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 서평
장애인의 성이라는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깊이 고민하거나 공부해 본 적은 없었다. 장애인이 욕망의 주체로 등장하는 글은 여전히 많지 않다. 나는 김원영 변호사님의 <희망 대신 욕망>,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이런 주제들을 사실상 처음 접한 것이나 다름 없고, 최근 나온 책 중에서는 장애여성공감의 구성원들이 모여서 말하고 쓴 <어쩌면 이상한 몸>에서 장애 여성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책들과는 달리, 내가 리뷰하고자 하는 이 책은 당사자가 쓴 글은 아니다. 저자인 천자오루는 인류학을 공부하고 기자로 활동하며 세상의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노력하는 비장애인 여성이다. 하지만 책에는 당사자들의 아주 솔직한 이야기가 가감없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럼에도,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해석하거나 자신이 목격한 장면들을 묘사할 때 드러나는 한계들이 있었다. 어떤 장애인의 모습을 묘사할 때 '그럼에도' 혹은 '장애인 치고'와 같은 느낌을 주는 지점들이 있기도 했고,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어딘가 이야기가 진행되다 말아서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안내를 미리 하면서 이 책을 꼭 추천하고자 한다. 추천사부터 옮긴이의 말까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저자의 그러한 말투가 오해나 몰지각함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고, 인터뷰이들과 너무 가까워졌고, 그들의 개인적 서사를 이해하며 그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쓴 글이라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장애인을 바라보며 삶을 쉽게 단정하는 비장애인의 시선이 아닌, 장애인의 삶들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적어 나가는 '공저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 읽을 때는 시혜적이라거나 동정적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부분들이 있었지만, 책 전체의 깊이와 시선은 내가 오해의 속도전을 펼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사실, 장애인의 성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장애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크론병이라는 질병을 갖고 살아가는 만성질환자이고, 일찍 병을 발견하여 항문주위농양 제거 수술 외에 다른 수술은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따로 사용하는 보조 기구도 없다. 이는 지금 사회에서 성적인 매력의 주요 구성 요소인 몸의 움직임이나 형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물론 중요한 순간에 배가 아프거나 속에 가스가 차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특히 성의 문제에서 당사자가 아닐 때는 더욱 말하기가 어렵다. 내밀하고 사적인 문제라고 여겨지기 때문일까.
그리고 장애인의 성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다수의 성 서비스는 이 책에서도 나오듯 대부분 이용자는 장애 남성이고, 제공자는 비장애 여성이다. 성 산업의 성별 위계가 여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 책에는 성욕을 '해소'하지 못하여 난폭한 행동을 보인다는 이들도 나오는데, 그들의 성별 역시 남성이었다. 여기서 많은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고민은 이전에 <어쩌다 암살클럽(Kills on Wheels)>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것과 거의 같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세 명의 장애 남성이다. 한 명은 소방관으로 일하다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 한 명은 선천적 근육병 때문에 계속 의료적 조치를 받아야 하는 사람, 한 명은 뇌병변 장애로 인해 직립이 가능하긴 하나 대체로 스쿠터를 타는 사람이었다. 장애인이 등장인물에 포함된 영화들은 보통 유명 배우에게 장애를 잘 연기하도록 주문하곤 하는데, 이때 강조되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연기를 잘해낸 명배우'뿐이지 장애인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당사자가 등장하고, 근육병을 가진 사람의 신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장애인이 킬러가 된다는 설정도 상당히 전복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영화에서 비장애인 여성이 다루어지는 방식이 내내 불편했다. 우선, 책에서도 나오듯, 장애인의 몸을 만지게 되는 사회복지사나 활동지원사, 의사나 간호사는 그 몸을 성적인 대상이 아닌 오직 치료나 처치의 대상, 사람의 몸보다는 하나의 물건으로 대하곤 한다. Tobin Siebers가 <장애 이론>(학지사, 2019)에서 언급하는 "의료화에 따르는 비인간화"가 바로 이런 문제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의 신체는 소외되고, 장애인은 탈성애화(desexualization)된다. 이 책은 대만에서 나왔고, 저 영화는 헝가리에서 나왔지만, 이러한 문제는 한국에서도 비슷하다. 한국에서 장애인 화장실에 성별 구분이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는 장애인이 성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이에 관해서는 다양한 쟁점이 있는데, 조금 더 자세히 정리된 내용을 위해서는 이 링크를 참고하라).
그래서 이러한 강제된 무성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쩌다 암살클럽>의 주인공들은 "여자를 안아야 한다"거나 성매매를 하게 해 달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재활과 치료를 돕는 여성 간호사들이 자신들을 '남자'로 봐주지 않는다며 욕을 하기도 한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적잖이 난감했지만, 내가 아는 이야기도, 경험한 삶도 아니라서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단지,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라고 말할 뿐이었다. 바로 그런 고민이 이 책에서도 똑같이 생겼지만, 그때보다는 나의 고민이 이 책 덕분에 조금은 발전한 것 같다. 이는 정말 복잡한 문제였다.
성별 이원제, 이성애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지금의 사회에서 성과 사랑은 신성한 것으로까지 여겨지곤 한다. 성은 신성하므로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결혼 제도로 법제화되고, 여기서 성은 언제나 여성의 성이었다. 그러면서도, 캐롤 페이트먼이 "What's Wrong with Prostitution?"에서 언급하듯 남성이 여성의 몸에 접근할 권리를 가진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하여 성매매와 성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전자의 사고방식이 자연화되기도 하는데, 그 때문에 여성에 대한 보호주의가 다시금 등장하기도 한다. 장애여성이 탈성애화되는 동시에 과잉 성애화된다는 모순도 이런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고, 책에서도 나오듯 이는 장애여성의 결정권을 박탈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장애인의 성은 장애인 차별과 성차별이 긴밀히 결합한 문제이며, 동시에 '정상적인 성행위'를 규정하는 섹슈얼리티 규범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게 된다.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 장애 이론이 모두 함께 논의해야 할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문제가 정말 복잡하다. 혼자 이런저런 책을 읽어 보기도 했지만, 고민이 진전되는 느낌을 받은 적은 드물었다. 그런데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의 고민이 정체되었던 이유는 내가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성 서비스를 바라는 장애여성도 있으며, 아주 극소수지만 이용한 여성도 있다.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한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고, 자신이 가치 있다는 감각, 사랑받는다는 감각이 있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에게 사랑은 삶을 완전히 바꾸고, 존엄하게도 만들어 주는 요소다. 사랑은 나에게도 소중한 감정이자 관계이기에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분명 사회적인 장벽으로 인해 사랑에 접근할 수 없다.
나는 이 책에서 '해소'로서의 성욕이 아닌, '만족' 혹은 '충족'으로서의 성욕을 보았다. '해소'로 성욕을 여길 때 그 결과는 파괴적일 때들이 있지만, '만족' 혹은 '충족'은 그와는 결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이 책에 나온 묘사 중에는 기존 사회에서 성관계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성기 환원적 시각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눈빛과 표정, 피부가 닿는 감각 자체에서 얻는 욕망의 긍정과 행복이었다. 자신의 몸을 새롭게 탐구하고, 다른 몸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런 논의에 접근할 때, 나야말로 '성'을 너무나 얄팍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추천사에서도 나오듯, 이 책의 저자는 어떤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워낙 복잡한 이야기니까 당연하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확실히 느낄 수 있는 하나는, 성과 사랑의 이야기가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주제라는 점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어떤 당위들에만 너무 집중해서, 정작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욕망을 갖고 살아가는지를 외면해 오지는 않았는지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전에 노들장애학궁리소의 강의를 들을 때, 같은 책상에 있던 사람이 자기랑 밥을 같이 먹은 사람이 너무 고마워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장애가 옮을까 봐 자신을 피했는데, 이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 밥을 먹어 ‘주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고마워했다는 것이었다. 생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피부의 접촉과 친밀성이 주는 감정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몸의 이야기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3장에서 나오는 지적장애인 부부와 사회복지사의 관계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사회복지사와 활동지원사는 어떤 존재일까. 내가 본 활동지원사 선생님들은 나의 친구들과 친구 같기도, 가족 같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많다고 하지만. 활동지원사도 여성의 비율이 80%가 넘는다는 점에서 돌봄의 여성화와도 엮여 있는 주제이지만, 나는 그들이 공과 사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있다는 점에 집중하고 싶다. 이는 양측의 사생활을 박탈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 돌봄이 공적인 생활영역에 국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기존의 '가족' 관념에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공적인 지원의 문제가 가족의 사적인 케어와 반복적으로 부딪히는 이유는, 사실은 애초에 그 둘이 그렇게 뚝 잘라서 구분될 수 없고, 둘을 분리하면서 생기는 거칠게 뜯긴 틈이 어떤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논의에서도 많이 등장했지만, 장애 이론의 관점에서도 새로운 가족 혹은 생활공동체의 형태를 정말 많이 고민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쓴 글은 이 책의 극히 일부에서 이어지는 문제의식과 감상일 뿐이다. 이 책은 정말 풍부하다. 이론의 틀보다 사람의 이야기가 먼저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그것도 아주 일상적인 용어와 이야기들로. 솔직하고, 풍성하고, 쉬운 언어로 적혀 있으면서도, 결코 쉽지는 않은 책이다. 그런데 바로 그게 사람의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 아닐까. 나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성과 사랑, 관계에 대한 고민에 정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께 이 책을 꼭 읽으시라고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