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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Oct 01. 2020

'진정한 페미니즘'과 '여성 서사'라는 핑크 워싱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에놀라 홈즈>(2020) 후기

* 영화 <에놀라 홈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를 워낙 재밌게 본 터라, 거기서 '일레븐'으로 활약한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소식에 한 달 전부터 알림 설정을 해 두고 기다렸다. <에놀라 홈즈>가 공개된 후 이틀 뒤에 나온 <보건교사 안은영>을 먼저 달린 후, 시간이 생겨서 <에놀라 홈즈>를 틀었다.


내가 연기 실력에 크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 확실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연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화려한 캐스팅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충격적인 건, 이런 배우들도 영화를 맛깔나게 살리기 힘들었다는 사실 아닐까.


예고편을 보면, 이 영화는 명백히 '셜록 홈즈'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규범적 여성상에서 상당히 벗어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다루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이걸 '여성 서사'라고 보기에는 아쉬운 점이 너무도 많다.


영화의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으나, 분명 주인공인 에놀라가 코르셋을 저렇게 오래, 자주 입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중간에 코르셋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상황도 나오지만, 그게 꼭 코르셋이어야 했을지 계속 고민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코르셋이 칼을 막아줄 만큼 단단하다는 건 영화에서 처음 알았으나, 그 한 번의 반전을 위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코르셋을 입고 있어야 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예고편에서는 에놀라가 평소에 규범적 여성상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가, 필요에 따라 잠시 '숙녀'로 변장한다는 듯이 이야기가 나왔으나,  영화를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는 뛰고 싸우는 법을 어머니에게 배웠고, 실제로 뛰고 싸울 일이 꽤 많았다. 그런데 그런 장면들에서는 활동이 편한 복장보다는 오히려 불편한 복장을 더 자주 입고 있었다.


물론, 에놀라가 처음부터 '남성복'이나 코르셋을 입고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에서 그는 '남성복'과 '여성복'을 필요에 따라 바꿔 입었다. 즉, 그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도록 연출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옷을 입을지는 분명 의도가 들어간 연출이었을 것이다. 그가 코르셋이나 드레스를 자꾸 입게 된 건 명백히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하나의 반론이 가능하다. "꼭 남성복을 입어야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에놀라는 코르셋과 드레스를 입고 제대로 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전문 암살자와 몸싸움을 하고 그를 따돌렸다. 오히려 '여성적인 것'으로 '남성적인 것'을 압도하는, 자신에게 '코르셋'이 요구된 맥락을 뒤집어 버리는 하나의 전복적 연출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결말에서 모조리 무너진다.


영화 초반에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곧 의회에서 투표권을 갖게 될 귀족 집안의 아들을 구한 에놀라는 자꾸만 그에게 신경이 쓰인다. 물론 영화에서 이 둘의 관계는 로맨스로 한정되지 않았고, 에놀라가 그를 신경 쓴 이유는 '나는 나를 지킬 수 있지만 그 아이는 너무 약해서'였다. 분명 에놀라가 집을 떠나 기차에 오른 건 어머니를 찾기 위함이었으나, 어느새 그의 목표는 어느 귀족 집안 아들래미를 살인자로부터 구하는 것으로 변해 버렸다.


목표가 변하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렇게 변한 목표 때문에 에놀라 홈즈의 서사나 감정이 자세히 묘사되기보다 그 아들래미와의 관계나 그 아들래미에 대한 생각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면? 이건 분명히 큰 에러다. 물론 에놀라가 명시적으로 그를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등의 장면이 나오지는 않는다(안 본 사이에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은 그보다 훨씬 가벼운 의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 아들래미의 눈빛에 당황하고 화를 내거나, 그가 의회에 들어가기 직전에 만났을 때 손을 만지고 눈을 질끈 감는 등의 모습은 분명히 에놀라의 감정이 아주 중립적이지는 않음을 암시하는 영화적 장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런 대사나 감정 묘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꼭 에놀라의 차림이 '남성복'이 아닌 '여성복'이었다는 점은 특히 맘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앞서 설명한 수많은 불만을 터뜨린 건 결말이었다. 영화에서 에놀라의 어머니는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즉 서프러제트로 나온다. 내내 자신의 어머니를 그저 존경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위험한 인물'이라고 부르는 마이크로프트 홈즈를 반박하던 에놀라는 어머니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화약과 폭탄을 발견하곤 그를 '위험한 인물'이 맞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22살의 에놀라 홈즈에게 그런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방식의 운동은 위험해 보일 수 있다. 게다가 집 안에서만 살아서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인물로 나오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머니의 '위험함'을 단지 에놀라의 개인적 감정의 층위에서만 다루지 않는다.


애당초 그 아들래미가 쫓기기 전에, 그 아들래미의 아버지도 살해된 바 있다. 이유는 그들이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고, 참정권을 확대하는 선거법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놀라가 아들래미를 구출한 덕에 아들래미의 '결정적 1표'로 선거법 개정안은 통과되었고, 여성 참정권은 확대된다.


그 직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에놀라는 그곳에 이미 찾아온 어머니와 만난다. 여기가 압권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수많은 동지와 함께 투쟁을 기획하고, 화약과 폭탄을 준비하고, 딸의 미래를 위해 아무 말 없이 집을 떠나서 세상을 바꾸려던 어머니는, 에놀라를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약간 다를 수 있지만 의미는 똑같을 것이다).


"내가 세상을 바꿀 줄 알았는데, 세상을 바꾸는 건 너였구나."


아, 세상에나. 이게 무슨 상황인가. 아무리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고 하더라도, 운동의 방식은 분명 그 자체로 목적성 내지는 지향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에놀라와 어머니가 세상을 바꾸려고 한 일들은 '내가 아니라 너였다'라는 문장 구조로 인해 서로 대립하는 위치에 배치된다. 즉, 어머니가 '폭력적인 페미니즘 운동'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실패했다면, 에놀라는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귀족 집안 아들래미를 구출'하여 세상을 바꾸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아이고 두야.


영화 <서프러제트>의 초반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한밤중에 광장에 모여 한 활동가의 말을 경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발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법은 저 남자들이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불편을 말했고, 불평등을 고발했지만, 그걸 몇 번을 반복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이제는 움직여야 한다.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폭력 투쟁'은 옳고 '의회 정치'는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데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다루고 있는 두 영화 <서프러제트>와 <에놀라 홈즈>가 운동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 다를뿐더러, 후자가 전자의 방식을 실패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놀라 홈즈>는 명백히 '진정한 페미니즘'을 요구하고 있다. 폭력적이지 않고, 남성을 설득하며, 합법적인 절차로 이루어지는 변화. 여성은 강할 수 있지만 그 강함이 남성의 기득권을 해치지 않으며, 도리어 (부와 권위 등 모든 기득권을 가진) 남성에게 매력적이기까지 한 상황. 이게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나 '진정한 페미니즘'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당연히 사람들이 운동을 보는 방식은 다를 수 있으며, 재현하는 방식도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서프러제트>가 여성들이 폭력 투쟁을 선택한 역사를 보여주며 혁명의 고통과 어려움,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면, <에놀라 홈즈>는 서프러제트 어머니를 두었으나 남성을 해치지는 않는 매력적인 여성이 귀족 남성을 구출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아주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인물로 등장하며, 셜록 홈즈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이크로프트 홈즈의 망언이나 폭력적 행동을 방관하는 인물이다. 시대 배경으로 생각한다면 셜록 정도도 감지덕지라고 말해야 할 지경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거대한 저택에 살며 어린 나이에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게 된, 영국 땅의 일부를 수호하는 아주 높은 귀족 집안의 아들래미와 그의 아버지가 둘 다 선거법 개정안에 당연히 찬성하는 이들이다?


세상은 '우연한 개념남'을 통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개념'을 갖추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노력과 투쟁이 있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면, 결국 세상의 변화는 어느 착한 기득권의 투표로만 바꿀 수 있다는 결론밖에 더 되겠나. 의회의 투표를 통해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는 결말은 그대로 두더라도, 그 시절에 기득권이란 기득권은 다 가진 귀족 집안의 자제를 '어쩌다 진보적인 인물'로 설정하지 않고 에놀라와의 관계를 통해 무언가 더 배우고 바뀌는 것으로 그렸다면 지금만큼 황당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영화는 모든 맥락을 자르면서 페미니즘을 담아내지도 못했고, 아들래미 구출에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 에놀라의 개인 서사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단지 여성 주인공이 무술에 능하고, 규범에서 벗어나 있으며, 눈을 질끈 감고 귀족 남성의 구애를 거절한다고 해서 여성 서사가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영화를 '여성 서사'인 것처럼 광고하는 일은 그야말로 핑크 워싱이다. 이건 '여성 서사'의 탈을 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진정한 페미니즘'에 가깝다.


에놀라 홈즈의 서사도, 그의 어머니의 서사도 제대로 안 다루면서, 주인공은 에놀라인데 정작 이야기는 귀족 집안 아들래미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난감한 '여성 서사'라니, 그런 거 안 사요. 예고편이 너무도 기만적이었다. 안은영이나 다시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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