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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01. 2018

그들은 확신했고 교만했다

영화 <빅쇼트>를 보고

<빅쇼트>는 영악하다. 결코 조급해하지 않는다. 곳곳에 산재한 블랙유머 앞에서 긴박한 상황조차 무색하다. 절망 앞에서 실없는 위트가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영화는 차디찬 불신을 머금고 있다. 사회와 제도, 그리고 사람에 대한 불신은 철옹성처럼 단단한 금융권을 조준한다. 현실을 살펴보면 그렇다. 한정된 재화를 최대한 끌어오기 위한 샅바싸움은 비소와 자만으로 가득하다. 결국 월스트리트가 자랑하는 자본과 이성은 한낱 이기적인 탐욕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영화 속 제로섬(Zero Sum) 게임이다. 누군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는다. 남의 슬픔은 곧 나의 행복이다.


그야말로 냉혹한 희비가 공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잔망스러운 생기를 뽐낸다. <마진 콜>, <인사이드 잡> 등 서브프라임 사태를 정석으로 다뤘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빅쇼트>는 시선에 차이를 뒀다.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 입장에서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잃는 자들이 아닌 기회를 포착한 자들에 주목한다. 금융권 내 이상기류를 감지한 이들은 비상식적인 도박을 감행한다. 주택시장 채권 가치가 하락할 것이라는 예측에 베팅한 것이다. <빅쇼트(공매도)>라는 제목은 바로 이 행위를 가리킨다. 공매도는 당시 일반적인 상식에 부합하지 않았다. 시장은 건재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관론자들은 썩은 환부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기회와 절망을 동시에 발견한다. 이처럼 상식과 비상식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영화는 굴곡진 리듬을 거듭하며 생동감을 자아낸다.



영화는 옴니버스 형식을 택했다. 이로 인해 플롯은 더욱 단단해진다. 그 가운데 개인들이 교착되는 특징은 자본으로 얽매여있는 사회 구조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전혀 다른 인물들은 동일한 현상을 주목하며 유사한 결론을 내기에 이른다. 자본에 대한 맹신이 낳은 제도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응집되는 순간부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영화는 귀납적으로 서브프라임 사태를 부각시키며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탄탄한 구성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파편화된 개인이 제도라는 공통분모를 중심에 두고 동일한 집단으로 직조되는 과정은 문제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보여준다.


친절한 설명도 큰 장점이다. 매 상황에선 어려운 개념들이 나타난다. 영화는 이를 알기 쉽게 전달하고자 시각적 요소를 활용한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저명인사들이나 거품목욕, 해물스튜, 블랙잭 등의 이질적인 개념들은 금융권이 지니고 있는 허상을 적절하게 짚어낸다. 또한 유쾌하고도 느긋한 분위기에서 활용되는 비유들은 역설적으로 공포감을 증대시킨다. 이렇게 <빅쇼트>는 내실없는 자본이 제도를 만나 멋지게 포장된 현실을 벗겨내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조명한다.


끝을 모르고 고공행진을 펼쳐왔던 자본시장이 이제 아찔한 높이에서 추락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작중 인물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부분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특징은 상황에 대한 동질감을 높이는 효과를 불러온다. 그들이 지닌 문제가 아닌 우리도 포함된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을 향유하는 현대인 모두를 책임의식에 귀속시킨다. 그 불편함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장르 변경을 꾀하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신나는 배경음과 자극적인 장면들로 가득했던 자본의 화려함은 어느새 우중층한 절망으로 변모한다. 우리가 익숙했던 다큐멘터리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결과적으로 엔터테인먼트와 다큐멘터리가 대비 속에서 공존하는 모습은 불안한 자본 사회와 허망한 일장춘몽을 가리킨다. 



내레이터인 자레드 베넷도 눈길을 끈다. 그는 자본과 금융 중심에 몸을 담고 있는 내부자이다. 하지만 이익을 위해 금융계가 무너지는 것을 기회로 삼고 방관한다. 이토록 이기적인 그를 따라 우리는 서브프라임 사태 속 핵심을 마주한다. 그가 소개하는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성공으로 다가가면서 동시에 몰락에 다가가는 사회를 바라볼 따름이다. 이처럼 본능과 도덕성이 상충하며 생겨나는 모순점들은 영화가 끝까지 견지하고자 하는 불편한 현실이다. 결국 내레이터가 선사하는 친절한 설명은 이 불편함을 담보하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다. 후반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서 교활함과 냉정함이 물씬 느껴지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빅쇼트>는 속물적인 지성이 일궈낸 아이러니를 조명한다. 모든 것을 잃고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허상 속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무력함을 내재한다. 동시에 그 무력함에는 그들이 만든 제도를 맹신했던 교만한 잔상이 서려있다. 반면 전례 없는 상황에 베팅한 주인공들은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거대한 절망을 목도하면서 승리감을 만끽하는 오묘한 상황에 그들을 옮겨놨을 따름이다. 날카로운 시선이라는 칼날은 오만한 확신으로 가득한 사회와 제도를 겨눈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마크 트웨인의 말을 되새겨볼 때이다.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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