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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Oct 16. 2020

평화라는 말로 기만을 포장하지 말라

<닥터 후 9> 'Zygon Invasion&Inversion'을 보고

* 이 글에는 닥터 후 시즌 9과 50주년 기념 에피소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닥터는 주기적으로 재생성(regeneration)을 하기 때문에, 여러 배우가 연기를 맡았고 후비안들은 대체로 최애 닥터가 있다. 한 명의 컴패니언이 여러 닥터에게 겹치기도 하고, 시즌으로 부르기에는 한 시즌만 하지 않기 때문에, 닥터는 대체로 닥터를 맡은 배우의 이름을 따서 애칭을 붙여 부른다. 시즌1은 에클닥(크리스토퍼 에클리스턴), 시즌 2~4는 테닥(데이비드 테넌트), 시즌 5~7은 맷닥(맷 스미스), 시즌 8~10은 카닥(피터 카팔디), 시즌 11~13은 휘닥 혹은 조닥(조디 휘태커)이 주인공이다.

*** 이 글에서 등장하는 '클라라'는 맷닥 후반부에서 카닥 중반부까지 등장하는 컴패니언이다.


난 후비안(Whovian)이다. 후비안은 영국 드라마 <닥터 후>의 팬 혹은 팬덤을 일컫는 말인데, 나의 경우 고1 때 <닥터 후>에 빠져서 (요인이야 다양하겠으나) 결국 재수까지 했다. 시리즈가 5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올드 시즌은 손도 못 댔고, 대신 '에클닥-테닥-맷닥-카닥'으로 이어지는 뉴 시즌을 열심히 본 후, 첫 여성 닥터인 '조닥'이 나왔다는 시즌 11은 올레티비에 없어서 몇 년째 포기하고 있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왓챠를 보고 있지만, 거기에도 시즌 11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왓챠에서 시즌 11까지 업데이트를 완료한 것을 확인해 버렸다.


'드디어, 때가 왔다.'


바로 시즌 11을 켜려다가 문득 내가 시즌 9까지만 봤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 그럼 시즌 10부터 보는 게 예의지. 그래서 시즌 10의 1회를 틀었더니 닥터의 옆에는 내가 모르는 인물이 있었다. 어, 그럼 시즌 9부터 다시 봐야겠네. 그래서 시즌 9의 문을 여는 크리스마스 특집을 틀었는데, 클라라와 닥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 방법이 없네. 시즌 8부터 보자. 결국 나는 시즌 8 시작 직전의 크리스마스 특집부터 보면서, 맷닥이 카닥으로 변하는 것부터 다시 봤다. 지난 방학에는 50주년 기념 에피소드를 다시 본다고 그 앞의 시즌들을 다시 봤었는데, 결국 이렇게 또 N회차를 돌리나 싶고.


그렇게 시즌 8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보던 중, 어젯밤에 시즌 9의 7~8회를 다시 봤다. 바로 Zygon Invasion과 Zygon Inversion. 자이곤(Zygon)은, 극중 대사를 빌리자면, 사람 기준에서는 '파충류'에 가까운 외계 생명체로, 다른 생명체의 모습을 복제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손에서 전기를 뿜어서 앞에 있는 사람을 단번에 죽이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래 살던 행성을 잃고 지구에 정착했는데, 이때 조건은 자이곤이 원래 모습을 감추고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인간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야만 평화가 유지된다는 게 기본 전제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50주년 기념 에피소드인 '닥터의 날'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친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캡틴 마블>(2019)의 스크럴과 <엑스맨>(2000~) 시리즈가 떠오른다고 했다. 스크럴도 인간의 모습을 복제할 수 있었고, <엑스맨>의 캐릭터 중 미스틱도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복제할 수 있다. 특히 친구는 자신들의 행성을 잃고 지구에 온 난민의 신세라는 점에서 스크럴이 <닥터 후> 속 자이곤의 모습과 겹친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예전에 <캡틴 마블>을 보고 남긴 글의 일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 영화에서 스크럴은, 퓨리의 표현에 따르면, “도마뱀”처럼 그려지는데 이는 한참 된 미국드라마 ‘V’의 상상력을 별로 못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징그러운’ 파충류(여기서 <엑스맨> 시리즈의 미스틱도 떠오른다). 이러한 모습은 관객이 첫눈에 스크럴을 혐오하고 적대하도록 만든다. 위협적인 존재, 스크럴은 늑대처럼 울기도 하고, 으르렁대기도 한다. 본래는 동물처럼 행동하고 파충류처럼 생겼지만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스크럴은 철저히 타자화되어 있는 동시에 그 위장술을 통해 완벽에 가까운 패싱 능력을 갖추어 감시망에서 벗어난다. 그런 면에서 스크럴은 안전과 동질성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 그려지기에 알맞은 종족이었다.


2015년에 나온 <닥터 후> 시즌 9의 자이곤이 '파충류'로 묘사된 것도 이처럼 '한 눈에 징그러운 존재'를 묘사하는 시각적 클리셰의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이곤은 각 개체의 생김새도 그렇지만, 자이곤의 근거지에 있는 핵심 장치에서도 '징그러운 모습'은 두드러진다. 분명 기계 장치임에도 끈적거리는 촉수를 만져야 작동하는 모습은 흡사 게임 스타크래프트 속의 저그 플레이 화면을 연상시킨다. 자이곤이 너무도 징그럽게 생긴 나머지, 사람들은 자이곤을 보자마자 공격하거나 피한다. 그래서 자이곤들은 자신이 들키면 살아남기 위해 목격자를 죽여야만 한다. 그렇게 자이곤은 살인자가 된다.


극중의 자이곤 급진파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자이곤들의 본래 모습을 억지로 드러나게 하고, 그들이 '자이곤 해방'을 위한 자신들의 계획에 복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나는 이러한 설정이 소수자 운동에 대한 지극히 왜곡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설득하려면 현실과 드라마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닥터 후>는 명백한 SF 시리즈다. (물론 어느 정도 현실에 기반을 두지만) 현실에 없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판타지와는 달리, SF 시리즈는 지금의 현실과 그 연장선으로서의 발전된 세상을 다룬다. <닥터 후>는 배경이 지구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건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며, 실제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도 지극히 과학적 언어로 묘사된다. 그리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배경은 영국, 그것도 2010년대의 런던.


하지만 무엇보다도 <닥터 후>와 현실이 연결되는 지점은 그러한 배경보다도 '기억'의 문제에 있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타임라인의 변화나 기억 조작 등으로 인해 일반 대중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곤 한다. 닥터는 우주를 통째로 리부트하거나, 시간이라는 차원 자체를 뒤흔드는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 혹은 '사일런스' 같은 종족을 도입함으로써 봤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우리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분명 닥터가 이 세상을 구하고 돌아다닌다는 독특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백년전쟁이나 반 고흐의 그림이 '사실은 이러했다'라는 방식으로 드라마의 흔적을 기입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닥터 후>의 현실감은 마블 시리즈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실제 시공간 배경'에다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라는 문법을 추가하여 얻어낸 효과다. <닥터 후>는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삼으면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온갖 독특한 사건을 과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지극히 현실적인 SF 시리즈를 지향한다. 시리즈에서 내내 사용되는 장치들은 우리가 <닥터 후>를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환상적 세계가 아닌 현실 속 우주를 과학적으로 인지하게끔 한다.


<닥터 후>가 시리즈 내내 사용하는 그러한 방법과 더불어, 이번 두 에피소드에서 사용된 온갖 이미지와 설정들은 명백히 현실 속 소수자 운동에 대한 알레고리다. 우선 자이곤의 복제 능력이나 '파충류' 같은 외모, 난민이라는 설정, 사람들 사이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는 설정은 '인간'과 '비인간',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동시에, 타자가 자신을 감추며 살아가는 패싱 혹은 커버링 전략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 패싱은 아예 타자임을 감추는 것, 커버링은 타자임을 알더라도 티를 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이곤은 명백히 소수자의 은유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에피소드 7은 소수자들의 해방 운동, 혹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해석이자 재현이며, 에피소드 8에서는 비평으로 나아간다. 이 두 에피소드가 소수자 운동을 평가하는 방식은 다음의 단계를 따른다.


(0) 모두의 화합 혹은 평화는 소수자의 다수자로의 동화를 통해서만 달성된다.

(1) 그런데 소수자 운동은 이해해 줄 만하지만 과도한 요구를 한다.

(2) 그 과도한 요구 때문에 일부 급진적 정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소수자나 다수자는 피해를 입는다.

(3) 따라서 과도한 소수자 운동은 평화를 해친다.

(4) 그러므로 과도한 소수자 운동은 교정되어야 하고, 급진파는 동화되어야 한다.


여기서 (0)은 '오스굿'이 상징하는 평화 조약 혹은 휴전 조약으로 나타난다. '닥터의 날' 에피소드에서는 지구에 온 자이곤 중 하나가 외계 종족과의 외교나 전쟁을 다루는 영국의 '유닛'의 요원 중 천식 환자인 '오스굿'의 모습을 복제한다. 이처럼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혹은 '피아구별'이 안 되는) 상황은 아주 큰 혼란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도리어 마지막에 평화로 전복된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혼란이 누가 누군지 알 필요 없는 평화로 전복되는 과정은 실제로 꽤 짜릿한데, 여기서 문제는 방향성이다. 누가 누군지 알 필요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자이곤의 존재가 기밀에 부쳐지고, 그들이 '인간'과 구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원래의 오스굿과 오스굿을 복제한 자이곤을 구별할 방법은 없고, 이 둘부터 서로를 구별하지 않는다. 둘은 모두 자신이 사람이자 자이곤이라고 말하는데, 닥터가 뒤에서 밝히듯 그들은 '혼종(hybrid)'이 된 것이다. 이때 두 명의 오스굿이 '침략'이나 '지배'가 아닌 '평화'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그들이 모두 '인간'의 형태를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살아가기로 약속했고,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혼종이든 이종이든, 그들이 받아들여질 방법은 오직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것뿐이다.


이어지는 (1)은 바로 시즌 9의 에피소드 7, 8에서 나오는 자이곤 급진파의 주장이다. 사실상 이들의 요구는 하나다. '본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지구를 정복하겠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자원을 내놓으라고 한 것도 아니며, 단지 인간을 복제하지 않고 자신들의 원래 모습으로 살아가겠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용광로'와 '샐러드볼'이라는 다양성 포괄 방식의 비유를 떠올린다면, 이들은 용광로에서 샐러드볼로의 전환을 요구한 것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몇 가지 설정이 (1)의 요구를 과도하고 폭력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여기서 (2)가 등장한다. 이 급진적 정파는 사람을 납치하여 정보를 빼내고, 그들을 복제하여 유닛에 침투하고, 런던의 지하 공간을 무단 점거하여 식민화하고, 일반 시민을 해치고, 동족의 본모습을 억지로 드러나게 만들어서 혼란을 야기한다. 즉, 급진파는 자이곤과 인간 모두에게 해로운 집단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가장 문제적인 요소는 바로 (2)에서 자이곤들을 보여줄 때 사용되는 이미지다. 자이곤 급진파의 훈련 장소는 투르메지스탄(Turmezistan)이라는 허구의 공간으로 나오는데, 이 장소의 이름이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극에서 투르메지스탄은 황량하고 모래 바람이 계속 불며, 그곳의 자이곤들은 중동 사람들이 연기했다. 게다가 후에 시즌 10에서 투르메지스탄은 피라미드가 있는 장소로도 등장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이집트나 중동의 다양한 국가들 사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기에, 그러한 시야 안에서 투르메지스탄은 명백히 중동의 어느 곳으로 맥락화된다.


이러한 '중동'의 이미지는 자이곤 급진파의 행동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이 모든 사건의 발발은 두 오스굿 중 한 명의 사망 이후였는데, 남은 한 명의 오스굿을 자이곤 급진파들이 납치했고, 투르메지스탄에 가두었다. 그리고 다소 흐릿한 화질로, 자신들을 상징하는 마크를 담아 영상을 만든다. 포로로 잡힌 오스굿은 자이곤들이 시키는 대로 글을 읽었고, 두 명의 자이곤이 그를 감시하듯 양쪽에 서 있었다. 여기서 자이곤이라는 '난민'은 '중동'의 이미지, 그리고 '테러리스트'의 이미지와 결합한다. 이들이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은 클라라를 복제한 자이곤이 닥터와 오스굿이 타고 있는 비행기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에서 확정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과도한 소수자 운동이 평화를 해친다는 (3)까지 극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렇다면 이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에피소드 7이 사건의 발단과 전개였다면, 에피소드 8은 절정과 마무리 단계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명백히 '절정'으로 설정된 부분이 너무나도 늘어져서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 설정들은 모두 에피소드 7에 등장한다. 에피소드 8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닥터 후>는 작가가 여럿이라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두 에피소드의 작가는 아래와 같이 나왔다.


에피소드 7: Peter Harness, Robert Banks Stewart
에피소드 8: Peter Harness, Steven Moffat, Robert Banks Stewart


스티븐 모팻은 그 유명한 <셜록>에도 참가한 사람으로, 닥터 후 뉴 시즌 중후반부의 분위기를 장악했다고 보아도 좋다. 그는 2005년부터 <닥터 후>에 작가로 참가하여 2010년부터, 즉 맷닥과 에이미가 나오는 시즌 5부터 본격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총 48개의 에피소드를 직접 썼고, 2010년부터 2017년까지 executive producer로서 78개의 에피소드에 관여하기도 했다. 피터 하네스는 이 글에서 다루는 자이곤 에피소드 둘과 투르메지스탄이 등장하는 에피소드(The Pyramid at the End of the World, 2017), 그리고 Kill the Moon(2014)이라는 에피소드에만 작가로 참가했고, 로버트 뱅크스 스튜어트는 자이곤이라는 캐릭터를 다루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IMDb를 참고하였다)


그러니 피터 하네스 작가가 에피소드 7, 8에 참가했다곤 하지만, 실제로 에피소드 8에서 에피소드 7의 서사를 받아서 마무리짓는 방식을 보면 피터 하네스의 작업은 스티븐 모팻이 미리 깔아둔 판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팻은 (0)~(3)까지의 해석을 어떻게 (4)로 이끌어갔나.


에피소드 8에서는 휴전 협정을 깨는 도구인 '오스굿 박스'가 등장한다. 자이곤 급진파의 지도자는 클라라를 협박하여 오스굿 박스의 위치를 알아내는데, 오스굿 박스는 알고 보니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고, 각각의 박스에는 버튼이 다시 두 개씩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에는 에피소드 7, 8 내내 급진파의 구호로 사용되는 "Truth or Consequences"를 상기하는 듯 "Truth" 버튼과 "Consequences" 버튼이 있었다.


유닛의 수장과 자이곤 급진파 지도자가 각각의 상자 앞에 서서 버튼을 두고 고민했다. 유닛의 수장은 자이곤을 모두 죽이는 버튼과 핵폭탄을 터뜨려 런던을 붕괴시키는 버튼 사이에서, 자이곤 급진파 지도자는 모든 자이곤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거나 인간의 모습으로 영원히 고정시키는 버튼 사이에서. 어떤 버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유닛의 수장은 결국 먼저 선택을 포기하고 휴전을 시도했으며, 자이곤 급진파 지도자도 곧 그렇게 했다. 위험부담이 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박스에는 사실 아무런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마치 ‘이기냐 지냐’에 이분법에 갇혀 있는 자이곤 급진파에게 그런 선택지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깨우쳐’ 주는 듯, 닥터는 오스굿 박스 앞에 선 둘에게 엄청난 길이의 일장연설을 쏟아냈다. 그 내용의 9할 이상은 자이곤 급진파 지도자를 향한다. 이건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며, 그건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자신이 바로 그러한 전쟁에서 사람들을 희생시킨 적이 있다면서, 그런 고통은 누구도 겪게 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온 삶을 끌고 와서 자이곤 급진파 지도자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 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것 자체는 나도 동의하는데, 거기서 그가 사용하는 근거 중에는 "대부분의 자이곤은 지금처럼 조용히 살고 싶어 한다"가 있었다. 닥터의 말은 아니었지만, 자이곤은 2천만이고 인구는 70억이라서 승산이 없는 게임인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는 대사도 있었다.


즉, 여기서 소수자 운동의 구조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요약된다.


(ㄱ) 소수자는 다수자보다 수적으로 열세이므로 승산이 없다.

(ㄴ) 대부분의 소수자는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려 하므로 해방 운동은 그들에게 피해를 준다. 


(ㄱ)과 (ㄴ)을 통해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다. '소수자 운동은 백해무익하므로 당장 멈춰야 한다.'


흑인들이 인종차별에 저항하며 민권 운동을 벌이면 백인들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이들, 성차별을 멈춰야 한다고 말하는 여성들에게 남성을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 성별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성에게 위험할 수 있다며 '여성의 공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명백한 위계가 존재하는 차별의 상황을 대등한 두 국가의 영토 전쟁으로 치환하는 것. 그리고 '전쟁'이라는 은유를 통해 소수자들의 주장은 곧 평화를 해치는 폭력적인 것이 되며, 따라서 얼른 진압해야 할 소란이 된다. 그러니 제1의 목표는 소란을 잠재우는 것이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성찰하는 게 아니다.


<닥터 후> 시즌 9의 에피소드 7, 8에서도 그렇다. 에피소드 7의 제목이 보여주듯, 제작진은 자신을 감추며 살고 싶지 않은 자이곤들의 운동을 '침략(invasion)'으로 규정한다. 침략은 내부와 외부를 전제한다. 함께 지구에 살아가고 있고, 심지어 런던 도심에서 섞여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임에도, 원래도 함께 살아가고 있었는데 본래의 모습으로 지내고 싶다는 그 움직임이 인류를 위협하는 외부 세력의 준동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닥터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냥, 조용히, 사람 사이에 섞여 살아라, 아무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자이곤이 해방을 원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의도 제대로 오가지 못한다. 이는 '정상화(normalize)'라는 단어의 사용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에피소드 7, 8에서 '정상화'는 자이곤이 인간의 모습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자이곤에 의해 발화되는 말이다. 즉, 여기서 '정상'은 본래의 모습이다. 드라마는 이를 급진파의 폭력성과 연달아 배치함으로써 그들이 말하는 '정상화'가 폭력적이라고 암시한다. 반면 에피소드 10 'Face the raven'에서 정상화(normalize)는 런던의 어느 골목에 숨어서 지내는 종족들이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치를 묘사할 때 등장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그 어떤 인물도 대사나 표정, 몸짓으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에피소드 10의 감독은 시즌 9의 에피소드 9,10에만 참가했고, 작가는 시즌 9의 에피소드 10과 시즌 10의 에피소드 3에만 참가했으므로, 시즌 9의 10회를 만들 때는 독창적인 해석보다는 모팻이 만들어 둔 맥락에 많이 의존했을 것이다. 뒤에서 모팻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겠지만, 이는 모팻이 평소 '정치'에 관해 가진 견해와도 일맥상통한다.


모팻은 결국 과도한 소수자 운동이 교정되고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4)로 나아간다. 에피소드 8은 다시 두 명의 오스굿이 생기는 것으로 끝난다. 어느 자이곤이 생존자 오스굿을 복제하였고, 여기서 다시금 둘 중 누가 '진짜'고 누가 '자이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둘 다 자이곤일 수도 있고. '닥터의 날'에서처럼, 상황은 아주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바로 여기서도 중요한 건 그 '평화'가 오직 '인간'의 얼굴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자이곤을 그려내는 방식을 생각하면, 평화의 상징인 오스굿이 천식이 있는 백인 여성이라는 것조차 드라마의 성차별적 요소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는 수준이다.


모팻은 왜 여성 닥터를 만들지 않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 적이 있다. (번역이 많이 어설프다. 수정 의견은 항상 감사하다.)


이 드라마는 단지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브렉시트에 투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죠. 저는 전혀 정치적인 결정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단지 우린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거예요.
This isn’t a show exclusively for progressive liberals; this is also for people who voted Brexit. That’s not me politically at all - but we have to keep everyone on board.


이 대답에서 모팻은 '여성 닥터를 원함 = 진보적인 자유주의자 = 정치적'이라는 등식을 전제하고 있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자신이 '모두를 고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일부의 주장은 모두를 대표하지 못하기에, 모두를 고려하려면 그 주장에 따라서 자신의 결정을 바꿔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다면 그가 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것이다. 백인 남성 닥터를 그대로 사용하기. 이는 에피소드 8에서 닥터가 자이곤에게 제시하는 해결책과 정확히 똑같은 구조다. 급진파라는 일부의 주장은 모두를 대표하지 못하기에, 모두를 고려하려면 그저 너희가 원래 살아가던 대로 숨어 살아가라, 그게 평화다, 라는 닥터의 일장연설.


드라마는 숨어 살아가는 자이곤의 고통에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데, 이는 원래 닥터의 방식이 아니다. 아무리 위협적이고 불안정한 생명체들을 만나도 그들의 입장을 파악하려고 자신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결국 그들을 구해내는 것이 닥터의 방식이다. 그들을 침묵시키는 게 아니라. 모팻은 자신의 구시대적인 식민주의적 발상을 닥터의 삶을 근거로, 닥터의 입을 빌려 지루하게 늘어놓았다. 비겁하고 악질적이지. 모팻이 <닥터 후> 시즌 9의 7, 8회를 통해 말하고 싶은 건 '평화'였다. 하지만 그 평화는 단지 기만일 뿐이었다.


자이곤들에게 그저 지금처럼 묻어가며 살라는 말을 닥터가 자기 동족을 모두 희생시킨 시간 전쟁까지 끌고 와서 해야 했을까? 나는 이런 전개가 식민주의적 프로파간다의 생산과 확산을 위해 닥터를 왜곡하는 모팻의 독단이라고 본다. 원래 닥터 후를 아주 좋아하는 나지만, 그럼에도 견디기 힘들 만큼 이 두 에피소드가 불쾌한 이유는 캐릭터를 왜곡하면서까지 자신의 폭력적인 정치적 견해를 전달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테다.


나는 누구든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 (누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여성 닥터를 요구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여태까지 닥터가 남성이었다고 한들 타임로드의 재생성에는 성별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가 있는 건 모팻 본인이다. 닥터는 항상 약자의 편에 서려고 노력했고, 시간 전쟁은 여기 나오는 상황보다 훨씬 복잡한데도, 닥터의 해결 방식이나 드라마의 전개를 오직 자신의 식민주의적 견해를 드러내기 위해 왜곡했기 때문이다.


그런 흐름은 뒤에서도 이어진다. 시즌 10의 4회 ‘Knock knock’에서는 죽을 병에 걸렸다가 외계 곤충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서 생명을 유지하느라 나무 인간으로 변해버린 사람이 나온다. 그는 바깥에도 나가지 못하고, 심지어 창문조차 열지 못하고 지낸다. 닥터는 그에게 이런 게 어떻게 삶이냐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것 같냐고 묻는다. 그 에피소드는 결국 그 나무 인간이 죽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그가 다른 이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그가 창밖으로 대학 신입생들의 불꽃축제를 본 것이었다. 인간들 사이에 섞여서 행복할 수 없다면, 결론은 죽음뿐이라는 걸까. 앞서 분석한 에피소드와 함께 본다면, 소수자가 공존하려면 자신을 감추거나,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게 ‘승패’의 이분법이 허구라며 닥터가 제안하는 새로운 이분법이다. 어쩌다 닥터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평화라는 말로 기만을 포장하지 말라. 이전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서평을 쓸 때 '평화'에 대해 인용했던 구절이 있다. 힘들 때마다 다시 펼치는 글의 한 구절을 오늘도 펼치며, 조용히 숨어 살라고 훈계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조용히 숨어 사는 게 얼마나 엿같은지 아는 사람의 위치에서 '평화'란 무엇일지 고민하며 글을 맺는다.


“평화는 모순 속에서 사투할 때의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평화는 양극단에 놓인 삶의 가치 속에서 이것도 저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의 나에게 존재했던 것이었으며,
평화는 가족과 친구의 슬픔에 공감하여 서러워 엉엉 울고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 존재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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