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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Oct 16. 2021

빈곤은 형벌도, 개인의 책임도 아니다

<갯마을 차차차>가 빈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하여

* <갯마을 차차차> 15회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 시청자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는, 심지어  나라에서는 <오징어 게임> 자리를 빼앗고 넷플릭스에서 1위를 차지하는 <갯마을 차차차> 15회를 봤다.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꼼꼼히 챙겨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흐름과 인물 관계도를  만큼으로는 봐서 알고 있었다.


15회는 홍반장의 숨겨진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진에서 지피디 팀의 촬영이 끝난 후 막내 피디는 홍반장의 본명인 '홍두식'을 부르며 그가 자기 아버지를 거의 죽였다며 그를 주먹으로 때렸다. 홍반장은 그게 사실이라고, 자신의 은인이었던 형도 자기가 죽인 거라고 말했다.


그의 과거는 이렇다. 거의 친형과도 같았던 기숙사 룸메이트의 권유로 홍반장은 펀드매니저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일이라는 말에 설득이 되었다고. 그는 거기서 리스크가 높은 상품으로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었다.


평소 두식과 친분이 있던 그 자산운용회사 건물의 경비노동자는 그에게 “간곡히 부탁”해서 그 상품에 가입했는데, 얼마 후 금융계에 큰 위기가 와서 수익률이 마이너스 70%까지 갔다. 경비노동자는 머리를 치면서 자기 자신을 탓했다. 자기 부인이 ‘뜨거운 물 나오는 집’에서 살게 해주고 싶고, 자기 아들에겐 ‘좋은 양복’을 입히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 전셋돈을 빼고 대출까지 더 받아서, 소위 말해 ‘영끌’을 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펀드에 때려 부었다.


자신은 이해하기도 힘든 절망적인 상황에 그는 자살기도를 했고, 이 소식을 들은 두식은 그의 병원을 찾아가려 하고, 친형과도 같았던 그 형은 두식 대신 운전을 한다. 하지만 운전 중 두식을 위로하던 형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두식만 살아남는다.


이 일들은 누구의 책임일까. 홍반장의 생각처럼 본인의 책임일까? 드라마는 이를 홍반장의 책임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 형이 죽기 전에 했던 말, 그리고 환영인지 귀신인지 모를 형태로 나타나서 한 말은 정확히 드라마의 전체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한다.


“니 잘못 아니야.”


물론 나도 이 모든 상황을 ‘홍반장’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이를 홍반장의 책임이라고 한다고 해서 특별히 훌륭한 재현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개인적 비극 안에서 사회적 문제를 발견하기보다, 사회적 문제를 모두 개인적 비극, 인격과 감정의 문제로 환원한다. 두식은 경비노동자에게 펀드를 특별히 권유하지도 않은, 오히려 리스크가 커서 말린, 직접 가입을 시키지도 않은, 매일 그에게 음료수를 하나씩 사다 준, 그럼에도 그 모든 일에 대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리고 있는 전직 펀드 매니저다. 거기에 본인 대신 운전하다 죽은 형에 대한 죄책감까지.


드라마에서도 나오듯,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것, 충분히 금융상품을 설명하지 않은 것, 혹은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것이 그 경비노동자의 펀드 가입과 자살기도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홍반장을 변호하는 데에 온 힘을 쏟는다. ‘사실은 이러했다’라는 서사 안에서 홍반장을 때린 경비노동자의 아들은 결국 ‘잘 모르면서 사람을 때린’ 사람이 되고, ‘자기가 취업을 못하는 걸 철도 없이 집안 탓한’ 사람이 되었다. 홍반장은 그런 그의 정장과 학자금대출을 모두 갚아주고 아파트로 집까지 옮겨준 사람이었고. 이런 맥락에서 홍반장의 "내 잘못이야"라는 말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야" 혹은 "당신 아버지의 책임이 아니야"보다는 그의 죄책감과 '인성'을 드러내는 대사로 작동한다.


드라마 전체가 사실 홍반장과 치과의 관점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 상황에 홍반장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더 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유족에게 전달했으며, 펀드매니저 일을 그만두었고, 내내 ‘좋은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경비노동자의 부인과 형의 아내에게 비난을 받고 그 죄책감을 내내 안고 있는, 이런 온갖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격자’로서의 면모를 그려내는 서사를 통해 드라마는 홍반장에게 한 마디를 전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니 잘못 아니야.”


그런 와중에 홍반장이 치과에게 한 말에는 “불도 안 나오는 집에 나를 가뒀는데”라는 표현이 나온다. 경비노동자가 살던 ‘뜨거운 물도 안 나오는 집’과 이것이 대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홍반장이 공진으로 돌아간 것은 단순히 감리씨의 문자메시지 때문이 아니다. 앞서 대사에 나온 표현처럼, 자신을 ‘가두고’ 싶었던 것이다. 도시의 잘나가는 펀드매니저로 살던 그에게 시골과 빈곤은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감옥'과도 같은 형벌이었다.


이처럼 빈곤을 형벌로 이해하는 태도는 아주 문제적이다. <갯마을 차차차>와 <펜트하우스>는 여러 면에서 크게 다르고, 또 자신의 죄나 책임을 얼마나 인정하고 인식하는지도 다르지만, 죄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형벌을 빈곤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을 공유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빈곤한 사람이 마치 자신의 잘못으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서 빈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여기서 반드시 논해져야 할 '사회'는 사라지고 만다.


<갯마을 차차차>는 경비노동자의 투자와 자살기도, 그에 따른 형의 사망까지도,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홍반장의 잘못이 아니라고 강하게 변호하면서도, 경비노동자가 사실상 전재산을 펀드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의 아들도 형의 부인과 형의 환영 혹은 귀신과 같은 흐름 안에서 홍반장에 대한 ‘용서’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드라마가 빈곤을 개인의 책임으로 이해하는 한, 경비노동자의 무리한 투자를 이해하려 노력할 길은 없다.


홍반장에게는 자신을 믿어주고 걱정해주는 공진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홍두식'은 자신이 잘못한 사람들에게 사실상 용서받았다. 내일 마지막 회가 나올 테니, 아마 치과와 홍반장의 관계도 축복받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것이고. 홍반장이 불행해지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빈곤을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건 좀 너무 게으르지 않나.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고, 따라서 누군가가 빈곤한 것은 그가 잘못한 탓이 아니다. ‘영끌’하는 경비노동자, 사실관계도 정확히 모르고 분노해서 사람을 때리는 그의 아들. 가난한 사람을 감정적인,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재현하는 것은 편견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실제로 비합리적인 기대에 돈을 걸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거기까지 나아갈 생각이 전혀 없다. 사실 애초에 거기까지 바란 적도 없지만, 경비노동자의 서사를 저런 식으로만 소비하는 게 불쾌해서.


“니 잘못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 두식만이 아니다. 훨씬 복잡한 문제에 대한 논의는 그 지점에서 겨우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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