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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l 06. 2019

잠깐 거리 두기

[서평/독후감]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아무래도 평상시에 페이스북을 통해 고민을 공유하던 분들이라서 그런지, 문체나 문제의식이 익숙해서 책이 굉장히 빨리 읽혔다. 현재 대한민국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논쟁을 조금은 쉬운 언어로 사람들에게 풀어서 전달해 주는 책이 필요하다고 항상 생각해 왔는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바로 지금-여기의 페미니즘을 접하는 하나의 유용한 안내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지금의 논쟁에 대한 안내서에서 끝나지 않고, 그 이후를 생각하는 문제의식을 모두 공통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사건들과 논쟁들 속에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잠깐 거리를 두고 이후를 생각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분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거기에 포획되고, 그 안에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 이분법에서 잠시나마 빠져나와서, 한 번 숨을 고르고 이분법의 앞에서 이분법을 바라보며, 논쟁이 벌어지는 지형 자체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첫 글인 “속도와 페미니즘을 재사유하다”에서 등장한 ‘속도의 페미니즘’은 여러 면에서 빠른 지금의 페미니즘을 포착하기에 적절한 용어인 것 같다. 페미니스트들의 속도마저도 동질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논 페미니스트들의 속도를 동질적으로 규정하고 적으로 규정하는 건 한편으로 근대 국가가 국경을 긋고 적을 규정함으로써 나를 정의하는, 즉 네거티브한 방식의 정의일 것이다. 모두의 속도를 고려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에서 등장하는 ‘삶의 속도’ 개념과, 박종주의 “혐오의 시간, 민주주의의 시간”에서 등장하는 시간 개념과도 이어질 수 있는 것 같다. 속도는 언제나 (누구의) 속도라는 걸 생각하며, 나는 너무나 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너서,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을 건너편에 두고 온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실 다음 글인 “정치적 올바름을 생각하다”에도 이어진다. 이 글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정치적 올바름이 어떻게 도덕주의화되고 기존의 이분법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지 차분하고 꼼꼼히 논증해 나간다. 사실 이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아주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때로 나는 단지 내가 어떤 말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발화자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처단하려 들지는 않았나. 물론 내가 정말 신경 써서 조심스럽게 설명했을 때에도 상대방이 똑같은 말만 반복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내 곁에 있던 사람조차 ‘혐오러’로 낙인 찍어 버리지는 않았을까. 특히 ‘무맥락적 PC’에 대한 내용과 그 이후 ‘속죄 페미니즘’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공격이 성찰보다 앞서곤 하는 나에게 가장 와닿았다.

“모두의 페미니즘을 위한 정치윤리학”은 저자가 격렬한 포함과 배제의 싸움 속에서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며 고민한 바를 풀어낸다. ‘생물학적 몸’과 몸의 경험은 어떠한 간극도 없이 이어진 연속체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이 글은 그러한 직선적인 사고 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페미니즘 이론, 특히 (이 책에서는 포스트 페미니즘이라고 언급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학계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아니냐고 많이 비판을 받았다. 이 글은 그러한 이론적 이야기를 통해 지금-여기의 구체적인 논쟁들을 해석하고 비판하면서 ‘어려운 페미니즘’을 보다 간결하고 쉽게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타자가 주체에 선행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나’에서 ‘너’로의 전환을 통해 용서와 화해의 단초를 던지는 마지막 부분은 버틀러가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아주 쉽고 명료하게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이론적인 이야기가 우리 삶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닌, 우리 삶 깊숙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글이었다.

마지막 “지배하는 말들에 지지 않는 법”은 자신의 삶에서 시작해서 ‘아주 친밀한 폭력’을 사유하고, 폭력이 발생하는 관계의 구조를 파악한다.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 ‘사생활’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섬세하게 밝혀내는 이 작업은 정말 모든 유형의 가까운 관계에서 다 필요하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극단적이고 일방적인 책임 전가의 강황은 폭력이 상처로, 상처가 폭력으로 오해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가해자는 자신의 위치를 선택적으로 지움으로써 폭력을 흐린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폭력은 다툼이나 갈등으로 오인되고, 어떤 이들은 이를 악용하여 폭력을 지속하고 책임을 회피하기도 한다. 이 글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가정 안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피해자의 곁에 가서 설 수 있는지 고민한다. 저자가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는 그 순간(책을 읽은 이는 어딘지 알 것이다)은 곁에 서는 아주 구체적인 장면이 아닐까. 그런 구체적인 장면들에서 나는 내 삶의 또 다른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나는 얇고 가벼운 책을 들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이 책의 크기와 무게가 나에게는 딱 적당하다. 그리고 지금-여기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 논쟁들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고민할 수 있도록, 더 나은 논쟁을 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하는 책이라서 정말 좋았다. 뿐만 아니라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잠깐 잊고 있던 것들을 다시 상기시켜 줄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처럼, 쉼표다.

공통의 문제의식과 더 나은 논쟁, 더 넓은 연대를 위한 살아 있는 이야기들로 연결된 책.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지금-여기의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 거기다 얇고 가볍고 디자인까지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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