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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l 06. 2019

깨어 있는 척

[영화] <주먹왕 랄프>에 드러나는 디즈니식 기만

 이 세계관에서 게임의 악당들은 모두 자기 게임 안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악당들끼리의 자조 모임이 있다. 이 모임은 굉장히 흥미로운데, 바로 전형적인 낙인자의 하위집단 문화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는 ‘나쁜 놈 구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I am bad, and that’s good. I will never be good, but that’s not bad. There is no one I’d rather be than me.” ‘나쁜 나’를 인정하기, ‘나쁜 놈’이라는 꼬리표에 연연하지 말기, 내가 비록 ‘악당’이지만 정말로 나쁜 놈은 아님을 알기. 이는 낙인을 정체성으로 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하위집단 문화의 특징처럼, 그 집단에서 내세우는 정체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면 그는 곧 배척된다. 랄프가 그랬다. 그곳에서는 ‘나쁜 나’를 인정하고 긍정해야 했지만 랄프는 ‘착한 놈’이 되고 싶어 했다. 메달, 친구, 파이를 원했고, 파티에 끼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랄프의 욕망은 존중받지 못했다. “인정해야 해, 그래야 모두가 편해져.” 


 ‘착한 놈’만 빛나는 메달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 노는데, 일이 끝나면 홀로 쓰레기장으로 가는 랄프로서는 이런 욕망을 갖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파티에 랄프를 초대하느니 다른 게임의 주인공을 초대하는 이 캐릭터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따돌림’을 보여준다. 랄프는 무조건 나쁜 놈이고 모든 걸 부순다는 ‘게임 중의 역할’이 랄프 자체에 대한 편견이 되고, 사람들은 랄프를 몰아세우고 편견을 강화해 간다. 랄프는 유독 더 검문당하고, 다른 게임의 캐릭터들조차 랄프를 피한다. 그러나 검문은 단지 랄프가 다른 게임 주인공의 옷을 입고 어정쩡하게 걷기만 해도 피할 수 있을 만큼 얄팍했다.


 랄프는 키가 전반적으로 크고 특히 주먹이 정말 큰데, 이는 말단비대증을 떠오르게 한다. 이 ‘거대함’이라는 기형은 랄프의 존재를 그 자체로 ‘위협’으로 만든다. 랄프가 속한 게임인 ‘다고쳐 펠릭스’에서 캐릭터들이 파티를 벌이는 펜트하우스는 랄프의 키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랄프가 들어가기만 해도 천장이 부서진다. (그리고 이런 잔해는 모두 주인공인 ‘다고쳐 펠릭스’가 간단히 처리한다.) 이 게임에서 랄프는 모든 걸 부숴서 펠릭스가 고칠 것을 만들어 주는 역할로 애초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 


 게임 속 캐릭터들은 랄프에게 메달을 따 오면 ‘착한 놈’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애초에 진심도 아니었을뿐더러 랄프가 메달을 갖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랄프 때문에 모든 것이 망해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는 개별 캐릭터의 노력으로는 프로그램을 넘어설 수 없다는, 구조 속 개인의 한계, 혹은 ‘노오력 담론’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도 읽을 수 있다. 그 누구도 ‘프로그램’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랄프가 메달을 따 오려고 하는 과정은 “인기에 정신이 팔려서 다른 게임까지 망친” 터보라는 캐릭터에 비유된다. 이는 전적으로 부당하다. 터보는 다른 게임이 자신의 게임보다 인기가 많아서 경쟁심에 다른 게임을 망쳤지만, 랄프는 단지 자기가 속한 게임 속 캐릭터들에게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랄프의 ‘노오력’이 상당한 주의를 끌고 결국 변화를 이룩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랄프가 이 게임의 진행에 필수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랄프의 이탈은 곧 게임의 강제 파업이 되었다. 현실에 빗대어 생각하면, 가장 핵심적인 공장의 노동자가 파업해서 공장 전체가 정지되고 이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랄프는 자기 이름처럼(“Wreck it Ralph”) 혼자서도 무엇이든 부수는 힘이 있어서 막힘 없이 인정 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소수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랄프의 ‘트롤성’은 어딜 가나 발현되어서, 랄프가 지나다니는 게임 세상들이 모두 부서지고 망가진다. 물론 랄프의 힘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여럿 있었고, 아주 중요한 순간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 수준으로 ‘슈가 러시’를 구원하기도 하고, ‘다고쳐 펠릭스’와 ‘바넬로피’를 구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들은 대체로 ‘난장판’으로 인식됐다. 랄프는 이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I will never try to be good”이라고 맹세까지 한 뒤에야 그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프로그램은 수정되었다. ‘다고쳐 펠릭스’에는 보너스 게임이 추가되어 다른 게임의 캐릭터들이 초청되었고, 랄프는 거기서 사람들에게 들어 올려지는 등 이전과는 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랄프는 이제 자기 집을 갖고 있고, 그 뒤에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있다. 그러나 사실 랄프는 여전히 혼자다. ‘다고쳐 펠릭스’는 “Dynamite Girl”과 결혼했고 여전히 주인공이다. 왜 랄프는 여전히 쓰레기장에 혼자 머무르는가? 뒤의 환하고 으리으리한 집들을 두고서도 왜 굳이? 왜 이 영화는 ‘다고쳐 펠릭스’를 결혼시키고 랄프는 혼자 바넬로피를 그리워하게 남겨두었는가? 


 여기서 프로그램 자체의 조작은 두 양상으로 그려진다. 하나는 위의 보너스 게임이고, 하나는 터보가 ‘슈가 러시’를 장악하기 위해 바넬로피를 내쫓으려고 사용한 치트키. 여기서는 굉장히 구조주의적인 시각이 드러난다. 구조의 변화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랄프의 보너스 게임은 랄프가 속한 세상의 프로그램의 변형이라는 것이고, 치트키는 터보가 다른 세상을 탈취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 둘에 긍/부정으로 위계를 매길 수도 있겠지만, 전자가 어디까지나 ‘보너스’로 추가되었을 뿐이고, 후자는 구조적 ‘반-기억’을 통해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정립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급진성이라는 기준에서는 후자가 훨씬 훌륭하다. 여기서 내가 불편한 지점이 또 하나 드러난다. 급진적 변화와 탈취, 악당을 연결한다는 점, 그리고 ‘보너스’와 ‘머무르기’를 ‘평화’와 연결한다는 점 말이다. 아, 지긋지긋해라. 그놈의 ‘보너스.’


 이 게임에서 ‘보너스 게임’은 또한 두 가지로 다루어진다. 보너스 게임은 위의 형태로 등장하기 이전에 ‘슈가 러시’에서 ‘오류’로 취급되던 바넬로피가 숨어 살던 공간이다. 오류가 사는 공간, 아직 미완의 공간, 아무도 모르는 버려진 공간으로서의 ‘보너스 게임.’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폐품으로서의 ‘보너스 게임’이 기존 구조를 보완하는 방법이 된다는 점에서 퀴어한 서사라고도 읽을 수 있겠지만, 여전히 보너스는 보너스일 뿐이다. 


 바넬로피의 서사는 또 조금 다른 느낌인데, 그는 ‘오류’라고 따돌림당하고, ‘프로그램의 유지’와 ‘보호’를 위해 배제된다. 그러나 후에 바넬로피는 자신의 오류를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억압한 바로 그 오류를 긍정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후에 플레이어들에게는 ‘초능력 레이서’로 사랑받게 된다. 자신의 낙인을 도리어 무기로 사용하여 승리하고, ‘공주’ 대신 ‘대통령’을 선택하는 바넬로피의 모습은 ‘히어로즈 듀티’의 강력한 여성이 (여기서의 강력함을 보여 주는 요소로 “계집애처럼 굴지 말라”고 하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는 점이 문제지만) 결혼식에서 ‘다고쳐 펠릭스’에게 허리가 꺾여 안기는 장면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여성 캐릭터는 ‘늘씬한 금발의 백인 여성’ 혹은 (심지어 랄프의 주먹보다도) ‘작고 귀여운 일본 소녀’로, 여성 재현의 전형성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다. (겨우 숏컷 정도로 까방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결국 평화와 공존은 ‘프로그램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의 ‘악당’의 소박한 만족과 그리움, 자기 위안으로만 가능하다는, 그렇기에 희생하라는 언명인가. 일부 설정만 자르면 구조주의적 시각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개인의 한계와 희생을 요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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