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런 온>이 퀴어베이팅이라는 비판에 대하여
*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JTBC 드라마 <런 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런 온>은 작품성이나 소재, 배우들의 유명세에 비해 의외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치밀하고 섬세하다'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인물에게 서사가 있고, 그 서사가 명시적으로 길게 다루어지지 않을지언정 시청자에게 인물들을 납득시키는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었다. 배우들도 다 매력적이고, 화가, 번역가, 에이전시처럼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많이 경험하는 사람들을 보여주었다는 점도 좋았고, 관계에 접근하는 방식이 아주 섬세하기도 했고. 일일이 열거하기는 힘들다.
이렇게 드라마를 재밌게 본 나에게도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이건 나만의 고민은 아니었을 텐데, 바로 이 드라마가 '퀴어베이팅(queer baiting)'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퀴어베이팅은 간단히 말해 '퀴어인 척 함으로써 퀴어를 낚는' 것인데, 나에게 가장 고민이었던 건 '서단아(최수영 분)'라는 인물의 설정이었다. 그는 결혼하기 싫다는 이유로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밝힌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이 실제로 거짓말인지 알기 위해서는 드라마를 끝까지 봐야 했다.
사실 이 인물은 성격이 제멋대로라 본인 하고 싶은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는 설정이 있어서, 과거에 한 것으로 나오는 커밍아웃에 대해서도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양성애자인데 레즈비언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그냥 지 멋대로 한 소리일 수도 있고. 극중에서 게이로 나오는 '고예준(김동영 분)'과 마지막 회에서 나눈 대화에서야 서단아의 커밍아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다.
딱 여기까지만 보고 판단한다면, 이 드라마를 퀴어베이팅이라고 평가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몇 가지가 우선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퀴어베이팅'에서 나오는 '퀴어'의 범주에 대한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퀴어물'을 좋다고 할 때마다 나는 그것이 정말로 '퀴어'한지 되묻게 되었다.
그런 문제의식은 <콜 미 바이 유얼 네임>과 <셰이프 오브 워터>가 공통적으로 범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나의 비판에도 담겨 있다. 두 영화의 경우 전자는 두 남성의 사랑을, 후자는 장애 여성과 인간 아닌 존재의 사랑을 다루지만, 결말에서는 둘 다 유도체화(derivatization)의 문제를 답습하고 있다. 유도체화는 원래 화합물의 구조를 조금씩 바꿔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화학적 과정으로, 앤 카힐은 이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적용해서, 상대를 자신의 욕망을 담아내는 그릇으로만 취급하는 것으로 정의했다(Cahill, 2014 : 844~845). 즉, 한 쪽이 다른 쪽으로 흡수/환원되면서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이는 사실 이성애 연애에서 가장 많이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기도 하며, '데이트 폭력' 혹은 '교제 폭력', '가스라이팅(gaslighting)'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저 두 영화가 정말로 '퀴어'한지 의문을 제기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퀴어'에 대해 뒤에서 더 서술하겠지만, 우선 명확히 해두어야 할 것은 '퀴어'가 '동성애(자)'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미 마리누치는 '퀴어'가 '게이'의 대안적 표현으로서 일상화되었고, 이처럼 "'게이'를 '퀴어'로 대체하려는 최근의 느슨한 경향이 '게이'의 재현적 한계들과 비교되는 '퀴어'의 재현적 풍부함을 드러내려는 중요한 이론적 연구를 무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2018, 18).
퀴어와 동성애(자), 특히 퀴어와 게이는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퀴어의 범주는 그보다 훨씬 넓고, 또 불안정하다. 퀴어와 동성애(자)를 동일시하는 이들에 대한 퀴어 이론 안팎의 비판은 상당히 많다. 특히 미국의 맥락에서 퀴어 이론은 사실상 백인 중심의 동성애 이론이었다는 비판은 꽤 익숙하다. 수전 스트라이커는 이를 비판하고자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루인은 퀴어 이론이 이성애규범성(heteronormativity)을 지적하는 논의 구조가 이성애-동성애 이분법을 (재)생산함으로써 "동성애 이슈만을 퀴어 이슈의 대표 혹은 가장 중요한 이슈로 재현"한다고 비판한다(2012 : 83).
하지만 많은 비판에도 퀴어 이론은 너무도 자주 게이나 레즈비언을 위한 코드로 남겨졌으며, 이는 이성애를 문제 삼는 방식보다는 동성애를 안정화하는 방식이었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성애가 정상인 것처럼 동성애도 정상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이것은 섹슈얼리티에서의 '정상' 그 자체에는 크게 질문하지 않고, 동성애를 퀴어의 대표로 만들면서 새로운 정상성을 구축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동성애만 언급하면 모든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 주체가 언급되는 것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루인, 2012 : 99)라는 비판은 지금도 유효하다. 따라서 '동성애자가 조연으로만 등장했고 이성 연애 장면만이 등장했다'라는 것을 근거로 어떠한 콘텐츠를 '퀴어베이팅'으로 비판하는 건 동성애규범성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퀴어' 혹은 '퀴어하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지 이성애자가 아닌 존재가 등장하는 것으로 이를 정의할 수 있을까? 미미 마리누치는 '퀴어링queering' 혹은 '퀴어하게 하기'가 특정한 말이나 논의의 안정성을 붕괴시키는 것, "무언가를 복잡하게 만드는 과정"이며, 따라서 "반드시 성적인 맥락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2018 : 23). 성이 결부된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퀴어'하게 만드는 건 단지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넘어 '시스젠더-헤테로로맨틱-헤테로섹슈얼-연애-결혼-...'이라는 하나의 곧은(straight) 연속체를 휘어놓거나, 그 곳곳에 구멍을 만드는 일이다. 즉, 기존에 사회적으로 '규범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묘하게 비틀고 반박하며 새로운 재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드라마가 한국 로맨스 드라마 계의 장인(!) 중 한 명인 김은숙 작가의 보조 작가 출신인 박시현 작가의 작품임을 고려한다면, <런 온>에 대한 정확한 비평은 'K-로맨스'의 맥락 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이 드라마를 뜯어볼수록, 그 면면은 기존의 맥락을 교묘하게 하나씩 전복시켜 둔 형태이다. 다만 그 전복이 아주 명시적이지 않고,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어서 쉽게 알아채기가 어렵기도 하다.
차갑고 싸가지 없는 남성 재벌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밝고 예쁘게 자란 어린 여성 사이의 로맨스는 서단아와 이영화의 관계에서 성별이 뒤집히면서 동시에 그에 따라 상당한 양의 디테일이 추가되었다. 무턱대고 여성을 '구원'하고 걸핏하면 동의도 없이 집으로 찾아가는 잘생긴 남성은 술 마시는 여성들 옆에 다소곳이 앉아 과일을 깎고 먼저 기다리고 눈물 흘리는 인물로 바뀐다(기선겸).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연애나 가족보다 자신의 일이 먼저이고, 자신을 정의하는 건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는 걸 16회 내내 명료하게 보여준다. 무성애자도 연애하고 키스도 한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에이엄브렐라에 대한 흔한 편견에도 도전한다(박매이).
사실 이것들 외에도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축을 이야기하자면, 그건 바로 정상 가족의 유지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이성애자 남성들이 드라마에서 내내 문제화된다는 점이다(기정도, 서명필, 서명민).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문제화는 단지 '성차별주의자 남성'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결국 이성애규범성에 대한 문제화로 나아간다. '왜 꼭 결혼해야 하나' '반드시 연애할 필요는 없다'는 드라마 전반에 깔려 있고, 흔한 K-로맨스의 결말과는 달리 결혼하는 사람도 결국 없다. 지금껏 온갖 매체를 통해 유통되어 온 연애에서의 (해로운) 남성 역할에 대한 대안도 함께 제시한다(기선겸, 정지현 실장).
그래서 나는 드라마 <런 온>이 퀴어베이팅이라는 비판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나에게 <런 온>은 한국 로맨스 드라마 시청자층을 유인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서사, '퀴어한' 각본을 기입하려는 시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이 드라마의 인물은 대부분 이성애 연애를 하는 듯하지만, 그 관계의 양상들은 크게 다르며, 남성이나 여성 인물에 대한 관습도 대체로 비틀려 있다. 그래서 내가 본 <런 온>은 '다양성을 결국 헤테로 로맨스로 수렴시키는' 작품이 아니라, '헤테로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사실은 얼마나 다양한지' 알려주는 작품이다. 퀴어문화축제에서 극성 헤테로로 보일까 봐 손 잡기도 꺼려진다는 양성애자 커플이나 이성애자-범성애자 커플의 사례가 떠오른달까.
이런 이유들로 나는 <런 온>이 퀴어베이팅보다는 오히려 (물론 이런 용어는 없지만) '헤테로베이팅'이라고 생각한다. 보통의 한국 로맨스 드라마인 척 하지만, 사실 들여다볼수록 독특하고 섬세하게 꼬여 있고 뒤집혀 있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여전히 이 드라마를 다른 맥락들로 퀴어베이팅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퀴어함'이'동성 연애의 등장'에 반드시 의존하지 않으며, 'straight'으로 보이는 이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정의상 '퀴어한'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보자. 서단아의 가짜 커밍아웃은 극중에서 어떻게 기능했을까? 단아는 예준에게 이영화(강태오 분)를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마지막 회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단아: 미안해요
예준: 네?
단아: 그때 내가 했던 짓거리가 좀 무례했던 것 같아서. 남의 감정을 막 그렇게 묻고 그러면 안 됐던 건데.
[과거 회상] 단아: 좋아해요? 저거 그린 학생.
[다시 현재] 예준: 좋아해요. 물어준 사람이 처음이라 사실 대답하고 싶었어요, 그때. 말 한마디면 되는 건데.
단아: 나 사실 결혼하기 싫어서 집에다가 가짜 커밍아웃 했어요. 누군가에겐 일생일대의 굴레였을 텐데 나는 그거 핑계로 삼았어서, 미안합니다.
예준: (희미하게 웃으며)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도 고민이 많았다. 우선 예준의 반응에 대해서 의견이 갈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예준이 단아에게 대답할 때 배어나온 것과 같은 감정은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사실 그 사람을 좋아한다'라는 말 한 마디가 목구멍까지 올라오고, 말할 기회가 생기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은 말을 꺼내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더욱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건 단아의 대사들이다. 개인적인 사과로 시작했지만, 그 이후 가짜 커밍아웃에 대한 사과에서 예준은 개인이 아닌 동성애자 일반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짜 커밍아웃은 어쨌든 '예준'에게 한 잘못은 아니니까. 이건 적절할까? 이 또한 부적절하다고 비판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예준은 한 명의 인물일 뿐이지 특정 인구집단을 대표하지 않으니까. 물론 과대대표는 보통 고정관념의 재생산과 결부되어 문제화되지만, 이 드라마에서 게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답습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 이 지점을 비판하려면 좀 더 복잡한 문제화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으로 이 장면은 최근 반복된 사회적 문제를 겨냥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여러 정치인들은 아무 맥락에나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여서 단어의 본래 의미를 흐렸는데, 이는 단지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어의 역사와 방향성 자체를 왜곡하고 삭제하는 행위였다. 커밍아웃은 단지 '드러남'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 고민한 과정부터 드러낸 이후의 갈등과 고통, 행복까지도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커밍아웃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고, 이것이 별일 아니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한국의 맥락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큰 논란이 된 사건들도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이 장면은 조금 더 큰 사회적 맥락에 접속하고 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영화든 드라마든 모두 사회적 맥락에서 만들어지지만, 드라마는 회차가 많고, 인물도 많고, 주제도 다양하기 때문에 비평할 때 그만큼 더 꼼꼼히 봐야만 한다. <런 온>도 그렇다. 호모포빅하고 무지한 한국 사회에서 기존의 관습을 촘촘히 뒤집으려 고심한 로맨스 드라마라는 점을 고려해야만 유효한 비평이 가능하다. 나는 이 드라마가 헤테로베이팅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퀴어베이팅이라는 비판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러한 비판에서도 역시 이런 맥락들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주류 매체와 대중문화의 재현은 그것이 얼마나 낙관적이고 그 수가 많은지에 상관없이, 우리의 평평한 스크린 너머에 존재하는 3차원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민감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폭력을 약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은 그 배후에 다소 조화롭지 않게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같이 그리고 사실은 그 부조화 자체와 같이, 사회적 정의라는 문제를 사실상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 미미 마리누치, <페미니즘을 퀴어링!>, 권유경, 김은주 옮김, 봄알람, 2018, 14쪽
위 인용문은 문화적 재현의 한계와 가능성을 압축적으로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다. <런 온>의 재현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고, 사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나는 거기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어떤 행위들이 폭력적인지, 기존의 유해한 남성성은 어떻게 대체될 수 있으며, 여성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와 같은 점들을 고민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사회적 정의의 차원에서 이를 고려하게 된다면, 이런 재현은 등장인물들을 넘어 현실을 '퀴어링'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인 (2012). 수잔 스트라이커. 여/성이론(26), 81-103
미미 마리누치 (2018). 페미니즘을 퀴어링!. 권유경, 김은주 옮김. 봄알람.
Cahill, A.J. (2014), The Difference Sameness Makes: Objectification, Sex Work, and Queerness. Hypatia, 29: 840-856. doi:10.1111/hypa.1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