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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l 07. 2019

방의 풍경

별 의미 없이 적어 보는 생각

    학기 중에는 레포트를 써야 한다며 책상 위에 책을 가득 쌓아 두었지만, 지금은 몇 권의 책만 남아 있다. 대신에 친구가 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로 사 준 퍼즐이 잘 맞춰져 있다. 그 옆에는 아까 막 택배 상자에서 꺼낸 마우스 패드. 나는 굿즈 때문에 알라딘을 자주 이용한다. 알라딘에서 받은 굿즈들은 내 방에 차곡차곡 쌓인다. 노트, 타블로이드, 이제는 우산까지. 책상 위에, 그리고 온 사방에 널려 있던 책들은 가지런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문화인류학, 장애학, 경제학, 수학, 철학, 문학, 퀴어 이론, 페미니즘. 그외에 분류를 정하기 어려운 책들은 그런 애매한 책들만 모아 놓는 칸에 놓여 있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타인의 소비와 관심사에 많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다. 원래 히어로 영화는 쳐다도 안 보던 사람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다음 작품이 개봉되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심지어는 작은 피규어까지 사 놓고. 블랙 팬서와 아이언맨 첫 번째 수트 버전. 절정은 블랙 팬서 블루투스 스피커지. 사실 음질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블랙 팬서 머리통이 너무 예쁘고 멋있는데 어떡해. 올려 둬야지. 쿠팡 찜 목록에는 스타워즈 피규어들도 담겨 있다. 최근에 금전적 여유가 아주 조금 생겨서 그런 걸까. 


    이렇게 하나둘 사서 모은 것들은 자주 내 SNS에 올라간다. 특히 인스타그램. 그럴 때면 내가 단지 피규어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전시하고 싶어서 산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면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산 책들을 올리는 것도 아주 순수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내가 이런 책들, 이런 어려운 책들을 사서 모으고 어쩌면 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서 물건들을 방에 놓다 보면 이건 어느새 정말 '나의 것'이 되고, 애정이 생기고, 특별해진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물건을 정리하고 버리는 데에 소질이 없다. 여전히 방 구석에는 옛날 물건들이 가득하고, 수험생활 때 공부한 흔적들도 공부가 끝나고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정리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흔적들에 자꾸만 관심이 생기고, 애정이 생긴다. 책상에는 중학교 때 좋아하던 시, 노래와 드라마의 제목이 샤프의 뾰족한 촉으로 새겨져 있고, 구석에는 자주 이용하던 필기구 쇼핑몰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어쩌다 생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미니언즈 모양 스테인레스 통, 영화를 보고 고이 챙겨온 캡틴 마블 팝콘 통, 먹다 남은 약과 여드름 패치, 어릴 때 삼촌께 받은 문진까지 모두 내 책상 위에 올라와 있다. 책꽂이 옆에는 두 번째 베이스의 브랜드 "Epiphone"의 스티커가 크게 붙어 있다. 


    가만 보면, 이런 흔적들은 모두 나의 삶의 일부분이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방의 흔적들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내가 지금 무얼 놓치고 있는지 툭, 건드린다. 내가 베이스를 놓은 세월과 필기구 쇼핑몰을 끊은 세월, 더는 듣지 않는 노래들,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떠오른다. 쌓인 먼지의 양을 보면 내가 얼마나 사물들을 차별대우하고 있는지도 느껴진다. 어, 다 쓴 에멀전 통은 왜 아직도 저기 있는 거지.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않은 것들도 보이고, 버려야 할 이유를 모르는 것들도 보이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쉬운 것들도 보이고, 버리지는 못하면서 먼지 쌓이는 건 잘만 방치하는 나 자신이 웃기기도 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들여온 것들, 좋아해서 사랑으로 품어 데려온 것들, 자랑하고 싶어 장만한 것들은 결국에는 다 나의 일부가 된다. 괜히 장난감들을 한 번씩 만지곤 한다. 책들을 살펴보면서 그 책을 집어온 게 종로였는지 신촌이었는지 떠올려 보기도 하고, 어떤 마음에서 저 책을 골랐는지 생각하기도 하고, 굳이 저 책을 살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후회되는 것들조차 쉽게 다시 버리지 못한다.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까. 


    방은 나의 삶, 나의 역사인 것 같다. 아니, 그냥 방이 나인 것 같기도 하다. 천장과 벽 곳곳에 있는 얼룩은 파리, 모기, 나방이 보이는 족족 파리채로 쳐서 죽이던 과거의 나를 보여주고, 지금 내 벽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이름 모를 벌레는 나의 변화를 보여준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꺼낸 책들은 내 관심사와 게으름을 함께 보여주기도 하고. 방 정리는 귀찮기도 하지만 상당히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더는 필요하지 않거나, 이제는 버려야 할 나의 일부분을 솎아내는 일이니까.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꼭 방 정리가 필요해지는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곧 방이 지저분해지는 걸 보면 무엇이든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조만간 또 방을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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