가 애도할 수 없는 존재들이고, 죽음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는 여기서 필요한 것이 근본적인 애도essential mourning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애도는 망령들과 함께 죽는 것이 아닌,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죽은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일은.


메이야수가 말하는 망령의 딜레마는 신의 존재와 관련된다. 그러한 애도의 가능성에 대해 무신론자와 신자의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신자는 신이 나타나서 죽은 이들을 되살릴 것이라고 믿으며, 그러한 구원의 날을 기다린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애초에 애도조차 제대로 못 받도록 사람들을 방치하여 망령으로 만들 신이라면 그것이 신이 맞느냐고, 그건 오히려 악마에 가깝지 않느냐고 묻는다. 메이야수는 이러한 무신론과 종교의 대립에 서로의 존재가, 정확히는 서로의 논리적 결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신론자는 종교가 상정하는 공포스럽고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성립하고, 신자는 처참한 죽음들에 대한 절망으로 황폐해지는 삶에 대한 거부를 핵심으로 가져간다. 이때 이 둘은 각자 자신의 절망을 다른 이의 절망에 대한 회피를 통해 가리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발생하는 딜레마란, “망자를 위한 또 하나의 삶에 관한 절망이냐, 그러한 죽음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 신에 관한 절망이냐”, 혹은 “망자를 위한 정의에 대한 믿음에 절망할 것인가, 정의 없는 신을 절망적으로 믿을 것인가”가 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망령의 딜레마란 무신론과 종교가 망령들에 대한 근본적인 애도를 마주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를 의미한다(SD, 265~266).


메이야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적 비실존divine inexistence을 도입한다. 이것은 망자의 부활이라는 신자의 조건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자의 조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명제로, 무신론자와 신자의 주장 사이를 관통하여 제3의 길을 통해 딜레마를 해소한다. 그 명제는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God no longer exists”로, 이는 말 그대로 신의 비존재를 말하기 때문에 무신론자의 조건에 부합하지만, 동시에 도래할 신의 가능성뿐 아니라 망령들에게 죽음 이외의 무언가를 약속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기대까지도 담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자와 신자의 주장을 모두 ‘필연성’이라는 단어로 엮어냄으로써 가능해진다. ‘신은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한다’와 ‘신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라는 두 문장은 서로 정반대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신의 존재에 대해 어느 방향으로든 확언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신의 비/존재에 대한 필연성이다. 그래서 메이야수는 이를 우연성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무신론과 종교가 신, 그리고 필연성과 맺고 있는 관계를 풀어헤치는 것이 그의 목표로, 이를 통해 그는 무신론과 종교를 잠재적인 것, 즉 ‘신은 존재할 수 있다God could exist’에 다시 접붙이려 한다. 즉, 그는 신을 절대적 존재에서 끌어내리고, 절대성의 위치에 우연성을 놓고자 하는 것이다. 신의 도래, 신의 구원조차 신의 의지나 필연성이 아닌, 절대적 우연성에 기반한다.


이렇게 신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하이퍼-카오스 때문이다. 도래해야 할 신의 길은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으며, 그 우연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혼란 혹은 혼돈의 조건조차 초월해 버린 혼돈으로서의 하이퍼-카오스에서 도출되는 원리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메이야수의 질문을 인용하자. “현재 세계가 어느 날 우리 발밑에서 사라질 수 있을 법한 유동적인 지반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MF, 68~69) 이를 탐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동적인 지반 위에 세워진 세계를 그려낸 과학 밖 소설일 것이다.


메이야수의 정의를 따를 때, 넷플릭스 시리즈 <러시아 인형처럼>은 과학 밖 소설이다. 그는 FHS-2를 만들기 위해 재난, 우스꽝스러운 넌센스, 혹은 일상소설 속에서 지끈거리는 불확실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러시아 인형처럼>은 주인공의 기준에서 본다면 엄연한 단절이자 재난을 바탕으로 한다. 시즌 1의 경우, 나디아와 앨런은 나디아의 생일에 갇히고 만다. 이들은 계속해서 동시에 죽고, 다시 동시에 같은 날에 되살아나서 같은 날을 반복해서 살아간다. 이처럼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재난 안에서 이들의 일상은 불확실성과 황당한 넌센스들로 가득하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황당하게 죽을지 알 수 없는, 반복되지만 어딘지 조금씩 다른 ‘같은’ 하루의 모습, 죽음이 반복될 때마다 점차 사라져 가는 사람들, 그렇게 무너져 가는 세계, ……. 시즌 2의 경우, 두 사람은 나디아의 생일을 앞두고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지하철을 발견한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자신들의 모계를 거슬러 올라 자신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된다. 시간들이 무너지는 순간에 나디아의 입에서는 ‘양자 얽힘’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지만, 그것은 극중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기보다 오히려 나디아의 입버릇처럼 나오는 무의미한 추임새에 가깝다.


과학 소설은 그러한 사건들을 결국 하나의 원리로 해명해내고, 판타지 소설은 없을 법한 정합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 결국 둘 모두 핵심은 정합성 혹은 해명이라는 필연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인형처럼>에 그런 필연적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일은 그냥 일어난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해석의 영역이다. 시즌 1에서 나디아와 앨런이 그날 서로를 구했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이 사건 전체를 해명하는 필연적 원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유동적인 지반 위에 세워진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갖게 되는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The universe is trying to fuck with me, and I refuse to engage. Do you hear me? I won’t do it!” (S01E01)
“When the universe tries to fuck with you, let it.” (S02E01)


그런 면에서 시즌 1의 1회와 시즌 2의 1회에서 나디아가 상황 파악을 한 뒤에 하는 말이 상반된 것은 재밌는 지점이다. 시즌 1에서 자신의 생일을 반복해서 살아내고 죽어내면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죽음들이 세계를 지워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디아는 결국 앨런을 구함으로써(또한 다른 시간선timeline에서 앨런에게 구해짐으로써) 세계를, 자신의 시간을 구한다. 아니, 사실 그 또한 알 수 없다. 마침 그 순간에 시간이 다시 선형적으로 굴러가게 되었을지도. 하이퍼-카오스에서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시즌 1만 놓고 보았을 때, 그 우연은 마치 나디아와 앨런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는 목적 아래에서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서로를 구원해야만 우리의 세계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교훈.


그래서 이 시리즈 전체를 정말 과학 밖 소설로 만드는 것은 시즌 2가 된다. 시즌 1에서 선택권 없이 자신의 생일을 끊임없이 살고 죽어야 했던 나디아와 앨런은 시즌 2에서 선택권을 행사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특히 나디아는 자기 어머니와 할머니의 과거를 바꿔서 자신의 삶 전체를 바꾸고자 한다. 그러나 정작 나디아가 끊임없이 마주하는 것은 변화의 불가능성이다. 그가 어떤 변화든 만들려고 하면, 그 시도는 곧 방해되고 실패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현재를 만들어낸 과거의 선택들,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선택들을 자기 스스로 내리게 된다. 심지어 그에게 ‘최고의 어머니’였던 루스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다. 난데없는데다가 통제도 안 되는 시간여행, 도시 아래에 있다는 ‘공허void’로의 추락, 붕괴하는 시간 속에서 갓 태어난 자기 자신을 안고 도망 다니기, …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모두 거치면서 그가 결국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최악의 나일 수 있었던 나’였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표정, 이 모든 상황을 거친 뒤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 내뱉은 뒤 거울을 보는 그의 표정은 묘하다. 이 지점에서 그는 ‘루스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최악의 나’가 아닌, ‘최악의 나일 수 있었던 나’가 된다. 웃을지 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어찌 보면 그 둘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가 떠올리는 건 무엇이었을까.


비이성의 망령을 애도하며


시즌 1에서 나디아의 어머니 레노라는 나디아가 겪는 모든 문제의 원인처럼 나타난다. 시즌 2에서도 나디아는 자신의 어머니가 최악의 어머니이고, 그런 어머니 대신 자신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사할 양육자들을 갓 태어난 자신에게 주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은, 세계는 붕괴하려 한다. 하이퍼-카오스조차 두 명의 나디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견디지 못한 것이었을까. 영국의 SF 드라마 <닥터 후>의 용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타임 패러독스time paradox가 벌어진 것이다. 같은 존재가 한 시간대에 둘 이상 존재할 수는 없다. 물론 또한 알 수 없다. 하이퍼-카오스를 가정한다면, 그것조차 우연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렇게 말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유동하고 붕괴하는 세계의 원인이 아니라, 거기서 대처해나가는 이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단 한 번도 원인을 조명하지 않는다. 원인에 대한 유추는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을 뿐, 드라마는 계속해서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인물들에 집중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비이성에 대한 옹호다. 하이퍼-카오스는 이성적으로 도출된 결과물인 동시에, 과학적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우연들을 생산해낸다. 하이퍼-카오스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분명 비이성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드라마 전체에서 비이성을 상징하는 것은 명백히 레노라다. 그는 소위 ‘미친 년’이자 ‘나쁜 엄마’다. 조현병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정신질환은 ‘crazy’로 표현될 뿐이다. 그러나 시즌 2를 보면, 과연 그것이 정말 레노라의 책임이었을까,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나디아를 임신한 레노라의 몸에 들어간 나디아가 제정신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그는 다양한 결정들을 내리고, 그 결정들은 결국 현재의 나디아에게로 이어진다. 레노라에게 들어간 나디아가 소위 ‘헛짓’을 해도 주변에서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을 보면 나디아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레노라는 변덕이 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결국 나디아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결정들은 레노라에게 들어간 나디아가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나디아는 레노라의 손에 자란 나디아다. 삶의 결정들에서 레노라와 나디아는 그런 방식으로 순환하면서 포개어진다. 정신병원에 앉아 있을 때 레노라가 나디아를 안아주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맥락에서 옹호되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레노라다. 레노라의 광기 혹은 비이성, 비합리는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중요하지도 않다. 핵심은 나디아가 레노라의 삶을 바꾸고자 레노라의 몸에 들어가기를 반복해서 선택함으로써 결국 레노라의 결정과 나디아의 결정이 같아지고, 둘의 광기가 포개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광기의 오버랩, 광기의 옹호는 사용하는 음악에서 두드러진다. 시즌 2의 1회가 끝날 때, 레노라에게 들어간 나디아는 돈의 행방을 쫓다가 결국 실패한다. 이때 나오는 음악은 미국 블루스의 전설 중 한 명인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의 <Get It While You Can>이다. 재니스 조플린은 헤어스타일로 보아도, 그의 작품 세계와 삶을 보아도 레노라와 유사점이 너무도 많다. 둘 다 부스스하고 곱슬곱슬한 긴 머리를 하고, 자유에 대한 욕망, 충동에 대한 욕망이 삶의 중심축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를 확언해주는 것은 시즌 2 마지막 회다. 해당 회차의 끝에서 나오는 장면은 루스의 장례식이지만, 그때 흘러나오고 있는 음악은 영국 밴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1975년 앨범 《Wish You Were Here》의 첫 번째 트랙, <Shine On You Crazy Diamond>다. 이 곡은 데뷔 당시 리더였던 시드 배릿Syd Barrett에게 헌정하는 곡으로, 자신의 광기를 통제하지 못해서 스스로 떠난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루스에 대한 애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선곡이다. ‘최고의 어머니’ 루스에 대한 애도의 장에서, 거울 앞에 담배를 들고 홀로 선 나디아는 ‘최악의 어머니’이자 ‘미친 년’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와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여행을 했을 때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확인하던 것처럼, 그는 마지막에 자신의 얼굴을 보며 레노라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이 너무나도 쉽게 ‘미친 년’, ‘나쁜 년’이 되는 세상에서, 모계의 모든 실패를 몸소 되풀이한 나디아는 비로소 어머니를 애도할 수 있게 된다. 미친 년, 나쁜 엄마에 대한 애도는 그렇게 비이성에 대한 옹호로 나타난다. 비이성의 망령에 대한 애도는 그렇게 완수된다. 나디아는 거울 속의 얼굴에서 레노라를 떠올리며, 그와 함께 살아간다. 그렇게 레노라에게는 또 하나의 삶이 주어진다. 


하이퍼-카오스에서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애도다. 비이성의 망령에 대한 근본적인 애도. 그에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그러나 신의 구원이 언제 찾아올지는 여전히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구원이 찾아오더라도 왜 찾아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적 비실존에 내재하는 절대적 우연성으로서의 하이퍼-카오스.


우리의 세계가 왜 무너지는지, 혹은 왜 무너지지 않는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다. 아니, 이제는 알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 우연 때문이라는 걸.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온 우주가 나를 엿 먹이려고 한다면, 그러라지’라는 태도로부터 가능해지는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절대적 우연성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해지는 근본적인 애도, 그리고 비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애도가 가능하게 하는 비이성의 망령의 새 삶. 미친 년, 나쁜 년의 부활과 화해. 우연성 이후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런 태도들일 테다. 비이성을 옹호하라. 이성적이지 않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우주를 옹호하라. 미친 년, 나쁜 년을 옹호하라.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우리 자신으로부터든, 우리 자신의 역사로부터든, 가족의 역사로부터든. 모든 이해력이 와해되는 한계상황에서 살아갈 자유가 아닌 이상, 자유란 아무것도 아니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빈곤은 형벌도, 개인의 책임도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