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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l 06. 2019

거미와 마주하기 위하여

[서평/독후감] 아픔이 길이 되려면

피해는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으로 발명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구직 과정에서 차별을 겪은 적이 있냐는 물음에 ‘해당사항 없음’을 기록한 여성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교묘해진 차별은 당사자들에게조차 분명하게 인지되지 않고, 그저 상처로 남을 뿐이다. 피해와 상처는 그 개인의 기억과 몸에 홈(groove)으로 남는다. 피해는 차별로 생겼기 때문에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책임자에 의해 정당하게 메워져야 한다고 여겨지지만, 상처는 사적이다. 그러나 많은 상처들은 혼자만의 힘으로 다시 채울 수 없고, 원래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기도 하다. 수많은 피해는 상처로 사소화된다. 


 나에게 어떤 홈이 파이면, 나는 그 홈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 홈은 항상 나에게 붙어 있고 그래서 나는 그 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쓰러져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미끄러져 들어갈 때마다 홈은 조금씩 더 파여서 깊어진다. 하지만 홈은 나라는 지층에 난 구멍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단단하고 매끈한 줄만 알았던 나의 몸에 구멍이 생김으로써 나는 나의 한계를 마주하고 동시에 그 한계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생겼는지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구멍은 열려 있기에, 나는 구멍을 통해 나를 드나들 수 있다.


  나는 병든 나의 몸을 쳐다보며 생각한다. 내 몸에 있는 이것은 상처일까 피해일까, 나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개별적인 존재인가. ‘원인의 그물망’ 이론은 ‘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하나의 질병에 수많은 원인들이 촘촘히 얽혀 있다는 발상은 하나의 차별에 수많은 권력 관계가 얽혀 있다는 발상과 맞닿아 있다. 질병의 역학적 분석이든 교차성 이론을 통한 차별 문제의 분석이든, 문제의 원인은 유일하게 정해지지 않을 때가 많으며, 이 때문에 무엇이 차별이고 아닌지, 무엇이 상처이고 피해인지, 혹은 어디까지가 상처이고 피해인지 분명히 답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다. 


 나의 경험은 얼마나 복잡한가. 나는 크론병 환자다. 병이 활동기를 벗어난 지금의 나는 ‘아파 보이지’ 않는다. 나는 뿌듯하고 안도하지만 나와 멀어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지만 소외된다. 내 아픔이 드러날 수준이라면 나는 정말 많이 아픈 상황이기에 안도하고, 아픈 때가 있더라도 내가 잘 감추었으니 뿌듯하다. 이를 통해 나는 ‘정상인’이 되어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지만 나는 그 속에서, 또한 나의 몸에게서 소외된다. 나의 아픔을 말할 수 없어서 소외되고, 나의 몸을 부정하려 들기 때문에 소외된다. 나의 병은 드러나지 않고 장애인복지법에 적혀 있지도 않기에 나는 법적으로도 일상에서도 ‘장애인’으로 인식되지 못하지만, 나는 나의 능력을 제한한 만성질환으로 인해, 그리고 나를 소외시키는 세상으로 인해 내가 장애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반적인’ 비장애인 남성으로 보이기에 어디에든 섞여 들어갈 수 있지만, 어디서든 나의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기에 또한 소외된다. 


 모든 사람은 어딘가에 속하고자 욕망한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의 모든 경험이 다 피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경험 중 무엇이 상처이고 무엇이 피해인가? 어쩌면 나는 그저 상처투성이일 뿐인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서 피해자가 되고자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차별에 대해 ‘해당사항 없음’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일상적으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러한 물음들이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차별 받은 여성들, 학교에서 따돌림 당한 다문화가정 남학생들, 우울증을 겪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현장에서 다친 소방공무원들, 살아남았으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친구들을 떠올리는 세월호 생존자들, 존재 자체가 죄악과 질병으로 취급되는 동성애자들…. ‘과연 내가 겪는 모든 감정들, 나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그 일 때문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잘 지내는데, 그냥 내 문제 아닐까?’ 그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가족의 말 한 마디, 친구의 눈빛, 뉴스 기사와 댓글, 내가 지금의 상태로 오롯이 존재할 수 없는 이 사회의 제도, 이러한 요소들의 그물망 속에서 피해는 상처로 둔갑하고 그 모든 고통은 각 개인의 책임이 된다. 


모든 피해가 상처로 둔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잠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홈에 빠져 허우적대기를 멈추고, 홈을 바라보자. 허우적댈 수 있다는 건 그만큼의 빈 공간이 있다는 뜻이다. 그 공간이 어디에 있을까, 그 빈 공간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나의 홈을 들여다본다. 이렇게 나의 홈을 직면하는 일은 데리다의 말을 빌리면 ‘제대로 된 애도’의 시작이 된다. 나의 과거를 직시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여는 것. 직시할 수 있다면, 홈은 더 나은 미래로 나를 이끌어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구멍은 언제나 나에게 있고 항상 그 자체로 나의 마음과 살에 느껴지는 현실이다. 구멍은 나의 잠재성이다. 


 크론병은 소화기에 계속해서 염증을 만들어내고, 나의 크론병은 나에게 치루를 선사했다. 내 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구멍들이 있다. 그 구멍들은 아프거나 거슬리기에 내가 나의 몸을 인식하게 만든다. 나는 크론병 이전에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는 나의 몸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 수많은 구멍들, 그 구멍들로 인한 나의 고통과 그 고통이 사람들 속에서 새롭게 나에게 만들어 놓은 구멍들, 나는 나의 홈 속으로 나를 내던진다. 나라는 지층 속으로 들어간다. 구멍에는 지금도 계속해서 쌓이고 변화하는 나의 역사가 있다. 나는 이것을 발굴한다. 나는 ‘나’라는 역사 속에서 나의 경험을 발굴해 내고, 고고학자처럼 현미경을 들이대고 먼지를 털기 위해 붓을 꺼낸다. 그리고 상처, 피해, 아니면 둘 중에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경험들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살펴본다. 이렇게 파낸 후에야 ‘나’는, 나의 경험들은 빛에 깨어나고 수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나희덕 시인의 ‘한 삽의 흙’의 마지막 연에서처럼,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나는 나의 경험을 피해로 발명해 내고, 상처로 밝혀내며, 이 모두를 지금의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나의 아픔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애도하는 것, 애도의 윤리는 완전함의 불가능성, 즉 불완전함에 대한 수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발굴과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나 자신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리라. 나의 홈을 직시하여 내가 때로 부족하고 무능한 존재임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나는 허우적대기를 멈추고 홈에서 빠져나와 나의 연약하고 매끄러운, 끊임없이 상처라는 파도가 몰아치는 나의 피부에서 항해한다. 그리고 나의 평생이 항해였음을 깨닫게 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는 아픔을 통해 발견한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애도의 윤리를 거쳐 타자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윤리로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타자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게 될 때에, 어느 집단에든 섞여 들어갈 수 있었지만 또 어느 집단에서도 완전히 편안할 수 없었던 나의 경험은 한편으로 너의 경험이기도 했음을 깨닫게 된다. 너와 내가 모두 불완전하고 어느 집단이나 기준으로 딱 잘라 판단되지 않는 인간임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가 아주 다르고 특별한 서로를 필요로 함을, 우리가 연결될수록 강하고 건강할 뿐 아니라 원래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원래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각자도생의 경쟁 논리를 벗어나는 상호적인 돌봄의 윤리를 통해 우리의 아픔은 길이 된다. 각자의 구멍은 서로의 통로가 되어, 부족한 너와 내가 맞잡는 손이 되기 때문에. 


 손을 맞잡고, 이 그물망 속에서 우리 또한 얽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거미줄에 붙잡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둘 이상의 줄에 묶여 있다는 것이겠지만, 스스로 어디에도 분명히 속하지 못함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가느다란 거미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선다. 우리는 경계에 서 있기에 거미줄이라는 경계를 뒤흔드는 중간자적인 존재(in-betweenness)들이다. 어디에도 손쉽게 붙잡히지 않는 고유한 인간들이다.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보듬고, 상처였던 것을 피해로 발명해 내며, 정제된 분노,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승화시킨다. 거미줄은 더 이상 우리를 결박하지 못한다. 거미줄 위에서 우리는 손을 맞잡는다. 손을 맞잡은 우리는 거미보다 강하다. 비로소 우리는 오합지졸의 목소리로 거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위해 나와 당신은 자신의 홈을 직면하고 그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져야만 한다. 함께하기 위하여, 거미와 마주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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