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룩 Dec 18. 2021

죽어가듯 사랑하는 일

해서웨이(hathaw9y), '항해박명'

* 2021년 12월 16일 해서웨이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항해박명 듣고 잔다고 채팅에 썼더니, 베이시스트 특민 님이 감상문을 쓰라고 하셨다. 원래도 쓰고 싶었는데 구실이 생겨서 행복하다.

앨범 <Boy Loves Hayley> 커버. 살짝 열려 빨간 부분이 보이는 성냥갑 위에도 앨범 제목이 적혀 있다.

해서웨이를 처음 접한 건 네이버 온스테이지 무대였다. '낙서'라는 곡을 처음 들은 후, 나는 2020년 11월 18일에 발매된 <Boy Loves Hayley>의 'boy', 'love', 'hayley'를 연달아 듣곤 했다. 원래 어떤 노래를 듣든 가사에 대단히 집중하는 편이 아니라서 곡의 분위기부터 캐치하곤 하는데, 이 앨범은 뭔가 간질간질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거나 좋아하게 되었을 때의 떨림이나 설렘, 자신감은 샘솟다가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사랑은 눈물이나 비난으로 변한다.


"난 아녔는데 / 이게 아닌데 / 어쩌다 내 맘이 네게 잠겨 버렸나"

"만약 내가 너의 손 잡으면 / 너는 떠날까 / 널 품에 끌어안고 눈 감으면 / 너는 떠날까"

"너를 참을 수 없게 되면 / 나는 어떡해 / 너를 안을 수 없게 되면 / 나는 어떡해"


2021년 8월 7일에 발매된 <Woo Scribbling Night>에도 세 곡이 담겨 있다. 이곳의 노래들은 앞의 앨범과 달리 모두 가사가 한국어라, 처음에 가사를 유심히 듣지 않는 나에게도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기분 좋게 떨리는 'Woo'를 듣다 보면 연애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의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다른 곡들보다 조금 더 발랄하고 가볍게, 가늘게 흐르는 물줄기 같은 기타 소리, 설레고 기분 좋은 숨소리 같은 코러스.


"너와 나 사이의 벽에는 낙서만 가득해 /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왜 그렇게 우린"

"희미해진 촛불 / 새까맣게 그을린 벽지 / 비어버린 잔들 / 채울 수 없었잖아 우린 / 우린 늘 혼잔걸"

"당신은 어디로 떠나나요 /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 또다시 다른 이를 찾을까요"


'낙서'를 처음 들은 건 3년의 연애를 끝낸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아직 <Woo Scribbling Night> 앨범으로 발매되기 전, 네이버 온스테이지에 2021년 4월 15일에 업로드된 영상. 한 줄 한 줄이 모두 와서 박히는 가사에 한동안 그 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서웨이의 음악에서 가장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지점은 베이스, 드럼, 기타, 보컬, 코러스 중 어느 하나도 과장되게 감정을 담는 대신 표현을 절제하고 담담하게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다. 중간에 연주가 멈추고 특민의 보컬만 나오다가 드럼 소리가 퍼지는 순간, 그리고 목소리로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는 듯한 기타의 완급조절은 바로 그 매력을 극대화했다. 이별과 그 이후에 찾아오는 후회나 미련, 허무함을 이보다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까만 밤이 될 테니 그대는 별이 되어 달라는, 비교적 빠르고 높은 기타 소리가 깔리는 '까만밤'에서는 허무함이나 후회 대신 지난 인연을 수용하고, 고통은 추억이 되어 가는 듯하다.


싱글 <항해박명> 커버. 오래된 지도 중앙에는 둥근 나침반 같은 것이 있다.


"스치는 바람에 / 춤추듯 떨리는 / 붉게 물든 너는 / 마치 어제의"

"아득히 멀어진 / 너의 미소가 / 사무치게 스며든 / 나의 오늘은"


'항해박명'은 내게 해서웨이에 대한 첫 인상을 다시 떠오르게 하면서도, 또 다른 층위에서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곡이 진행됨에 따라  담담한 가사와 목소리, 연주가 담긴 댐에는 조금씩 금이 가는 것 같다. 연인을 떠나보낸 후에 그가 남기고 간 기억과 흔적들을 멍하니 쳐다보며 회상하다 보면, 닿을 수 없는 행복을 향한 슬픔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 슬픔은 직선보다는 지수함수처럼, 아주 조금씩 쌓이다가 어느 시점부터 걷잡을 수 없이 나를 무너뜨린다.


"아직 너의 작은 손짓에 난 무너져 떠나지 마 / 잊으려 애를 써도 지워지지가 않아 가지 마"

"우리 좋았었잖아 다정한 손길로 지내던 밤 / 잡으려 애를 써도 닿을 수 없는 날 떠나지 마"


세면대 앞에서 왜 열어 두었는지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수도꼭지를 멍하니 쳐다 보다가 문득 넘쳐 흘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릴 때, 감정은 댐이나 방파제에 출렁이며 부딪히는 파동처럼 밀려온다. 그럼에도 여전히 절제된 목소리는 아직 이 상황을 충분히 슬퍼하지 않겠다는 듯하다. 충분히 슬퍼하면 정말 이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니까, 난 이제 너에게 무너지지 않아야 하고 너를 잊고 지워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래서 두 번째 연주 부분은 가장 아프다. 말로는 꺼낼 수 없어도 마음으로는 이미 알고 있는,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알고 있는 이별에 대한 감정은 기타 소리로 터져 나온다. 자신을 지키려고 어떻게든, 주변에 있는 뭐라도 붙들고 심호흡을 하는 듯 절제된 베이스, 터져나오려는 어떤 소리와 손짓과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대신하는 듯한 드럼, 그리고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하는 기타, 여기에 이어지는 떠나지 말라는 말, 가지 말라는 말.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긋이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사랑은 때로 자신에게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끌어내곤 한다. 인간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을 때도, 이런 게 인간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들을 사랑 안에서 발견하곤 한다. 행복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함께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느끼곤 한다. 그래서 슬퍼할 때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다. 사랑할 때만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인간일 때만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어느 날부터였을까, 나는 마치 감정을 잊은 사람처럼 눈물을 멈췄다. 울고 싶지도, 고통스럽고 싶지도 않았지만, 눈물이 멈추는 게 고맙지도 않았다. 질끈 감은 눈과 잔뜩 웅크린 다리는 점점 풀어져 어느 밤부터 나는 그저 편하게 누워 유튜브를 보다가 잠들었다. 이건 괜찮은 게 맞는 걸까, 혹은 괜찮아도 괜찮은 걸까, 가장 아픈 순간이 지나고 나서 찾아온 평화는 왜 평화보다 적막처럼 느껴지는 걸까.


한때 나를 살게 했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나를 죽게 만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나를 죽어가게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분명한 것은 아직 그것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죽어가듯 살기로 했습니다.

한순간 타오르는 노을 안으로 몸을 던져가며 죽어가기로 했습니다.
아, 어쩌면 저는 이미 그 안에서 뉘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가듯 죽어가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 <항해박명> 소개


지금까지 내가 들은 해서웨이의 곡에 깔끔하게 잊고 새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없다. 끌리고, 싸우고, 속상하고, 아프고, 이별하고, 잊지 못하고, 어제와 오늘에 파묻혀 내일은 안중에도 없고, 제발 떠나지 말라고 외치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왜일까. 어쩌면 바로 그런 미련과 후회와 아쉬움과 슬픔이, 이제 더는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떠나지 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들이, 그 순간의 나에게 남아 있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살게 했던 것들, 나를 웃게 했던 것들, 나를 기쁘게 했던 것들이 나를 죽이고, 울게 하고, 절망으로 밀어넣을 , 그러나 그것들을 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없을 , 나는 그것을 끌어안고 죽어가듯 살아야만  것이다. 여전히 너의 작은 손짓에 무너진다고, 다정한 손길들을 잊을  없다고, 이렇게나 내가 어리석고 약한 인간이라고 말할 , 그렇게 사랑하기로  , 비로소 죽어가는 일은 살아가는 일과 비슷해지는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죽어가듯 사랑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견딜 수 없이 슬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