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리뷰
한동안 나는 SF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고 다녔었다. 나의 주변에는 계단 가득한 세상, 자막과 속기 없는 세상, 사진에 설명이 부족한 세상에서 자유를 편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항상 사람의 몸을 고치기보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바뀐 세상을 얼른 보고 싶었다. 어떻게 바꿀지는 잘 몰랐다. 계단이 싫으니 망치로 계단을 두들겨 부수자는 농담은 함께 장애인권 운동을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흔했다. 나는 그런 장벽이 모두 사라진 세상을 그리고 싶었다. 나는 소설을 쓰려고 ‘접근가능한 미래’라는 폴더를 만들어 자료를 모았다. 악기의 접근성, 카페의 접근성, 전기차의 접근성, 새로운 휠체어와 대화 도구, ... 그렇게 차곡차곡 장벽이 사라진 미래를 그려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사회복지사와 활동지원사로도 활동하며 생활에 밀접하게 필요한 기술들을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만났다. 제목부터 특이했다. 보통은 빛의 속도로 가겠다고 말하지 않나. 인류는 어떻게든 빛의 속도를 뛰어넘고 시간과 공간을 모두 지배하겠다는 게 내가 알던 수많은 SF소설이나 영화의 레퍼토리였다. 정확히는 SF라는 장르에 대한 나의 편견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잡아끈 건 뒤표지에 인용된 두 문장(“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이었다. 맥락을 모르니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몰랐지만, 이 문장에 말 그대로 반해 버렸다. 책을 주문했다. 일단 읽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나는 자주 좌절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인권을 아무리 공부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꽤 자주 했었다. 바뀌는 것이 없어 보였고, 나는 그저 피하고 싶었다.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에 압도되는 것은 너무나 두렵고 괴로운 경험이었다. 2014년 4월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후로 나는 광화문을 지나칠 때마다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알면서도 외면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나의 반성은 내 고개를 다시 돌려놓지 못했다. 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며 거리에 나가고 글을 썼지만, 자꾸만 좌절에 빠졌다. 깊이 녹아든 패배주의였다.
학기가 바빴고 패배주의는 강했다. 그러다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펼치고 첫 소설을 읽고서, SF소설을 쓰겠다던 몇 달 동안의 계획을 접어 버렸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턱대고 장벽 없는 미래를 그리겠다는 나의 계획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 뒤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이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좌절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고민이 얼마나 얕았는지 깊이 느꼈다. 내가 왜 그런 패배주의에 빠져 지냈는지 깨달았다.
나는 SF 영화나 소설이라면 기계-인간이나 미래-현재의 전형적인 대비가 꼭 드러난다고 착각해 왔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통해 그런 얄팍한 편견은 가볍게 깨졌고, 내가 얼마나 SF를 안 읽었는지 오히려 되돌아보게 됐다. 이 소설들은 기계와 인간, 미래와 현재를 대비시키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는다. 작가는 그런 물음이 얼마나 공허한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인간’ 혹은 ‘사람’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인간이고, ‘어떤’ 사람이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인간’에 있지 않고, 각각의 삶들을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는 말들, 존재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말들에 있다. 김초엽 작가는 뼈대밖에 없는 ‘인간’, ‘사람’이라는 말에 살을 붙이고 피가 흐르게 했다. 아무 의미 없는 단어를 피 흘릴 수 있는 존재, 웃고 울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냈다. 내가 이곳에서 만난 건 ‘사람’이 아닌 ‘당신’이었다. 7개의 글, 7개의 세상, 그 세상 속 분투하는 당신, 어느 때보다도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당신.
어릴 때 나는 책 자체도 별로 안 읽었지만, 문학보다는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도서를 읽었다.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문학을 읽으라고 하셨다. 사람을 이해하려면 문학을 읽어야 한다고. 문학과 인간의 공생 가설인 걸까. 하지만 고집이 세고 게으른 아들은 입시에 실패해 보고서야 시집을 읽기 시작한 데다가, 원체 독서량이 부족하고 긴 글에 집중을 못 해서 소설은 별로 안 읽었다. 그런 내가 소설을 읽다가 울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읽으면서 매번 울었다. 소설이 7개라 14번 울었다. 주변에 추천하면서 몇 문장을 말해 주다가도 울었다. 대체 나는 어쩌다 그렇게 울었을까. 몇 명의 소중한 삶이 곁에서 떠나간 후에 몇 년 동안 나는 눈물조차 잃은 사람이었다. 슬퍼도 울지 못하던 사람이 글을 읽고 울었다.
나는 그런 당신이 되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의 세상에 들어가서 부딪히고 다치며 끝내 버텨 함께 묻힌 당신, 다른 존재의 삶을 지키기 위해 끝내 침묵하고 추억한 당신, 영원히 기다리다가 웃으며 뻔한 불가능을 향해 떠난 당신. 이 소설들에서는 세상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술이 가져올 또 다른 디스토피아를 그리며 공포를 불어넣지도 않는다. 다만 삶들을 보여준다.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진보가 있으려면 지금-여기의 밑바닥에서 누구든 자유롭게 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사라진 누군가를 찾아내려면 그 사람만의 유일한 의미로 그 얼굴을 복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상상력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들은 어떻게 나에게 눈물을 찾아 줄 수 있었을까. 이제야 아버지가 왜 문학을 읽어야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는지 알겠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쌓아서 어떤 사람의 얼굴을 차곡차곡 그려낸다는 것이다. 이 소설들을 읽는 내내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7명의 초상화를 그리는 기분이었다. 내 머릿속에 슬픔과 슬픔 속에 움튼 희망이 피어났다. 내가 가 본 적 없는 세상의 존재들이 내가 알지 못한 사이에 나에게 ‘인간성’이라 불리는 것들을 불어넣었다. 나는 류드밀라의 그림을 마주한 사람처럼 울었다.
“평화는 모순 속에서 사투할 때의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평화는 양극단에 놓인 삶의 가치 속에서 이것도 저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의 나에게 존재했던 것이었으며, 평화는 가족과 친구의 슬픔에 공감하여 서러워 엉엉 울고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 존재하던 것이었다.”*
나는 장벽 없는 세상을 그린 SF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모든 걸 단번에 깔끔하게 해결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사실 패배감에서 울먹울먹 퍼져 나온 허영과 좌절의 먹물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걸 단번에 해결하고 싶다는 절박한 희망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절규 속에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마을’과 같은 평화로운 세상을 찾아 그리로 도망쳐서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의 소설 중 어디서도 그런 평화는 없었다. 소설 속의 당신은 사랑을 위해 분투할 때 가장 행복하고 생기 넘쳤다. 나의 평화가 누군가의 삶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이 사실을 외면하는 평화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특히, 나의 평화를 지탱하던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면, 평화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임을 더욱 확실히 깨닫게 된다.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알게 된다면,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나에게 이 소설들은 말하는 것 같았다. 떠날 거라면 떠나라고. 막지는 않겠다고. 하지만 떠나서 정말 행복할지, 평화로울지, 생각해 보라고. 당신이 받은 상처와 모든 고통을 잊고 사라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사랑할 수 있겠냐고.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눈물 흘린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상처 없이, 고통 없이는 무엇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랑받을 수도 없다.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다. 내가 받은 상처와 고통이, 내가 여태 떠나보낸 수많은 삶들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뼈대밖에 없던 나에게 피와 살을 주고 있었다. 내가 잃은 것들을 사랑하며 슬퍼할 때 비로소 나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내가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간 순간들을 떠올린다. 광화문 광장에서 천막을 외면하고 서명만 급하게 한 후 도망치던 나는 세상을 떠난 어느 학생의 어머니와 대면했을 때 울고 말았다. 연락처를 나누고, 천막에 찾아갔다. 그 어머니는 밴드에서 기타를 치던 아들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 이후로 나는 천막들을 외면하고 도망치지 않았다. 학교 안에서 청소노동자의 삶을 짓밟지 말라는 현수막들을 발견했다. 몇 번이고 도망쳤다. 내 삶이 바빴다. 하지만 청소노동자분들이 팻말을 들고 학교 거리에 서 계실 때, 나는 어느 얼굴과 마주쳤다. 다시 그저 도망칠 수는 없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였다. 한 청소노동자분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내 고통, 내 일상을 타협할 이유는 단 한 사람의 얼굴로, 단 한 마디로 충분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나는 왜 돌아가려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왜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건 아마 얼굴들을 마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구체적인 당신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가다가는 온몸이 부서질 연약한 존재라고 믿는다. 우리는 빛의 속도로 모든 걸 해결할 수도, 모든 곳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무것도 초월하지 못하는 연약함 속에서 살을 부대끼며 분투한다. 그게 평화였고, 그게 사랑이었다.
나에게 문학과 인간의 공생 가설을 증명하는 첫 단추는 이 책인 것 같다. 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연약한 당신을 믿는다. 그토록 연약한 나와 당신을 믿는다. 괴롭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우리를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