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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14. 2018

필동 골목

나는 여기서 어머니를 만났다

내가 대학교에 진학하자 어머니는 같이 학교 주변을 구경하러 가자고 하셨다. 생각보다 초행길은 쉬웠다. 버스를 한 번만 갈아타면 됐으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필동에 도착했다. 여기엔 옛 정취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집들이 골목마다 즐비했다. 적갈색 벽돌들은 희뿌옇게 색이 바랬다. 벽돌 사이에는 그간 지내온 삶을 차곡차곡 쌓아 간직하겠노라는 고집이 물씬 느껴졌다. 나는 꾸미지 않은 이 모습이 좋았다.


발걸음을 옮겨보니 인쇄소가 꽤나 많았다. 출판 시장은 죽어가고 있다던데 인쇄소들 앞에는 두텁게 묶인 종이 꾸러미가 한가득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한 사장님은 올해가 유독 풍년이라며 연신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트에 실려 이리저리 오가는 인쇄물들에선 구수한 땀내와 활력이 느껴졌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저 유명한 필동면옥이 있었다.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입구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담백한 냉면 생각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즈음 어머니가 대뜸 말씀을 꺼내셨다.


"이 동네가 엄마 어렸을 때 살던 곳이야."


생경했다. 별안간 나는 어머니의 추억 위에 서게 되었다. 여긴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던 당신이 웃고 울며 떠들었던 골목이었다. 어머니는 골목 사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야기를 이어나가셨다. 학교 후문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은 원래 주택가였다. 어머니 친구이신 내 오촌 누님도 거기 사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주 그 집에 놀러 가면 끝내주는 떡볶이를 먹을 수 있었다고 회상하셨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입맛을 다시는 어머니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배어 있었다. 그렇게 맛있는 추억이 쌓여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진 지금이 내겐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다시 어머니가 내게 말을 건네셨다.


"40년이 지나고 네가 여기서 20대를 보내게 될 줄은 몰랐지. 운명처럼. 신기해 참."

풋풋한 회상은 계속 이어졌다. 학교로 이어지는 언덕배기에서 얄궂은 남자아이를 응징하러 냅다 뛰었다던 어머니 눈에는 여전히 정의로운 생기가 넘쳤다. 줄곧 반장을 도맡으며 정의의 사도로 활약했던 어머니의 에피소드는 내게 낯설지가 않았다. 어린 내게도 언제나 그런 모습이셨으니 말이다. 초등학생이던 당신 손을 잡고 필동 골목을 지나 퇴계로를 당차게 활보하시던 외할머니 모습도 생생하게 재현됐다. 학교에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할머니께서는 이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와 화끈하게 해결하셨다고 한다. 모전여전이라던가. 대장부 기질은 세대를 거쳐 전승되어 이 골목을 가득 메웠다.


이런 추억들이 모여 자그마한 단편집으로 꾸려지는 순간, 필동은 내게 더 이상 단순한 캠퍼스가 아니었다. 여기는 내가 마땅히 사랑하고픈 곳이 되었다. 내딛는 발자국마다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세월의 감촉마저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작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나는 매일 여기서 어머니가 새긴 흔적을 마주할 수 있을까. 21살 대학 새내기가 품은 고민 치고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그 순간, 운명적인 연대의식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처음에 느꼈던 무거운 마음은 이미 무뎌졌다. 과제와 시험에 지쳐 집에 돌아갈 때면 앞만 보고 걸었다. 아니면 제일 빠른 버스나 지하철이 언제 오나 찾기 바빴다. 술을 마시지 않는 탓에 허정허정 거리를 배회할 일도 없었다. 학기 중에 내가 마주하는 필동 골목은 그저 등교와 귀가를 위해 거쳐야 하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 앞 분식점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먹고 있는 여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서로 오늘 있었던 일을 나누며 까르르 웃는 모습이 참으로 순수했다. 문득 어머니가 생각났다. 40년 전 당신도 여기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떡볶이를 드셨을 테다.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해 아쉬워하던 4년 전 당신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다가왔다.


그제야 필동이 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내뱉었던 천진난만한 숨결과 나의 한숨이 뒤섞이고 있었다. 나는 그 가게로 들어가 떡볶이 2인분을 샀다. 집에 돌아가 매콤한 필동의 시간을 나누며 그 아쉬움을 조금 달래볼 생각으로.


 그 날, 나는 여기서 어머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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