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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Oct 29. 2018

예술은 시대를 거부했다

영화 <트럼보>를 보고

니체는 말했다. 문화가 위대한 순간은 다름 아닌 패덕(敗德)의 시대라고. 암연한 시대일수록 문화는 힘껏 발광하며 부덕한 세태에 일갈한다. 예술이 대표적이다. 적나라한 비판부터 오묘한 풍자까지 아우르며 변신하는 예술은 언제나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물론 이 얄밉도록 유연한 예술이 언제나 고고하지는 않았다. 때론 땅에 묻혔고 불에 태워지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죄목은 비슷했다. 바로 시대 이념에 반하는 죄였다.


1940년대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상을 무기로 삼아 적과 아군을 철저하게 양분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불안한 기시감과 함께 칼날은 어김없이 황금기를 구가하던 할리우드로 향했다. 공산주의를 말끔히 지워내듯 이념을 머금은 파도는 맹렬했다. 당대 최고 시나리오 작가였던 달튼 트럼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할리우드에서 매장됐다.


그렇게 <트럼보>는 이념이 그린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됐던 피의 예술을 조명한다.



당시 반공주의라는 기치에 반론이란 없었다. 한껏 광기를 머금은 1940년대 미국은 매카시즘을 앞세웠다. 그리고 진보 예술가들에게 반역자라는 멍에를 씌웠다. 많은 이들은 굴복했고 좌절했다.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트럼보도 이러한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를 중요한 전환점으로 삼는다.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창작활동을 이어나가기로 한 것이다. 대신 트럼보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로 한다. 그리곤 11개에 달하는 가명들을 만들어낸다. 신념을 지키기 위한 트럼보식 위트라면 과연 과찬일까.

 

영화 속에서 트럼보라는 존재는 날카로운 시대에 스며든 완충재와도 같다. 그는 시(是)와 비(非)만 존재하는 살벌한 세상에 연신 조소를 날린다. 공산주의 활동과 관련한 전력을 묻는 청문회 자리에서는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나 노예이겠죠.” 트럼보는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이 원하는 바를 알고 있다. 정당성이라는 명분을 위해 확실하게 정해진 답을 원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그는 불온한 반역으로 치부되는 생각을 재기발랄한 단어들로 갈음하며 끈질기게 자신을 지켜낸다.


하지만 신념은 맹목적인 믿음 아래 철저하게 부정된다. 헤다 호퍼를 위시한 주류 집단이 강조하는 바는 간단하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적대적인 신념과 존재는 모두 처단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소수 지도층이 천명한 방향성과 선전 구호는 미디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내 견고한 집단의식을 만들기에 이른다.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미국 사회에 역설적으로 전체주의가 횡행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공산주의자가 말하는 선택적 자유와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맹목적 단결은 혼탁한 시대의 돌연변이로 자리하며 황당한 대립구도를 형성한다.



트럼보의 대본은 언제나 담배와 위스키로 완성된다. 부와 명성을 담보했던 대본들은 어느새 짙은 고뇌를 머금은 생존 수단으로 바뀌었다. 담배와 위스키가 지닌 모습도 달라졌다. 예술가에게서 풍기는 여유로움을 대변했던 것들은 어느새 지독한 절망을 머금고 있었다. 빨라지는 타자 속도를 감내하지 못하고 끝내 종이를 찢어발기는 트럼보 옆에는 수없이 쌓인 담배꽁초와 빈 위스키 병만 그득하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고독하게 다가올 즈음, 단단하게 묶인 대본은 화사한 빛을 받으며 세상 밖으로 나온다. 지난한 고통을 보람된 결실로 매듭짓는 집념은 언제나 절묘하게 설득력을 지닌다.



트럼보는 유연한 사람이다. 절망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며 과거의 영광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예술가에게 자존심은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내려놓는다. 삼류 영화사에 싸구려 대본을 넘기고 변변찮은 봉급을 받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잔잔한 웃음은 그의 입가를 떠나지 않는다. 그 웃음은 영화 전반에 걸쳐 자존심을 떠나보내고 자존감을 지켜낸 자의 성취감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트럼보는 매순간을 이겨내는 법을 터득하며 작품세계에 짙은 풍미를 더해간다. 이러한 노력은 2회에 걸친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숱한 가명을 앞세운 채 작품을 선보인 선택이 옳았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였다.


블랙리스트는 시대가 낳은 역작을 막지 못했다. 스스로를 지켜낸 자에 대한 숭고한 훈장은 그렇게 세계 영화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집필한 작품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트럼보는 보편적인 상식을 무너뜨려야만 했다.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평민의 이야기부터 끊임없이 저항하는 노예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작품 속 수많은 인물들이 되어 통념에 맞섰다. 그는 작품 안에서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타자를 연신 두드리는 손길에는 간절한 진심만이 가득했다. 세상이 굳건한 그의 다리를 후려칠 때마다 트럼보는 진실한 태도로 버텨냈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다. 어느새 시대가 불러온 광풍도 멎었다. 많은 이가 피를 흘렸고 누군가를 잃었다. 단단했던 예술 정신도 아스라이 스러졌다. 그러나 <트럼보>는 말한다. 우린 모두 틀릴 권리가 있다고 말이다. 선악을 구분하며 누군가를 단죄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이념이라는 전염병 아래 신음했던 순간을 직시하고 모두에게 연민을 지녀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는 실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트럼보는 다음을 강조한다.


어두운 시대에는 모두가 강요받은 피해자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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