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룩 Aug 06. 2021

혁명을 전시함으로써 혁명 이전에 머무르기

영화 <블랙 위도우>(2021) 리뷰

* 영화 <블랙 위도우>에 대한 스포일러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옐레나, 멜리나, 알렉세이를 (나타샤의 기준에서) 동생,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나에게도 이 가족은 진짜였다'라는 대사에 따라, 그리고 편의상 동생, 엄마, 아빠라고 취급하기로 한다.


며칠 전, 나는 새로 문을 연 연남CGV로 친구와 <블랙 위도우>를 보러 갔다. 나타샤 로마노프뿐 아니라 다른 여성 캐릭터들의 활용에서도 마블에서 지금껏 찾아보기 어려웠던 괜찮은 여성 서사라는 평과 함께, 한편에서는 기존의 마블 영화들과 전개상 큰 차이가 없다는 평을 듣고 나서 영화를 보러 갔다. 마블 영화들을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헐리웃 액션 영화를 좋아하고 다른 마블 영화를 모두 봤으므로 이걸 안 보면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일 것 같았다.


여성 캐릭터들의 활용에서 이전보다 상당히 나아졌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단지 기존 마블 영화에서 주인공만 여성으로 바꿨다는 방식의 평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운 건, 이 영화는 여러 측면에서 '가스라이팅에서의 탈출'에 대한 은유로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어린 여성들을 사실상 납치하여 '위도우'라는 킬러로 만들어내는 '레드 룸'이라는 비밀 기관이 등장한다. 공중의 구름에 숨어 있어서 지상에서는 찾기 어려운 이곳에서 여성들은 화학적으로 세뇌되고, 그곳의 수장인 드레이코프의 명령에 질문 없이 복종하게 된다. 드레이코프는 페로몬을 활용한 또 다른 화학적 방법으로 여성들이 자신을 공격할 수 없도록 만든다. 물론 그는 직접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렇게 하지 않고도 상대가 자신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몇 여성들은 그 화학적 세뇌를 푸는 해독제를 만들어냈고, 주인공 나타샤의 동생인 옐레나는 자신이 쫓던 이탈자가 뿌린 해독제를 맞고 세뇌에서 풀려난다. 그리고 해독제들을 챙겨서 자신의 동료들을 하나씩 해방시키고자 한다. 중간의 디테일들은 어느 정도 일단 생략하고, 옐레나는 나타샤와 만나서 드레이코프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던 아버지 알렉세이를 빼내고 어머니 멜리나를 찾아간다. 그리고 사실상 알렉세이를 그닥 고려하지 않은 작전을 통해 레드 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레드 룸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디테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중심에는 드레이코프라는 남성에 의해 이루어진 여성들에 대한 화학적 세뇌가 있다. 드레이코프는 죽을 뻔한 자신의 딸을 세뇌하여 '태스크마스터'라는 무기로 만들어 나타샤를 죽이려 한다. 화학적으로 세뇌된 레드 룸의 여성들도 드레이코프를 공격하고 레드 룸을 무너뜨리러 온 나타샤를 (명령에 따라) 아주 고통스럽게 죽이려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싸우는 도중에 해독제를 맞는다.


성별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이를 재구성하면, 어느 권력자 남성에 의해 운영되는 한 시설은 어린 시절부터 여성들을 납치하여 취약한 조건으로 만들어낸 다음 그들을 화학적으로 세뇌하여 복종시키고,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질문을 던지는 여성, 이탈하는 여성이 생겼고, 이들은 세뇌를 푸는 약을 만들었다. 남성은 세뇌당한 여성과 세뇌가 풀린 여성이 싸우게 만들지만, 그 판은 다른 여성에 의해 깨지고, 그 남성은 자신이 만든 시설의 붕괴와 함께 하늘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여기서 잠시 하나의 개념을 소개하고 싶다. '유도체화(derivatization)'는 앤 카힐(Ann J. Cahill)이라는 학자가 '대상화/객체화(objectification)' 개념의 포괄성을 해소하고자 도입한 개념이다. 대상화는 그 양상이 매우 다양하고, 또한 어떤 경우에도 사실상 피할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앤 카힐은 대상화의 방향성과 정도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유도체화는 한 쪽이 오직 다른 한 쪽을 오직 자신의 욕망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자신의 그림자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대상화가 저항하기 힘들 만큼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파고드는 상황을 말한다(1).


나는 가스라이팅이 '유도체화'의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한다. 레드 룸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화학적 요법은 여성이 남성에게 질문하지 못하게, 남성을 공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성차별 사회의 여성 통제 기제로서 가스라이팅의 은유다. 공교롭게도, '유도체화'는 원래 화합물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면서 구조를 조금씩 바꾸어 자신이 원하는 성질로 만드는 걸 의미하는 '화학 용어'다.


이때 해독제의 형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해독제는 주사나 알약 등의 형태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안에 빨간색의 가스가 들어있는 투명한 무엇이었다. 그 해독제는 깨짐으로써 빨간 가스를 주변에 분사하고, 그 가스에 노출된 여성들은 화학적 세뇌에서 풀려났다. 이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유래하여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빨간 약'이 '가스등을 깨뜨림으로써' 작동하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가스등은 깨졌고, 여성들은 해방되었으며, 가스등을 켜던 남성과 그의 세상은 무너졌다.


여기까지  ,  영화는 가스라이팅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생각할  있다(실제로 감독은 이 영화가 미투 운동의 흐름과 관련이 깊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 나와 친구가 나눈 대화의 핵심은 '민영화(?)'라는 다소 뜬금없는 키워드였다. 이는 가스등이 깨진 이후,  여성들이 어디로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었다.


레드 룸의 모든 여성이 세뇌에서 풀린 직후, 나타샤는 그들에게 '이제부터 모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시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무책임한 발언이기도 하다. 멜리나의 말마따나, 케이지에서 태어난 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그것이 자신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갇혀 지내던 사람의 삶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단번에 모든 것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부터 다시 배워나가고 서로를 지탱해줄  있는 관계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장애인의 탈시설이 단지 '시설을 없애는 ' 아니라, '새로운 지역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이자 '새로운 삶을 기획하는 '이라는 점을 생각해도 이는 명백하다(2).


하지만 나타샤가 다른 여성들에게, 멜리나가 나타샤와 옐레나에게 연대하는 과정이 ‘가족 ‘여성이라는 키워드 외에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연대(solidarity) 새로운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이 너무도 부재한 것이 아닌가. 연대 과정은 미투 운동의 맥락과 연결하여 어느 정도 생략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그 이후에 대한 상상력이다.


나타샤가 자신을 쫓아온 다른 이들과 상대할 , 옐레나와 다른 여성들은  삶을 찾아 함께 떠났다. 그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나는   없다. 다만 우리에게 영화가 보여준 것은 옐레나의 미래였다. 쿠키 영상에서 나타샤의 묘비 앞에  옐레나에게는 그의 상관이 와서 새로운 '타겟' 준다. , 옐레나는 여전히 킬러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릴  붙잡혀 평생을 레드  소속 킬러이자 스파이로 살아온 옐레나에게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수도 있고, 그것이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옐레나는 실존 인물이 아닌 캐릭터이며, 그가 레드 룸의 붕괴 이후 살아가는 삶의 연출은 결국 가스등이 깨진 이후에 대한 감독과 작가  제작진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 소련의 국책 사업을 이어받은 레드 룸에서 길러져서 그 조직을 위해 일하던 위도우들이, 결국 세상에 나와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청부살인뿐이라면, 가스등 탈출 이후 위도우의 삶은 단지 살인청부업의 민영화일 뿐이란 말인가. 이것이 나와 친구의 허탈함이었다. 나에게 이는 혁명의 이후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폭력 혁명을 단지 스펙터클로만 소비하고 마는 빈약한 상상력의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를 상기했다. 하나씩 스쳐지나가는 실망의 기억들은 고스란히 <블랙 위도우>의 결말에도 포개어졌다.


2시간 반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영화는 나름 흡입력이 있었고, 특히 '찌질한 가부장' 그 자체인 (사실 너무 그 자체라 약간 귀엽기까지 했던) 알렉세이 캐릭터의 역할도 이 여성 서사 안에서 적절한 '토큰'이어서 구성상 여러 재밌는 포인트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유 있는 여성 서사, 스칼렛 요한슨이 제작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 자신을 위해준다는 남성에 의해 억눌려 있던 여성들이 거기서 깨어나 그 세계를 부숴버린다는 <캡틴 마블>과의 유사성 등 영화에 즐길 포인트는 충분하다.


다만, 이제 우리에게는 혁명 이후의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나. 통쾌한 혁명을 결말로 삼는 작품들은 사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혁명 이전에 머무르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렴풋하게나마, 아주 희미하게나마 탈출한 여성들이 조금은 다른 삶을 모색하고 있을 가능성을 암시라도 해줄 수는 없었던 걸까. 가스등이 깨지는 과정의 통쾌함을 넘어, 처음으로 자신이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혹은 실수하고도 다시 일어날 기회를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1) Cahill, A.J. (2014), The Difference Sameness Makes: Objectification, Sex Work, and Queerness. Hypatia, 29:840-856.

(2) 여기에 대해서는 한 발달장애인이 탈시설 이후 마주한 수많은 과제를 참고하라. "82년생 발달장애인 최아람의 탈시설 이야기", 비마이너, 2021.07.09.

매거진의 이전글 평화라는 말로 기만을 포장하지 말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