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는 창작자이기 이전에 직장인이며 조직 문화에 잘 녹아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지상파와 종편을 포함해 수 차례 최종면접을 거치며 느낀 소회다. 부끄러운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난 조직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방송국 경영진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한 종편의 대표이사는 면접 도중 '연극이나 문학 같은 창작활동을 해야할 사람 같은데'라는 말까지 했다.
이것만 보면 면접을 개판으로 본 거 아니냐 의심하겠지만, 자부하건대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면접 연습에 매진했다. 회사에 열과 성을 다하겠다는 의지와 교양PD로서의 참신한 포부를 적절히 섞어가며 스스로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어떤 수사나 포장으로도 숨길 수 없는 모습이란 게 있는 모양이다. 사람 평가엔 도가 튼 경영진 눈에 나의 부단한 노력은 한낱 가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해한다. 회사에선 능력이 능사가 아니다. 조직이기에 잘 어우러지는 인간형을 바랄 것이다. 전쟁 같은 일상에서 개개인의 성격을 품어줄 아량까지 기대하는 건 욕심일 테다. 그래서 어느 순간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구에 맞춰 나를 수없이 기만하고 가면을 뒤집어써도 그들은 날 귀신 같이 알아챘다. 대화를 나누는 표정에서도 뭔가 불편한 기색이 느껴지고, 어떤 연기를 해도 감출 수 없는 내 색깔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결이 맞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기획안 미션을 거치고 가치 있는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돌아오는 반응은 오직 재미였다. 자극적인 재미를 끌어내 시청률을 사수할 묘수가 있는가. 그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해는 갔다. OTT 파도에 휩쓸리며 매년 적자행진을 기록하는 마당에 빠듯한 예산을 위험 부담이 큰 프로젝트에 투자할 방송국은 없다. 눈에 보이고 확실한 재미. 그들에겐 그게 가장 안전한 선택지였다.
분명 다른 회사임에도 목표는 다들 비슷했다. 유튜브와 OTT에서 유행하는 트렌드를 답습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청자층의 파이를 최대한 많이 따 와야 한다는 것. 트렌드세터였던 방송국이 이젠 트렌드의 콩고물을 받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됐다는 걸 절감하니 괜시리 무기력해졌다. PD가 되더라도 기시감이 느껴지는 콘텐츠를 만드는데 전념해야 하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싶은 막막함도 찾아왔다. 그렇게 나는 10여 년 넘게 품어왔던 PD라는 꿈을 점점 지워가고 있었다.
꿈을 그리는 건 긴 세월이었지만 꿈을 지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배부른 소리라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모름지기 창작자란 자신이 만드는 콘텐츠에 유사한 것들과 다르다 말할 수 있는 한 끗 차이,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던지는 작은 메시지 하나 정도는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몸을 담고자 했던 방송국들은 그런 꿈을 지원해줄 만큼의 여유는 없는 곳이었다. 그런 건 소위 짬을 먹고 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시간이 올 때까지 허드렛일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결국 작년 하반기를 끝으로 PD 공채에 마지막 안녕을 고했다. PD의 꿈을 목전에서 놓치며 아쉬움을 토하고 다시 심기일전하기를 반복했던 지난 날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살아오면서 감히 생각하지도 않았던 꿈들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끼니 오랜 기간 잊고 지냈던 생동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PD라는 꿈을 접고 인생 제2막으로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