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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폭력으로 이해하기

‘집게 손가락 모양’ 논란이 변화의 초석이 되려면

by 벼룩

잦아들 만하면 다시 이상한 일이 생기는 ‘집게 손가락 모양’ 논란은 최근 행정안전부의 ‘남혐 논란 사과’​로도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남혐 논란’이라는 건 그 자체로는 꼼꼼히 분석할 만한 뭔가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한 가지 논점을 끌어내 보려 한다. 바로 폭력을 폭력이 아닌 유희로 받아들이면서 그걸 토대로 친밀함을 쌓아나가는 학창시절 남성 집단의 특징이 ‘크기’에 대한 집착을 불러온다는 것.


나는 남중•남고를 다녔는데, 그때 학교 안에서는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대상화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크기’에 따른 서열이 존재했다. 학교에서 서열을 정하는 기준에는 시험 성적, 운동 능력, 외모, 키 등이 있었지만, 다소 황당하게도 ‘크기’는 종종 다른 기준들을 압도하곤 했다.


그럼 대체 다른 사람의 ‘크기’는 어떻게 알았나. 같이 목욕탕을 가거나 해서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화장실이나 심지어 복도 혹은 교실에서 갑자기 남의 하의를 속옷까지 내려서 ‘크기’를 확인하는 남자애들이 있었다(그냥 남의 성기를 겉에서 만져보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런 애들이 다수였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런 행위들은 명백히 다수에 의해 용인되고 있었다. 적지 않은 애들은 그렇게 확인된 ‘큰’ 애들을 우러러봤고, 그건 (여성과의) 연애와 직결되는 것처럼 여겨졌다(이렇게나 과잉된 남근 중심적 사고라니..).


그런데 앞 문단에 쓴 그런 행위들은 너무 당연하게도 폭력이다. 좀 더 정확히 쓰면 그건 일단 강제추행이고, 그 이후에 남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건 성희롱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있던 학교에서는 이런 것에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고, 그런 폭력을 당연한 것, 혹은 놀이로 받아들여야만 ‘정상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크기’는 서열이나 위계가 되고, ‘작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 형성된다.


물론, 이런 상황이 없더라도 누군가가 ‘너 작아’라고 말하면 그건 열등감이 생기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고, 그런 말이나 손가락 모양이 누군가에게는 실제로 수치심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크기’를 중심으로 하는 것 자체가 비장애 신체를 기준으로 두고 있기도 하고 종종 인종주의적으로 이어지기도 하므로 ‘크기’ 이야기 자체가 별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열등감이나 ‘크기’에 대한 집착이 어떤 관계들 안에서 생겼는지 따지지 않고 손가락 모양만 붙들고 늘어지면, 정작 ‘크기’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이나 특정 손가락 모양에 대한 분노를 해결하는 것에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심리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온갖 데에서 손가락 모양 찾아서 검열하겠다고 난리 칠 게 아니라, 성관계를 남근중심적으로만 이해하는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면서, 동시에 자신의 어떤 경험들을 놀이나 당연한 또래문화가 아니라 폭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온갖 기업들뿐 아니라 국방부​에 행정안전부까지 저 ‘남혐 논란’을 마치 정당한 이의제기인 것처럼 그대로 받아주고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성들이 자신이 경험한 폭력을 폭력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데에 분풀이하도록 온 사회가 나서서 부추기는 일이기도 하다. 즉, 이는 단지 ‘무식한 남성들과 무력한 기업/기관들’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폭력을 유희로 덮어 온 남성들과 이 구조를 재생산하는 사회’로 봐야 한다.


물론, 자신이 겪은 폭력을 폭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경험을 다르게 기억하는 일이 아니고, 자신의 특정 삶의 구간이나 모습들을 ‘피해(자)’로서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한다는 일(remember)은 사지를 분리했다가 다시 조립하는(re-member)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그러나 폭력을 폭력이 아닌 유희였다고, 혹은 그때의 불쾌함이나 수치심이 그저 자신이 예민한 탓이었다고 생각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부정하게 된다. 나아가 그걸 부정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감정과 경험까지도 부정하게 된다. 그 누구의 존엄도 지켜질 수 없는 이런 기괴한 관계 구조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손가락 모양 논란’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초석으로 삼으려면, 우리는 자신의 경험 중 어떤 것들을 폭력이나 피해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보는 시좌를 재설정하는, 소위 ‘빨간 약을 먹는’ 구체적인 과정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어떻게든 이 참담한 ‘논란’을 더 나은 방향으로 조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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