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의 무늬』를 읽고
잔잔하게 파도가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얼룩이 진 것 같기도 하고, 벽지랑 비슷한데 어딘가 낯선 하얀색. 깨끗한지 지저분한지도 헷갈리는, 묘하게 얼룩진 하얀색.
내 방은 그리 넓지 않아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벙커 침대를 놓았다. 서랍으로도 쓰이는 세 칸짜리 흰색 계단을 오르면 침대가 있고, 그 아래는 책상의 자리. 그래서일까, 나는 예전보다 천장을 조금 더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침대에서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기가 어려울 만큼 천장이 가까워졌다.
대체로 천장보다 벽을 볼 일이 많을 것 같지만, 나는 아니다. 항문에서 느껴지는 정체 모를 이물감이나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걷기가 힘들 때면, 나는 팔을 벽에 기댄다. 그 와중에도 손이 닿으면 흰 벽지가 지저분해질까 봐 꼭 팔만 기댄다. 가끔은 그렇게 걷다가 힘들고 억울해서 벽에 기댄 팔에 이마를 대고 숨을 몰아쉰다. 벽은 주로 짚거나 기대는 곳이다. 몸에 자주 닿아서 익숙하지만, 눈에 담을 일이 많지는 않다.
천장은 벽과 같은 벽지인 것 같은데, 아마 나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는 사람이라면 내 방의 천장이 꽤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아픈 걸 숨기고 싶지는 않지만 보여줄 주삿바늘은 없고, 으레 SNS가 그렇듯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지만 방의 모습을 그대로 찍기에는 대체로 정돈이 안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당장 내 눈에 바로 보이면서,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한 천장을 찍어서 스토리로 올리곤 했다. 누군가는 음식을, 누군가는 반려동물을, 누군가는 친구들과의 만남을 자랑하는 공간에 나는 슬쩍 내 방의 천장과 거실의 식물을 찍어 올린다.
며칠 전, 나는 회의가 있는 날에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휴대폰 화면조차 보기가 어려웠다. 결국 2층 침대에 반쯤 기어 올라가서 누워 간신히 채팅을 올렸다. 내가 조장이지만 회의에 못 참여할 것 같으니 진행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있는지 부탁했다. 2층 침대에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피곤해서 웬만하면 자기 전까지는 다시 오르지 않으려고 하는데, 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
그날도 그랬다. 전날 밤부터 이어진 정체 모를 어지럼증과 메슥거림, 구역질. 뇌가 태양이라면 눈은 지구 같았다.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눈을 감으면 눈이 핑그르르 돌아 뒤집히며 자전하고, 동시에 내 뇌를 중심으로 두고 공전하는 것 같았다. 토가 밀려 나오는 듯했다. 그렇게 몸이 정신을 못 차릴 때, 눈을 다시 뜰 때마다 보인 것은 천장의 무늬였다.
잔잔하게 파도가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얼룩이 진 것 같기도 하고, 벽지랑 비슷한데 어딘가 낯선 하얀색. 깨끗한지 지저분한지도 헷갈리는, 묘하게 얼룩진 하얀색.
나에게 천장의 무늬는 아플 때 가장 익숙해서 지긋지긋하면서도, 무늬가 희미해서 매번 새롭고, 나의 방이라는 사적인 공간을 감추려고 찍지만 사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통증의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며, 누워 있어야 한다는 억울함과 함께 누워 있다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다.
『천장의 무늬』를 읽고, 이다울 작가님과 대담을 나눈 이후 내 방의 풍경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감추려고 찍던 천장의 무늬가 실은 그 순간 나의 몸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몸이 좋을 때는 무언가에 집중하기 전 주변을 정돈하지만, 몸이 안 좋을 때는 무언가에 집중할수록 주변이 지저분해진다는 사실도.
나는 글을 쓸 때 이미 합의된 말을 찾고, 그것을 토대로 삼아 나의 언어를 전개하는 편이다. 오직 나의 경험만으로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장의 무늬』는 아픈 사람의 이야기에만 집중할 때도 사회적 맥락이 자연스레 다가오고, 아픈 사람의 경험이 기존의 논의와 명시적으로, 반복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살을 파고드는 언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솔직하고 섬세한 관찰이라면, 자신의 몸과 그것을 둘러싼 관계들을 살아내면서 느낀 삶의 기쁨과 슬픔을 이렇게 담아낼 수 있다면, 바로 그런 문장들에서 질병 세계의 언어가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별 의미 없는 벽지인 줄 알았던 천장의 무늬는 사실 나의 아주 내밀한 시선과 그 너머에 힘없이 누운 나를 보여준다. 그 사실을 『천장의 무늬』를 읽고서야 알았다. 천장의 무늬는 그만큼 희미하면서도 적나라하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내가 올리는 천장의 무늬를 보고 아픈 나를 어떻게 상상하게 될까?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아무 의미도 없는 듯한 사진에서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게 될까.
1. 경향신문 토요판 대담 기사 “무쇠 같던 몸이 골골, 세상은 엄살이라고…‘아픈 20대’의 삶”
2. 대담 기사와 이어지는 ‘질병권’에 관한 기사 “조한진희 “질병권이란 ‘잘 아플 권리’…만성질환자에겐 건강권보다 소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