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질환/통증/몸] 미디어가 요구하는 '상향'의 욕망
* 본 글은 보완되어 <난치의 상상력>(동녘, 2020)의 “‘쓰레기’의 욕망”이라는 글로 실렸습니다.
연세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진행되는 장애인지교육은 끝날 때마다 장애인권 콘텐츠를 추천한다. 여기에는 <셰이프 오브 워터>와 <릴루미노: 두 개의 빛>이 포함된다. 나는 특히 <셰이프 오브 워터>가 좋았다. 다른 데서는 잘 그려지지 않는 장애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욕망이 영화의 전개를 전적으로 견인하기 때문이다. 보면 <릴루미노>에서도 장애여성인 주인공이 관계에서 굉장히 적극적이다. 둘 중 <릴루미노>는 어젯밤에 드디어 봤는데, 다른 상업영화들과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참 잘 만들었지만, 여전히 아쉬움과 의문이 많이 남는다.
애초에 이 영화는 삼성이 저시력 장애인의 시력을 보조하는 신기술을 홍보하려고 만든 것이라, 시각장애인으로 등장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영화 전반의 초점은 전적으로 시각에 있었다. 물론 두 주인공의 사례는 상당히 시각에서 벗어나 있었다. 한 명은 후각을 사용하는 일을, 다른 한 명은 청각을 사용하는 일을 했다. 둘 다 시각적인 보조가 사용될 수도 있지만, 둘의 직업에서 시각은 다른 감각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영화의 전개는 전적으로 ‘사진’으로 풀어져 나간다. 그런데 사진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건 시각이다. 따라서 사진 촬영은 전적으로 봉사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왜 사진이 핵심이 되어야 했는지 물어야 한다.
사진은 가장 대표적이고 대중적인 시각 매체다. 우리는 휴대전화를 고르는 기준 중에 카메라 성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사진이 없으면 글을 못 올리거나 글조차 사진의 형태로 올려야 하는 인스타그램이 가장 인기 있는 SNS 플랫폼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곳에서 사진 혹은 사진 촬영에 대한 접근성이 없다는 건 상당히 큰 상실 혹은 소외로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처럼, 시각장애인이 사진을 찍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따라서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는 사진동호회는 분명 따뜻한 곳이며, 편견을 깨는 설정이다. 당사자들 또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망을 충분히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욕망의 실현은 정말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왜 반드시 사진이어야 했는가? 처음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동호회를 운영하는 교수는 시각 외에 다른 감각을 이용하여 피사체를 느껴보자고 했지만, 실제로 사진을 찍는 과정을 보면 사실상 시각장애인들은 봉사 학생들의 지시에 따라 팔을 움직여야 했고, 그들의 확인을 받아야 했다.
나는 여기서 이 영화 바깥의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어느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나온 시각장애인 요리사에게 고든 램지가 요리의 모양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그 요리사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 또 하나는 <겟 아웃>에서 전맹 시각장애인 미술관장이 자기 조수의 훌륭한 설명을 듣고 작품을 고른다는 장면이다. 이 둘과 <릴루미노>의 사진 촬영은 어떻게 다른가? 앞의 사례부터 보자. 물론 요리는 모양이 아주 중요하지만, 향과 맛, 그리고 익은 정도를 확인할 때는 촉감과 소리로도 판단할 수 있다. 오히려 시각이 보조적 역할일 수 있는 것이고, 그 요리사는 음식을 만들면서 적어도 향과 촉감, 소리에서 결과물의 모습을 상당히 완성도 있게 예측해냈을 것이다. 고든 램지의 설명은 여기서 비어 있는 시각의 측면을 채워 주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시각은 그 요리사에게 마지막 퍼즐이었지, 핵심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맛이니까. 그렇다면 <겟 아웃>은 어떨까? 물론 작품에 대한 설명은 조수가 전적으로 담당하지만, 판단은 관장이 내린다. 결정권과 생각의 여지는 그에게 있다. 사실 예술 작품을 고를 때 갈수록 중요해지는 건 형태 그 자체보다 작품 내용의 판단이기 때문에, 시각이 매우 중요할지언정 그것으로는 전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행위는 좀 다르다. 피사체를 만져 본다고 하더라도 사진의 구도를 남이 설정해 준다면, 여기서 사진을 찍은 이는 누구인가? 오히려 “나는 이런 구도의 사진을 찍고 싶다”라고 시각장애인이 이야기하면 봉사 학생이 그에 맞추어 화면을 자세히 묘사하고, 전맹 시각장애인은 이를 바탕으로 구도를 조금 바꿔 보라는 식으로 지시를 내릴 수 있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이라면 확대기 등을 활용하여 봉사 학생 없이도 충분히 혼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릴루미노>에서는 대체로 봉사 학생이 구도를 잡아 주고 조언을 해 주며 판단을 내려 주었다. 사진 촬영을 주제로 삼고, 그리고 그 과정에 필요한 편의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시각장애인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사람들이 이 영화에 감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은 ‘정상성의 충족’일 것이다. 이 사회에서 장애인은 ‘총체적 무능’이라는 편견에 둘러싸여 있고, 이는 ‘정상적’인 한 명의 사람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심어준다. 그렇기에 장애인의 역경 극복 서사는 정상성을 취득하여 행복해지고 심지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결론까지 함축한다. 특히 그가 절대로 할 수 없으리라 예측된, ‘시각장애인의 사진 촬영’과 같은 일이 성공하면 그는 ‘정상성’을 취득한다. “나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감동 실화.’
그러나 이는 문제의 근본을 감춘다. 시각장애는 비정상이라는, 비장애만이 정상이라는 전제에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시각장애를 제거/보완함으로써 정상에 진입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애초에 ‘정상적인 시력’이라는 기준 자체에 우리는 먼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왜 어느 정도는 정상이고, 어느 정도부터는 비정상인가, 안경의 성능 혹은 의학이 발전한다면 이는 다시 조정될 수 있는가,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세웠는가. 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만, 어떤 경험을 통해서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아니, 왜 그러한 종류의 행복만이 행복으로 통용되고 있는가. 이러한 행복을 벗어나는, ‘비정상’적인 욕망과 행복은 허가될 수 있는가. 주어진 길 외에 도전할 만한 여지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그래도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보다 여러 면에서 낫다. 두 주인공 모두 중도장애인이고, 전맹이 아니었다. 다른 경험으로 인해 서로 부딪히기도 하는 모습이 나온다. 다양한 저시력 시각장애인이 등장하고, 전맹 시각장애인이 한 명밖에 안 나오며, 소통이 점자 일변도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전맹=점자’라는 황당한 고정관념을 깨 준다. 이런 설정들로 ‘(시각) 장애인’이 결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님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태도나 행동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분명히 경고를 보내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서 비시각장애인들에게 특히 많은 걸 깨우쳐 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시각장애인’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불쌍하게 묘사하거나, 보조기구를 통해 시각이 보완되는 장면을 지나치게 낭만화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영화들보다 많은 진전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왜 하필 사진이어야 했는가. 시각을 보조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한데, 왜 하필 가장 많은 의존이 필요한 사진이어야 했는가. 심지어는 두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순간에도 왜 꼭 시각이 사용되어야 했는가.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언어장애인인 주인공이 행복한 상상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행복한 순간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욕망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장애인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사랑과 행복은 ‘잃어버린’ 시각이나 목소리를 ‘되살려’ 주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왜 사랑과 행복의 장면에서조차 나는 ‘정상성’을 담보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상실된 감각의 보충’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볼 수 없는, 볼 필요 없는, 말할 수 없는, 말할 필요 없는, ‘비정상’적인 욕망은 허가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