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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여성, 세상 앞에 서다

2020년 3월 8일에 <이태원 클라쓰> 12회의 마현이를 만난다는 일

by 벼룩

* JTBC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전반, 특히 12회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을 열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마현이. 햇빛이 마현이의 오른쪽 얼굴을 밝게 비춘다.

나는 매달 진보적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 칼럼을 쓰고 있고, 지난 달에는 "해명은 없다"라는 칼럼을 썼다. 트랜스젠더임을 밝히고, 여군으로 군 생활을 이어가겠다고 말한 변희수 하사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분명하게 깨달았다. 몸에는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조금 전, <이태원 클라쓰>의 12회의 마지막에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여태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챙겨 본 것이 12회를 위해서였나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다.


극중 '마현이'라는 캐릭터는 트랜스여성으로 나온다. 그 사실이 처음 밝혀졌을 때, 등장인물들은 모두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고, 적극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편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모두 '단밤'이라는 포차에서 함께 일을 하는 사이였고, 매니저인 '조이서'는 이 사실이 밝혀질 경우 포차의 매출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마현이를 해고하자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지내면서, '장근수'는 그녀를 '누나'로, 조이서는 그녀를 '언니'로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020년 상반기, 한국의 뉴스란에는 두 명의 여성이 나타났다. 변희수 하사와 숙명여대에 합격했던 A 학생. 두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의사의 분류에 따라 남성으로 지정되었고, 이 때문에 자신이 여성임을 숨기며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뜻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했고, 더는 자기 자신을 감추며 살고 싶지 않았다. 한 명의 군인은 수술을 받은 후 새로운 몸과 본래의 자신으로 여군이 되고자 했으며, 한 명의 학생은 (한국에서는 너무나도 까다로운) 법적 성별정정까지 완료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반대'에 부딪혔다. 이들을 '여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 중에는 '여성의 안전', '여성의 경험'을 강조하는 어떤 여성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들의 존재가 부정되는 장면에 강하게 맞선 여성들도 많았지만, 어떤 측면에서 계속 이 상황을 여성들 안의 분열이나 '여자들의 싸움'으로 프레이밍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언론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기여했고, 그 과정에서 문제의 본질인 성별 이분법의 폭력성은 논의의 장에 올랐다가 가려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여성 캐릭터의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묘사하는 드라마가 나왔다. '남자로 여겨지는' 마현이, 트랜스젠더 클럽이 아닌 '일반' 클럽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마현이, 포기하고 싶어도 기회를 잡고 꿋꿋이 요리 실력을 증명해내는 마현이. 그녀의 존재가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는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라는 설정은 그 긴장감이 서사 속에서 위기로 활용될 것이라고 예측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자신이 믿는 사람에게 아웃팅당했다. 아웃팅을 한 사람은 경연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인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비장의 카드'로 그녀의 정체성을 이용했다.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기사, 그 기사를 보고 웅성대는 사람들을 마주한 그녀는 촬영장에서 뛰쳐나간다. 사람들은 너무 화가 나거나 슬플 때,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공간으로 숨곤 한다. 원래 드라마들에서는 화장실에서 우는 모습이 종종 연출된다. 마현이는 여자화장실로 들어갔지만, 그곳에는 그녀가 여성인 것이 의심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들어오자 "여기는 여자화장실"이라고 선을 긋는 여성들이 있었다. 어느 구석의 의자에 앉아서 "도망치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그녀의 사장인 '박새로이'는 말한다. "도망쳐도 돼. 아니지, 도망이 아니지. 잘못한 게 없잖아, 그치. 저딴 시선까지 감당할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야. 니가 너인 것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필요 없어. 괜찮아." 마현이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다.

약간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는 조이서.

그러나 마현이가 닫힌 문을 열고 등장할 때,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두렵지만 닥친 현실 앞에서 마이크를 들 때, 배경으로 깔린 것은 다름 아닌 조이서의 목소리였다. 극 초반부에 클럽에서 마현이의 '여자 같은' 모습을 처음 보고 왜 '일반' 클럽에 왔냐고 묻고, "게다가 주방장이 트랜스젠더라고 소문이라도 나 봐. 분명히 거북해 하실 분들 있다고요."라고 말했던 바로 그 사람. 그랬던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현이를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더는 머리 길이도, 목소리도, 옷차림, 몸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현이를 잘라야 한다고 가장 강하게 말하던 조이서에게 그녀는 이제 함께 일하는 언니일 뿐이었다.


나는 돌덩이
뜨겁게 지져봐라
나는 움직이지 않는 돌덩이

거세게 때려봐라
나는 단단한 돌덩이

깊은 어둠에 가둬봐라
나는 홀로 빛나는 돌덩이

부서지고 재가 되고 썩어 버리는
섭리마저 거부하리

살아남은 나
나는 다이아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얼굴의 반 정도를 가리는 선글라스를 쓴 채 바닷가를 걷는 조이서. 머리가 바람에 날린다.

조이서는 위의 시를 이 시점에 읽어주는 자신이 "나쁜 년"인 것 같다고 말했다. 동료가 아웃팅 당한 상황에도 굳세게 견뎌내어 살아남아서 경연 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압박을 줄 것 같아서였을까. 그런 의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마현이를 잘라야 한다고 주장할 때도, 근수가 나가는 것에 찬성한다고 말할 때도, 조이서의 목표는 이윤과 성공이었으니까. 박새로이가 마현이에게 경연을 포기해도 된다고 말하고 자신이 대신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던 것도 마현이에게 큰 지지가 되었겠지만, 그녀의 결의와 함께 등장한 음성이 조이서의 목소리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벽에 기대어 숨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불안한 표정으로 엿듣는 마현이.

마현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성'임을 '해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클럽에서 '들켰을 때'도 그녀는 당황했을지언정 당당했다. 오히려 그녀가 가장 긴장한 순간들은 요리 실력이 의심받는 순간들이었다. 자신의 요리 실력이 주방장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질책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이 호출되던 순간, 그리고 주방장이 되기 위해 요리를 연습하면서도 반복해서 맛이 없다는 평가를 받던 순간들. 그녀는 자신의 요리가 인정받을 때까지 계속 노력했고, 결국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동료였던 박새로이에게 커밍아웃을 했었고, 그의 지지를 받으며 그가 차린 식당의 요리사가 된 후, 노력의 결과로 결국 전국 최고의 포차들이 모이는 경연에서 2연속 1등이라는 성과까지 낼 수 있었다.

변희수 하사의 군인권센터 기자회견 모습. 자막의 내용은 바로 아래 문단에. 오마이뉴스 캡쳐.

나는 이러한 모습에서 변희수 하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세상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자신은 "엄격한 심사 과정을 통해 결국 부사관으로 임관할 수 있게 됐"다고.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군인으로서 자신의 진정성, 그리고 군인이 되고자 거친 수많은 노력을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편견에도 자신은 "최전방에 남아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 계속 남고 싶다"고 말했다. "해명은 없다"에도 썼듯, 그녀는 "자신의 몸이 아닌, 자신의 의지와 꿈을 설명했다. 그건 용기였고, 증명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과 정체성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회 앞에서 해명의 요구를 거부하고 당당히 자신이 군인임을 증명했다.

마현이는 경연 프로그램 촬영장에서 자신의 자리에 서서 마이크를 든다.

바로 여기서, 잘못이 아니기에 도망칠 수도, 해명할 수도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그녀는 마이크를 들고 말한다. "단밤 요리사 마현이, 저는 트랜스젠더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우승하겠습니다." 요리사라는 소개로 시작해서, 우승의 결심으로 끝나는 이 한 줄이 모든 걸 설명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변희수 하사의 기자회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지지하고 걱정하며 바라보는 동료들과 편견 가득한 세상 앞에서 최고의 실력을 증명하는 요리사의 모습은, 자신을 지지해 준 이들을 떠올리며 군인임을 증명하던 한 군인의 모습과 오버랩될 수밖에 없었다. 조이서의 전화는 정체성으로 인해 고통받을 마현이를 위로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요리사로서 마현이가 꿋꿋이 나아가길 바라는 의미였다. 결연한 표정으로 촬영장에 들어서는 마현이의 모습에 박새로이가 아닌 조이서의 목소리가 배치된 것은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사실 내내 <이태원 클라쓰>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재밌게 보고 있기는 했지만, 복수 서사의 가장 중심에는 오직 남성들뿐이었으며, 멋진 여성들이 등장했음에도 그들은 박새로이의 조력자에 지나지 않기도 했다. 이처럼 아쉬운 이야기들도 따로 정리해서 적고 싶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다음 글로 미뤄두고, 당장 아까 본 이 장면들에서 나는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태원 클라쓰> 12회는 3월 7일 밤에 시작해서, 3월 8일이 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끝난다. 드라마 자체가 길기도 하지만, 중간에 시몬스나 깨수깡 등의 광고가 워낙 많이 들어가서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넘어간 날짜가 너무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마현이가 세상 앞에 마이크를 들고 선 때는 이미 3월 8일이었다. 공교롭게도,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다. 트랜스여성인 그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에 맞서 마이크를 들고 능력을 입증해 보이겠다고 당당하게 말한 순간은 한 트랜스여성이 강제 전역을 당하고, 한 트랜스여성이 입학 거부 운동에 부딪힌 2020년의 여성의 날이다.


보수동쿨러라는 밴드가 여성의 날을 소재로 만든 '0308'이라는 곡에는 아래와 같은 가사가 나온다.


무언가를 깨트리는 것은 경계를 부풀리는 새로움을 전해줄 것이다.
익숙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인정하자.
살아가며 우리가 배운 건,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 아닌가?


드라마의 대사를 그대로 빌리면, 마현이는 "남자로 태어나면 남자로 살고, 여자로 태어나면 여자로 사는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사는 "가장 센 여자"다. 트랜스여성은 성별 이분법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강력한 여성이다. 성별 이분법을 깨트리는 것은 성별의 경계를 부풀려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것이다. 영원한 건 없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성별 이분법도 그렇다. 그렇게 경계를 부풀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연대였다. 숙명여대에 합격했던 예비 대학생이 입학을 포기하며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나는 그래서 이 사회가, 모든 사람의 일상을 보호해 주기를, 다양한 가치를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그런 길만이 우리 사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제 바람에 공감해주시고 지지를 보내주신 여러 개인, 단체에 감사를 표한다. 만약 그분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연약한 개인은 쉬이 지치고야 말았을 것이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살아주시는 여러 사람들께 감사를 표한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일상은 일상일 수 있다. 나는 비록 여기에서 멈추지만, 앞으로 다른 분들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또 감사한다.


그녀의 입학 포기는 자신의 생존과 일상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하면서도 자신과 함께한 이들의 연대에 감사를 표했고, 자신을 두고 일어난 이 사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연대는 또 다른 희망과 용기로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된다. 숙명여대 안에서도 입학 거부 운동에 반대하며 그녀의 입학을 환영하는 이들이 있었다.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그녀에게 연대하는 글을 썼고, 많은 이들에 그 뜻에 함께했다. 어쩌면 조이서의 목소리는 요리사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라는 메시지인 동시에, 마현이와 함께하는 여성의 음성이기도 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 에피소드에 대한 감상을 앞서 언급한 곡 '0308'의 후렴구로 맺고자 한다. 앞의 가사 중 "살아가며 우리가 배운 건,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 아닌가?"에서 마지막의 "아닌가?"는 앞의 말 이후 조금 긴 공백을 갖고 등장한다. 어쩌면 이는 앞의 말을 확인하는 말이 아니라, 앞의 말이 정말 사실인지 의문을 가지며 던지는 '아닌가?'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것은 어쩌면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함께라면. 나는 그 가사에 이어지는 가사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서로를 비춰 보고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용기가 될 끝없는 '우리'를 떠올리며.


우리는 서로를 비춰 봐
우리는 끝이 없을 거야
우리는 끝이 없을 거야
우리는 끝이 없을 거야
사람들 사이로 마현이가 빛을 등지고 촬영장에 걸어온다. 조이서는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얼굴의 반 정도를 가리는 선글라스를 쓴 채 바닷가를 걷는다.

추신1. "해명이 없다"라는 글에서 나는 변희수 하사를 '그'라고 지칭했다. 이는 성별 중립적인 용법으로, 이번 글에서도 똑같이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 여성들을 '그녀'라고 지칭한 이유는 이번 에피소드의 조이서가 변희수 하사를 응원한 여성들과 합격생을 환영한 여성들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조이서의 목소리가 마현이의 결의와 함께 등장한 이유.


추신2. 클럽에서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 마현이는 긴 가발을 쓰고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있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여성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하는 트랜스젠더'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클럽 안의 다른 여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트랜스여성이나 시스젠더 여성이 아닌, 여성들이 마땅히 입어야 할 옷을 맘대로 한정하는 성차별적 사회일 것이다. 이는 주변인들로부터 "예쁘다"라는 표현을 들은 마현이가 좋아하는 장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마현이는 수술 이후에도 짧은 머리를 유지했다.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은 장면도 나왔지만, 거의 모든 장면에서 단조로운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