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룩 Feb 09. 2020

당신의 곁에서 죽어가는 신

뒤늦게 본 영화 <사바하>

* 스포일러 있습니다.


    나는 영화를 제때 챙겨보지 못하는 타입이다. 영화 보는 건 좋아하지만, 먼저 나서서 영화관을 찾지는 않는 편이다. <사바하>는 나왔을 때부터 주변의 평이 좋아서 궁금했다. 스포일러가 싫다는 이유로 평은 한 개도 안 찾아봤다.


    나는 명목상으로만 천주교 신자다. 독실하신 조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미사 참여는 고사하고 기도도 잘 안 한다. 주기도문이 헷갈릴 지경이다.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이 민망하다. 천주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냉담자'라고 부른다. 개신교에서는 '가나안'이라고 부른다는 것 같더라. 그래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정말 성실하게 주일을 챙기며 영성체도 받았고,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안 나지만 심지어 성경 골든벨에서 받을 수 있는 상 중에 제일 마지막 상도 받아 봤다(물론 대상 같은 거 말고 장려상 같은 것 말이다). 밤에 무서워서 잠이 안 오면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왼쪽 엄지손가락 위에 두어 십자가를 그리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하고 기도를 하면 잠이 오곤 했다. 꿈에 예수님도 나왔었다. 사람 모습으로 나왔다고 하니 그렇게 나타나지는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던 주말 성경학교 선생님이 떠오른다(물론 근거는 없었다).


    이런 배경이 있어서일까, 나는 이 영화가 궁금했다. 대충 분위기만 아는 상태로 영화를 봤다.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유튜브에는 영화 속의 종교적 상징들을 맞추는 온갖 해석이 쏟아져 나왔으나, 그런 해석은 읽거나 보지 않았다. <기생충>을 보고 나서도 사회적인 맥락은 고려하지 않은 채 퍼즐 맞추기에 골몰하던 이들이 떠올라서 거부감이 더 들었다. 원래 의도한 바이든 아니든, 나에게 이 영화는 작년 4~5월쯤에 들은 학교 채플의 내용을 떠오르게 했다. 그 채플의 제목은 "A God Who is Weak"였다. 약한 신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영화 내용을 함께 되짚고, 저 채플 내용도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영화 시작부터, 거의 끝나기 전까지도 나는 그 소녀의 쌍둥이 언니가 정말 괴물, 악마, 아니면 귀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 온 몸에 가득한 긴 털, 길고 날카롭고 더러운 손톱, 온통 충혈된 새빨간 눈, 비참한 울음소리. 그는 지푸라기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흙바닥에 쇠사슬로 묶여서 감금되어 있었다. 벌레, 뱀, 쥐와 갇혀 살면서, 그 존재들보다 끔찍한 존재. 악몽에 나오는 시체, 귀신의 형상, 문을 열자마자 코를 막게 되는 악취. 혐오감을 일으키는 모든 요소를 모아놓은 존재. 모든 아름다움을 모아놓고 그것의 여집합으로 만들어낸 존재.


    그런 모습의 존재를 보자마자 우리는 그것을 혐오해도 된다고 여긴다. 아니, 혐오할 수 있고, 혐오해야만 한다고 여긴다. 혐오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고 느낀다. 그런 모습의 존재를 가두고, 삭제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살려라도 주는 게 다행이고, 그럼에도 출생신고는 할 수 없다. 법 바깥의 존재, 행정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 그토록 역겹고 하찮은 존재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불로불사의 존재, 위대한 아버지인 빛나는 '미륵불'의 천적으로 태어났다. 미륵불, '신이 된 사람', 육체를 극복한 사람. 그는 불우한 이들을 돕는 선한 존재다. 그토록 혐오스러운 존재가 선한 이와 대척점에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미륵불은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자신의 뜻대로 사람을 조종한다. 절대선이라 믿었던 '아버지'는 사실 선이 아니었다.


    1899년에 태어난 미륵불은 100년 후 자신의 천적이 영월에서 태어난다는 이야기에, 부친을 살해한 청소년 남성들을 거두어 자신의 아들로 삼고, 그들을 이용해 1999년 영월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다. 자신의 영원한 삶을 언제까지고 유지하려고, 자신의 권력을 수호하려고. 하지만 그는 실패했다. 천적은 태어났고, 기어코 거듭났다. 천적은 미륵불을 죽이고, 자신도 쓰러져 죽었다. 미륵불이라는 위대한 아버지의 악행은 그렇게 끝난다. 여기서 '그것'이라 불리는 존재, 한 소녀의 쌍둥이 언니는 명백히 예수에 대응되고 있었다. 예수가 태어난 마굿간과 '그것'이 태어나서 갇혀 있던 지푸라기 가득한 흙바닥, 무엇보다도 성탄절과 마태 복음. 아래는 영화 속에 등장한 마태 복음 2장 16절의 내용이다.


2:16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헤롯은 예수가 태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 영화 속에서 '미륵불'이 한 짓처럼. 그러나 '그것'은 태어났고, 살아남았으며, 성탄절에 진정 미륵불의 천적으로 거듭난다. 모든 상징이 그 소녀를 예수라고 가리킨다. 신의 표식을 지닌 소녀는 기적을 보이고, 위대한 아버지가 보낸 아들을 깨우친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그것'이 악한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핏줄이 드러나고, 검은 영역이 큰 눈으로 앞의 사람을 노려보며 뱀을 부리는 존재. 그러나 그가 악행을 끝냈다. 그리고 악행을 저지른 자, 그를 직접 죽인 자, 죽인 자를 깨우친 자는 모두 죽었다. 이것이 멸하고, 저것이 멸했다.


    영화에서는 현재 한국의 개신교와 불교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이단을 잡으러 다니지만 돈이 우선인 박 목사, 휘문고등학교의 인연으로 이어진 아주 큰 절의 꽤 높은 스님. 으리으리한 법당의 규모. 당연히 모든 종교인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한국에서 돈 때문에 지저분한 일이 종교계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특정 종교를 비난하거나, 지지하지도 않는다. 다만, 기존의 틀을 바꾸길 요청한다. 기존의 틀은 여러 면에서 뒤집혀 있었다.


    코끼리의 눈을 보며 두려운, 마음속에 악이 깃든 미륵불이라는 형용모순. 악행을 끝내러 지상에 태어난 소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영화 속에서 인간의 딸이자 괴물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한 후 사흘 만에 부활하였지만, 그 소녀의 부활은 나오지 않았다. 그 소녀는 악행을 끝내고 조용히 죽었다. 무엇보다도, '인류'를 구원하지 않고,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영월이라는 도시에서 특정 해에 태어난 이들을 더 죽이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영화의 설정은 '남성'이라는 보편, '인류'라는 보편, '세상'이라는 보편을 모두 뒤집는다. 월경을 통해 '여자'가 된다는 상징은 상투적인 여성혐오의 하나이지만, 바로 그것을 통해서만 세상이 불경하다고 여기는 여성의 피와 욕망으로 '아버지’라는 질서의 전복이 가능했다.


    그런데 소녀는 왜 하필 그런 모습으로 등장했을까. 성별 등의 전복만으로는 무엇이 부족했을까. 왜 소녀는 혐오의 대상이어야만 했을까.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구원하는 이, 메시아, 구세주를 빛나고 강인한, 거대한 모습으로 그리곤 한다. 전지전능한 모습을 기대한다. 그러나 역사 기록을 면밀히 따져보고, 예수가 태어난 지역을 따져 본다면 예수가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는 명백하다는 주장이 꽤 많은 근거로 뒷받침되고 있다고 하더라. 그럼에도 대부분 예수는 백인으로 그려질 뿐 아니라, 항상 깨끗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굿간에서 태어나 도망자 처지가 된 유색인종의 난민이었던 예수는 그런 모습일 수 없었다.


    김이듬 시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구체적인 상황들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어느 나라의 두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유명한 시인에게 누군가 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시인은 답했다. 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이고, 내면의 변화이며, 감정이며 직관이고, 놀이이고, 앎 그 자체이고, 광기이며 황홀경이고, ... 그러자 옆에서 다른 시인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방금 말한 그 모든 걸 빼고 남은 게 시라고. 세상 속에서 가치 있는 대상, 오브제가 될 자격을 박탈당한 것, 불결한 것이 시라고. 즉, 시는 대상(object)이 아닌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고.


    사람들은 약자에게 선하고 깨끗한 연약함이라는 낭만을 품는다. 그러나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기에 소녀는 더욱 끔찍한 형상으로 등장해야만 했다. 환상이 아닌 현실 속의 약자는 그렇게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혐오되니까. 시를 예술로 확장할 수 있다면, 그리고 현대 예술에서 보여주는 혐오스러운 이미지들을 고려한다면, 예술은 바로 그런 혐오의 대상을 포섭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 영화는 약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외면을 극대화해서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바로 그 혐오스러움의 총체가 우리의 희망이고, 구원이며, 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채플의 내용은 이러했다. 강연자분은 2014년 4월의 비극 이후 팽목항에서 유가족들과 함께했다. 그러던 중,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나도, 우리 가족도 기도도 열심히 하고 교회도 나갔는데, 왜 우리 애가 죽어야 했냐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냐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냐고. 강연자분은 그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묵 후에 그는 말했다고 한다. 신은 당신의 아이와 함께 죽었다고. 신은 고통받는 이들을 건지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죽어가는 존재라고. 강연자분은 우리에게 말했다. 신은 수없이 죽고 있는, 그토록 약한 존재라고. 그러니, 신을 구하고 싶다면, 곁에서 죽어가는 이를 구하라고. 네 학기를 강제로 붙잡혀 들어야 하는 채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이 흘렀다.


    영화 속에서 박 목사는 묻는다. 우리는 이 아래서 개미 새끼들처럼 지지고 볶고 있는데, 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냐고. 자신을 빼고 온 가족이 총에 맞아 죽은 기독교 신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신은 도대체 어디 있냐고 묻는다. 우리를 구할 수 있음에도 구하지 않는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배신감일 테다. 영화는 답한다. 신은 위에서 우리를 고상하게 굽어보는 존재가 아니라, 피 흘리는 자들과 지상의 가장 끔찍한 곳에서 함께 울고, 죽어가는 존재라고. 세상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혐오스러운 존재에서 신을 찾아야 한다고.


    '아버지'는 정신분석학에서 법 혹은 규범을 상징한다. 영화에서 위대한 아버지인 미륵불은 출생신고도 안 된 법 바깥의 존재에 의해 죽는다. 사실, '그것'은 애초에 미륵불이 만든 '항마경'에 언급된 81마군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민등록번호를 기준으로 기록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 바깥의 존재라는 바로 그 자신의 위치를 통해 기존의 질서에 대항할 천적으로 거듭날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는 말한다. 신은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처절하게 피 흘리며 살아가고 죽어가며 바로 그런 자신의 위치에서 진실을 말하는 존재라고. 그리고 모두를 구하고 멋지게 숭배될 영웅 따위는 없다고. 부당한 질서가 생긴다면, 그것을 부술 자는 누구도 선하다고 생각지 못할 만큼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존재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며, 오히려 우리가 그를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모두를 구하고 영웅처럼 살아남는 존재는 없고, 자신을 바쳐 하나의 악행을 끝낼 수 있는 연약한 신만이 존재한다. 나의 곁에서는 누가 죽어가고 있고, 당신의 곁에서는 누가 죽어가고 있는가. 신은 멀리 있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욕망은 허가될 수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