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룩 Nov 28. 2020

희미하고 적나라한

『천장의 무늬』를 읽고

잔잔하게 파도가 치는  같기도 하고, 얼룩이   같기도 하고, 벽지랑 비슷한데 어딘가 낯선 하얀색. 깨끗한지 지저분한지도 헷갈리는, 묘하게 얼룩진 하얀색.

      

내 방은 그리 넓지 않아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벙커 침대를 놓았다. 서랍으로도 쓰이는 세 칸짜리 흰색 계단을 오르면 침대가 있고, 그 아래는 책상의 자리. 그래서일까, 나는 예전보다 천장을 조금 더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침대에서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기가 어려울 만큼 천장이 가까워졌다.    

 

대체로 천장보다 벽을 볼 일이 많을 것 같지만, 나는 아니다. 항문에서 느껴지는 정체 모를 이물감이나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걷기가 힘들 때면, 나는 팔을 벽에 기댄다. 그 와중에도 손이 닿으면 흰 벽지가 지저분해질까 봐 꼭 팔만 기댄다. 가끔은 그렇게 걷다가 힘들고 억울해서 벽에 기댄 팔에 이마를 대고 숨을 몰아쉰다. 벽은 주로 짚거나 기대는 곳이다. 몸에 자주 닿아서 익숙하지만, 눈에 담을 일이 많지는 않다.      


천장은 벽과 같은 벽지인 것 같은데, 아마 나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는 사람이라면 내 방의 천장이 꽤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아픈 걸 숨기고 싶지는 않지만 보여줄 주삿바늘은 없고, 으레 SNS가 그렇듯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지만 방의 모습을 그대로 찍기에는 대체로 정돈이 안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당장 내 눈에 바로 보이면서,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한 천장을 찍어서 스토리로 올리곤 했다. 누군가는 음식을, 누군가는 반려동물을, 누군가는 친구들과의 만남을 자랑하는 공간에 나는 슬쩍 내 방의 천장과 거실의 식물을 찍어 올린다.      


며칠 전, 나는 회의가 있는 날에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휴대폰 화면조차 보기가 어려웠다. 결국 2층 침대에 반쯤 기어 올라가서 누워 간신히 채팅을 올렸다. 내가 조장이지만 회의에 못 참여할 것 같으니 진행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있는지 부탁했다. 2층 침대에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피곤해서 웬만하면 자기 전까지는 다시 오르지 않으려고 하는데, 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


그날도 그랬다. 전날 밤부터 이어진 정체 모를 어지럼증과 메슥거림, 구역질. 뇌가 태양이라면 눈은 지구 같았다.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눈을 감으면 눈이 핑그르르 돌아 뒤집히며 자전하고, 동시에 내 뇌를 중심으로 두고 공전하는 것 같았다. 토가 밀려 나오는 듯했다. 그렇게 몸이 정신을 못 차릴 때, 눈을 다시 뜰 때마다 보인 것은 천장의 무늬였다.      


잔잔하게 파도가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얼룩이 진 것 같기도 하고, 벽지랑 비슷한데 어딘가 낯선 하얀색. 깨끗한지 지저분한지도 헷갈리는, 묘하게 얼룩진 하얀색.


나에게 천장의 무늬는 아플 때 가장 익숙해서 지긋지긋하면서도, 무늬가 희미해서 매번 새롭고, 나의 방이라는 사적인 공간을 감추려고 찍지만 사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통증의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며, 누워 있어야 한다는 억울함과 함께 누워 있다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다.      


『천장의 무늬』를 읽고, 이다울 작가님과 대담을 나눈 이후 내 방의 풍경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감추려고 찍던 천장의 무늬가 실은 그 순간 나의 몸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몸이 좋을 때는 무언가에 집중하기 전 주변을 정돈하지만, 몸이 안 좋을 때는 무언가에 집중할수록 주변이 지저분해진다는 사실도.      


나는 글을 쓸 때 이미 합의된 말을 찾고, 그것을 토대로 삼아 나의 언어를 전개하는 편이다. 오직 나의 경험만으로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장의 무늬』는 아픈 사람의 이야기에만 집중할 때도 사회적 맥락이 자연스레 다가오고, 아픈 사람의 경험이 기존의 논의와 명시적으로, 반복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살을 파고드는 언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솔직하고 섬세한 관찰이라면, 자신의 몸과 그것을 둘러싼 관계들을 살아내면서 느낀 삶의 기쁨과 슬픔을 이렇게 담아낼 수 있다면, 바로 그런 문장들에서 질병 세계의 언어가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별 의미 없는 벽지인 줄 알았던 천장의 무늬는 사실 나의 아주 내밀한 시선과 그 너머에 힘없이 누운 나를 보여준다. 그 사실을 『천장의 무늬』를 읽고서야 알았다. 천장의 무늬는 그만큼 희미하면서도 적나라하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내가 올리는 천장의 무늬를 보고 아픈 나를 어떻게 상상하게 될까?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아무 의미도 없는 듯한 사진에서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게 될까.


1. 경향신문 토요판 대담 기사 “무쇠 같던 몸이 골골, 세상은 엄살이라고…‘아픈 20대’의 삶​”

2. 대담 기사와 이어지는 ‘질병권’에 관한 기사 “조한진희 “질병권이란 ‘잘 아플 권리’…만성질환자에겐 건강권보다 소중”​”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을 살게 하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