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회사
준비물: 시골의사의 부자 경제학, 3M 방음 헤드셋, 연습장
월차를 냈다. 금요일에 2호선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쉬는 날 일부러 출근시간 지하철을 타다니. 남들이 보면 제정신이냐고 물어볼 만하다. 신도림에 도착하니 역시나 엄청난 인파. 시간대를 바꿔야 하나 고민했다.
여유 있게 앉아 읽는 독서를 예상했다. 처음부터 빗나갔다. 역시 인생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간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졸고 있다. 비율은 8:2 정도. 책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술에 취해 탔던 2호선 느낌을 떠올렸다.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지하철은 5~6년이 지나도 변함없었다. 8:49 강남역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이제 본격적인 여행 시작이었다. 9:18 소음방지 헤드셋을 썼다.
나는 지하철에서 책이 잘 읽힌다. 신기할 따름이다. 지하철 여행을 기획하게 된 주된 이유다. 더불어 우연한 장소와 사람에게서 오는 예측불가를 느끼고 싶었다. 여행의 메인 테마는 '책과 함께 하는 예측불가 여행'이다.
나름의 규칙을 정했다. 그래야 기존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식당을 고르는 법칙 : 배고프거나 책을 다 읽으면 내린다. 출구는 랜덤. 역 밖에서 처음 보이는 식당에 들어간다. 홍어를 못 먹어도 홍어집이 나오면 들어가는 거다. 결연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 걸기 : 여행 시 최소 1명 이상 말을 건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 명함을 주기로 했다. 블로그 주소도 알려주면 괜찮을 듯했다. 목표는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다.
9:51 신도림 도착 : 2호선 한 바퀴 약 1시간 33분 소요 확인. (TMI)
교대, 강남, 삼성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렸다. 신도림에서 다시 사람들이 들어오지만 출근시간에 비해서 현저히 적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핸드폰을 보고 나는 책과 씨름 중이다. 이번 책은 난도가 있는 편이다.
옆자리 사람들은 계속 바뀌었다. 엉덩이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책에서 얻은 한 문장은 '재테크의 핵심은 자산의 가치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키우는 것'이다. 이 저자 기억해야겠다. 그나저나 사람들한테 말 걸 엄두가 안 난다.
불안한 마음에 준비한 질문 내용이다. 과연 예상대로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얼굴 모르는 누군가의 반응이 두렵다.
< 준비한 질문 내용 >
1.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2.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3. 가장 슬펐던 순간은?
4.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 있다면?
5. 과거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6. 책에 이 내용을 실어도 될지?
10:40 즘 되니 배가 고팠다. 보통 11시 즘 점심을 먹는다. 배꼽시계의 정확성이란. 아직 책은 다 읽지 못했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집중이 안될 것 같았다.
점심 규칙을 실행하는 첫날이다. 오늘은 자장면이 먹고 싶다. 중국집이 나왔으면 좋겠다. 10:54 헤드셋을 벗자, 주변 소음이 갑자기 폭발했다. 을지로 4가를 지나고 있다.
안돼... 11시에 내려야 하는데 '시청역'이다. 다니고 있는 회사가 있는 역이다.
처음부터 규칙을 깨뜨릴 수 없었다. 11시 시청역에서 내렸다. 전철을 탄지 2시간 42분 만이다. 얼른 밥부터 먹자. 배가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돌고 돌아 내린 도착한 곳이 매일 오는 시청역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요금은 1550원. 추가 요금 300원. 평일이니 회사 사람들을 마주칠 수도 있다. 서둘러 걸었다. 12번 출구로 나갔다. 거짓말처럼 3층에 '대륙 손짜장'이 보였다.
이곳은 시청역 1번 (1호선) 출구이기도 하다. 자주 오던 곳이다. 맹세코 중국집의 존재는 몰랐다.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수타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회사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주위를 살피며 들어갔다. 수타면이 너무 맛있었다.
첫날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