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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킴 Nov 05. 2022

2호선 여행의 이유

과거를 바꿀 기회

내 인생은 애매했다. 부모님께 용서를 구할 발언이다. 사실인걸 어쩌겠나. 자기 객관화가 높은 걸로 해두자. 현재보다 과거에 머물렀다. 도전 같은 건 없었다. 비관적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 느꼈다. 들키지 않기 위해 가면을 썼다.   


적절한 허풍과 거짓말을 섞었다. 그럴듯한 인물을 만들어 사람들을 속였다. 지금 생각하니 속아준 거다. 속은 척했을 뿐이다. 당시엔 들키지 않았다며 안도했다. 하지만 두려움이 이어졌다. 언젠가 나를 알고 떠날까 무서웠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제법 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성적이 떨어졌다. 극복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반짝이던 눈은 총기를 잃었다. 성적은 더 떨어졌다. 마땅한 꿈도 없었다. 당시 나의 답은 군인이었다. 해군사관학교를 목표로 했다. 


수능을 망쳤다. 당연히 떨어졌다. 성적에 맞춰 나와 무관한 의상디자인과에 들어갔다. 대학생이라고 정신없이 놀았다.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다. 언제든 삶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생각만 했다. 행동하지 않았다.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목표로 했던 회사에 떨어졌다. 교수님이 신경 써 줬는데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보험이 뭔지도 모르고 팔았다.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온다. 곧 인생을 가르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일은 다른 보험회사로 옮기면서 일어났다. 


기존 계약을 강제로 해지시켰다. 새로운 회사로 가입시켰다. 보험상품은 2년 이내 해약 시 받은 수당을 뱉어야 한다. 당시 나는 고객이 제법 많았다. 환수 금액도 상당했다. 돈 무서운 줄 몰랐다. 영업한다고 추가 대출까지 받았다. 절벽으로 가고 있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한스럽다. 저 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에 빠져 다시 3년을 낭비했다. 당시에 만나던 여자 친구가 떠났다. 당연했다. 정신을 조금 차렸다. 게임을 끊고 애완동물 장비 관련 회사에 입사했다.


거리가 멀었다. 지하철 편도 2시간 거리였다.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없었다. 일을 해야 했다. 아직 남아 있는 빚. 허무하게 써버린 시간. 뭐라도 해야 했다. 뽑아준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했다. 운전도 하고 조립도 하고 렌털 채권도 관리했다.


거리를 제외하곤 나쁘지 않았다. 특히 사람들이 좋았다. 사람들과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지하철이 끊기면 장거리 택시를 탔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술을 먹고 새벽에 도착했다. 


곧 나가야 할 시간. 얼마 쉬지 못하고 출근했다. 신도림역에서 잠실까지 2호선을 타야 했다. 운 좋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잠이 들었다. 싸한 흔들림에 눈을 떴다. 낯선 역 이름, 한산해진 객실 안.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현역이었다. 노선도를 확인하니 2호선을 거의 한 바퀴 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술이 안 깼다. 당시 출근을 빨리 하는 편이라 회사에서는 그냥 넘어갔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나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일이 벌써 6년 전이다. 지금은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고 있다. 술도 담배도 안 한다. 하고 싶은 일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건이 떠올랐다. 다시 2호선을 타고 싶어졌다. 알 수 없는 끌림이 느껴졌다. 관련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환선을 타며 책을 읽고, 아무 곳이나 내려서 밥을 먹어 볼까? 새로운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고 그걸 계기로 책을 써볼까? 생각은 점점 구체화됐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나의 과거는 더 이상 후회로 남지 않게 될 터였다.


애매하고 초라했던 나의 과거가 누군가에겐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저 사람도 했는데 나도 할 수 있어.' 하고 용기를 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힘이 났다. 오랜만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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