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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n 28. 2023

쓰레기통과 스테이지

The Chemical Brothers, Midnight Madness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때로 나는 일렉 음악을 만드는 The Chemical Brothers의 'Midnight Madness'의 뮤직비디오를 본다. 일단 틀면 한 번이 아니라, 적어도 대여섯 번은 본다. 열 번 넘게 하염없이 반복해서 재생하는 적도 있다. 


이 영상을 보고 있으면 나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끼곤 했다. 저렇게 움직여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밤거리를 좋아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전부 합치면 백 번은 넘게 봤을 이 뮤직비디오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아마 명백히 그 영상이 표현하고자 하는 '광기'를 위해 동기화된 리듬들일 것이다. 


#1. 


이 영상의 서사는 노래의 가사만큼이나 단순하다. 정체 모를 어느 존재가 한밤 중에 쓰레기통에서 나와 어느 건물에 침입해서 춤을 추고, 다시 쓰레기통으로 돌아가는 게 전부다. 서사를 제대로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게 대부분의 뮤직비디오라는 점을 고려하면, 서사가 이토록 선명하고 단순하다는 것도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내용이 불분명할지언정 흐름이 선명한 건 The Chemical Brothers의 뮤직비디오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Midnight madness"라는, 곡명과 똑같은 구절만 내내 반복되는 이 곡은 가사보다는 드럼, 베이스, 전자음의 조합과 박자 변화와 같은 리듬의 전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뮤직비디오 또한 특정한 주제를 전달한다기보다 곡의 전개에 따라 카메라의 움직임도 주인공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2. 


기본적으로 속도의 변화를 통해 긴장과 이완을 (상당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탁월하게 조절하는 곡만큼이나 뮤직비디오도 완급조절이 확실하다. 처음에 곡의 전개가 나타날 때는 인물의 움직임이 빨라지거나 커지는 것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따라간다. 카메라 자체의 움직임은 중요한 시점을 위해 상당히 절제되고, 한 쇼트(shot)가 상당히 길다. 


4분 10초의 영상에서 첫 1분 20초만큼이 하나의 쇼트(1)이고, 1분 20초부터 1분 58초까지가 하나의 쇼트(2)이고, 거기부터 2분 24초까지가 또 하나의 쇼트(3)다. 다시 거기부터 2분 42초까지(4), 2분 45초까지(5), 거기서 다시 3분 37초까지(6), 그리고 끝까지가 하나의 쇼트(7)다. 4분 10초짜리 뮤직비디오에서 화면 전환이 고작 6번 있었다는 의미다. 


아무리 이 영상이 2008년에 유튜브에 업로드되었다고 해도, 1980년대에 나온 뮤직비디오보다 화면 전환이 적은 건 명백한 사실이다. 화면이 전환되는 지점조차 사실상 카메라가 인물을 담기 위해 불가피하게 시점을 이동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점 전환을 주요 목표로 쇼트를 끊은 것도 아니다. 


#3. 


쇼트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체가 명백히 하나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 만큼 모든 쇼트의 연결성이 긴밀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긴밀한 것들은 따로 모았다. 그래서 의미를 기준으로 쇼트들을 묶으면 아래의 네 덩어리가 된다. 


a. (1) 쓰레기통에 숨어 있던 그는 나와서 빈 거리를 잠시 돌다가 춤을 추고, 건물을 기어오른다. 

b. (2), (3) 건물에 기어오른 그는 계단과 난간 등을 뛰며 거의 묘기를 부리다가 한 건물의 창문을 연다.

c. (4), (5), (6) 창문을 열고 대기실로 들어간 그는 계단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서 조명을 켜고 무대에 올라 춤을 추고, 창문을 연다.

d. (7) 창문을 연 그는 경찰차 위에 몰래 올라타 탈출하고 다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한 식당 직원이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한 무더기 버린다. 


여기서 인물이 보여주는 관절이 반쯤 없는 듯한 움직임은 건물을 기어 오르거나 목이 뒤로 180도 돌아가는 등의 장면들로 서서히 고조되고, 움직임의 역동성은 갈수록 커져서 건물 침입 이후 스테이지 위에서 가장 고조된다. 달리 말하면, 이 뮤직비디오에서 음악의 고조는 움직임의 고조이고, 동시에 그것은 거리-건물 외벽-건물 옥상-건물 내부로 갈수록 높아지는 불법성과 위험에도 대응한다. 


즉, 이 뮤직비디오에서 음악, 춤, 불법성, 위험은 같은 리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러한 리듬의 동기화는 모두 이 곡의 유일한 언어적 요소인 'Midnight Madness', 즉 자정의 광기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4. 



주인공이 들어간 곳은 공교롭게도 어느 공연 무대를 위한 대기실이고, 더욱 공교롭게도 아무도 없는 그 건물에서 대기실에만 불이 켜져 있다. 그는 창문을 통해 대기실에 들어가 천연덕스럽게 춤을 추고, 냉장고를 열어 음료를 보고, 거울을 보며 맘에 든다는 듯 양손의 엄지를 치켜 세운다. 창문에 붙어 있는 경보기가 울리고 있다. 그는 개의치 않고 계단을 화려하게 달려 내려가서 무대로 향한다. 


누구도 그를 위해 준비한 적 없는 스테이지에서 그는 열정적으로 춤을 추다가 스피커를 무너뜨리고 창문으로 향한다. 경찰차 소리를 들은 걸까? 하지만 음악을 틀고 춤을 췄는데, 과연 경찰차 소리가 들렸을까? 그렇다면 경보가 울린 뒤 몇 분 뒤에 경찰차가 어디서 오는지 몸으로 알 만큼 자주 이런 일을 반복했던 것일까? 경찰차가 그렇게 느리게 움직인 이유는, 막상 가보니 아무도 없는 일이 잦았기 때문일까, 이번처럼?


쓰레기통을 열고 나와서 남의 건물을 타고 올라가고, 남의 무대를 탈취해서 불법적으로 춤을 추고 경찰차 위에 몰래 올라탔다가 다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서 쓰레기에 파묻힌다. 이것은 '이상한(queer)' 존재들의 삶의 방식이다. 도시 한복판에서도 쓰레기통에 숨어 있는, 그리고 나를 위한 무대는 없고 무대를 직접 만들 여력도 없어서 남의 무대를 몰래 빌리는 데 익숙해지는 것. 


무기력함이 일상을 덮칠 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이 뮤직비디오가 떠오르고, 여기서 해방감을 느끼는 건 그래서일까. 겉보기에 내 일상과 요만큼도 비슷해 보이지 않는 뮤직비디오에서 내 삶의 단면이 보이는 것 같다. 쓰레기통과 스테이지를 오가며 살아가는 삶이란, 이렇게나 외롭고 충만하고 이상하리만치 즐거운 것. 


https://youtu.be/cHtoBqmRY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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